432.
“여긴……?”
갑작스럽게 바뀐 풍경에 아르온은 당혹감을 느꼈다.
“난 분명 에레보스와…….”
조금 전까지의 일을 떠올리며 아르온은 자신의 곁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넌?”
당혹감을 드러내는 아르온을 보며 숨을 고른 레오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에 타 너덜너덜해진 히어로 레코드의 작은 조각.
아르온의 기록이었다.
“레오님. 어떻게 아르온님이 이곳에 계신 거죠?”
당황한 얼굴로 묻는 멜리나에게 레오가 작게 말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
레오는 상황을 빠르게 수습하고 아르온, 멜리나와 함께 플로브 가문의 영토로 돌아왔다.
멜리나는 레오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온은 혼자서만 상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별?”
당장에라도 쏟아져 내릴 듯이 하늘에 무수히 박힌 별을 바라볼 뿐이었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달을 바라보았다.
소름 끼치는 붉은 달이 아니었다.
처음보는 아름다운 밤하늘의 풍경에 그저 넋을 놓을 뿐이었다.
잠시 후, 밤하늘에서 시선을 뗀 아르온이 레오에게 물었다.
“넌 카일이지?”
‘루나 때와 같아.’
과거의 군단장, 포이즌 킹 제르디악이 세이룬에 모습을 드러내고 마물 여왕 실라투나가 세이룬을 침공했을 당시.
레오는 폴리움에 담긴 신력을 사용해 루나를 영웅의 세계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때와 똑같았다.
그 증거로 레오의 몸에 깃들었던 신력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맞아.”
레오가 아르온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 네가 맞다고? 그럼 리시나스는? 루나랑 드웨노는?”
아르온의 혼란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내가 영웅의 세계에서 아르온을 만난 건 두 번이야.’
첫 번째는 작년 여름 방학 당시 아르와 아르온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였다.
‘두 번째는 이번 학기 초, 드웨노의 세계를 공략하면서였지.’
당시에 드웨노는 레오가 미래에서 온 카일이라는 것을 눈치챘고 아르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기억이 없다는 건. 첫 번째 공략 당시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르온.”
“응?”
“이 모습을 한 나와 만난 건 이번이 몇 번째야?”
“그 이상한 묘족 아이와 만났을 때 이후로 두 번째야.”
‘그렇군.’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도 다른 페이지에서 만났던 기억을 나와 만난 다음 떠올렸다고 했어.’
아르온도 똑같았다.
‘드웨노 세계에서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이 아르온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인 건가?’
드웨노 세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드웨노.
‘다른 사람의 히어로 레코드에서의 기억은 이어지지 않는다는 소리군.’
상황을 정리한 레오가 심호흡했다.
“아르온, 잘 들어.”
“응.”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시대는…… 우리가 살았던 재앙의 시대로부터 5000년 후야.”
“여기가 5000년 후의 미래라면, 넌?”
“나는 환생을 했어.”
“다시 태어났다는 거야?”
“그래.”
레오의 대답에 아르온은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미래고 카일이 환생했다면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
“그럼 내가 어떻게 5000년 후의 미래로 오게 된 거야?”
“지금 시대에는 히어로 레코드라는게 있어.”
레오는 아르온이 이곳에 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아르온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이긴 거지?”
이 시간대가 정말 미래라면 그 자체만으로 대영웅들이 태초의 악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하지만 아르온은 레오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런 아르온을 보며 레오가 웃었다.
“그래, 우린 이겼어.”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심한 듯,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루나가 그렇게 이야기하던 별이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아름다운 밤하늘에 아르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런 아르온을 보며 레오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쁘다, 왜 루나가 자기는 별이 될 거라고 했는지 알겠어.”
아르온의 중얼거림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엄청 안 어울리지 않냐?”
“응. 안 어울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멜리나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밤하늘을 봐 왔기에 그녀에게는 감흥 없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 당연한 풍경이 5000년 전에는 상당도 할 수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멜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지금 사는 모든 이들을 대표할 순 없겠지만…… 감사합니다.’
***
이후에 레오는 아르온에게 5000년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재앙의 시대가 끝난 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르온은 놀라워했다.
“베르키아가?”
아르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애가 엘프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존경받아?”
“그래.”
“세상에나. 걔가?”
‘……대체 이분들이 기억하는 베르키아님은 어떻길래?’
베르키아가 엘프를 재건한 위인으로 칭송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르온은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멜리나는 궁금증이 치미는 걸 느꼈다.
베르키아 에르사르.
성운의 시조와 용자의 제자로 이름 높은 엘프 종족의 위인은 멜리나가 개벽의 영웅들 만큼이나 존경하는 영웅 중 한 사람이었다.
에레보스가 토벌된 이후, 엘프들 이끌고 종족의 부흥시킨 위인이지만 그 이전에 세계의 숲을 재건하는 데 힘을 쏟은 위인이기도 했다.
엘프라는 종족을 떠나 세계적인 위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레오와 알게 되고 멜리나는 베르키아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굉장히 건방진 꼬맹이었지. 눈매는 삐딱하지, 태도는 불량하지. 툭 하면 기어오르지.’
실제로 베르키아를 아는 이의 평가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레오의 말을 조금 걸러서 들었었다.
‘여쭈어볼까? 아니야.’
아르온에게 베르키아에 대해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상상 속의 고결한 엘프 영웅의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멜리나가 고개를 젓는 사이.
“에레보스가 완전히 소멸한 건 아니구나.”
아르온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 개벽의 영웅들이라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네. 너한테도 미안해. 힘든 일을 너희에게 떠넘기고 말았구나.”
“아니에요! 아르온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멜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도움이 되고 싶어. 내가 언제까지 이 시간대에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게 없을까?”
“그렇다면…….”
멜리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시대에는 대영웅님들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영웅 후보생들이 있어요. 지금 이 산에서 그 아이들은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답니다. 그 아이들을 지도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베르키아처럼 말이지?”
“네.”
“알았어.”
“정말 감사해요!”
멜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칼과 루니아, 에이란. 그리고 드리아나와 아르에게는 미리 언질을 주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시대에는 영웅의 세계를 통해 알려진 아르온의 실물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시대 사람이 아르온을 알아보는 건 힘들 것이다.
‘인상이 완전 딴판이니까.’
레오가 환생하고 처음 대영웅의 행적이 기록된 역사책에서 아르온의 초상화를 봤을 때 웃음을 터트렸을 정도였다.
‘인상 때문에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이니.’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날카로운 눈매를 떠올리며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더해 표정 역시 굳건하며 풍기는 분위기 역시 날카롭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전사.
마치 무신과도 같은 포스를 내뿜고 있다.
현대에 남아 있는 아르온의 초상화는 엄청난 보정과 미화가 들어간 산물이다.
알려진 초상화와 다르게 실제 아르온은 온화한 미청년이었다.
눈매는 순하고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전투에서는 가끔 초상화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것보다 작은 것에도 겁에 질리는 모습을 더 쉽게 볼 수 있다.
루나의 주장에 따르면 일명 지켜주고 싶은 타입이라나 뭐라나?
‘지금 시대 사람들이 진짜 아르온을 본다면 그저 용자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르온이 존재하는 영웅의 세계 내에서라면 모를까.
이미 머나먼 과거의 인물인 지금 시점에서 진짜 아르온을 본다고 알아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드웨노의 세계에서 아르온의 본모습을 목격한 다섯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르온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
엘프들의 경우에는 지금도 무수히 많은 엘프가 세이룬에 성지 순례를 하고 있다.
아르온을 향한 수인들의 마음 역시 엘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인의 덕목은 용기와 강함이니까.’
그리고 용기와 강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아르온은 숭배 대상이다.
무수히 많은 수인이 플로브 가문의 영토로 몰려들 것이다.
레오는 아버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아르온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타르타로스를 자극하게 될지 모른다.
레오의 말을 듣고 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아르온은 아이들을 좋아한다.
그가 세상을 구하고자 했던 이유도 아이들이 밝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원했기 때문이다.
“다들 착하고 순수하고 열정 넘치는 아이들이겠지?”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만큼 아이들이 모두 해맑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루나나 드웨노 못지않게 괴팍한 애들이 많은데.’
레오로서는 친구의 환상을 미리 깨고 싶지 않았다.
‘또 아르 때문에 한바탕 기겁하겠군.’
해맑게 웃는 아르온의 모습을 본 레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다음 날 새벽.
레오는 2학년들이 머무는 수련회 장소로 돌아갔다.
레오의 대타 역을 맡고 있던 엔은 인적이 드문 숲속까지 와 레오를 맞이했다.
“고생 많았어.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예. 큰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밤새도록 로드님의 가디언들의 습격이 이어져 학생들 대부분이 피곤함을 떨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엔의 말을 듣고 레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기괴하게 생긴 커다란 봉제 인형들?’
가디언들이 가진 그 기괴한 외관은 레오조차 섬뜩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밤새도록 그것들에 시달렸을 이들을 떠올리며 레오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가디언들 때문에 불침번을 정한 모양인지 몇몇 이들이 피폐해진 얼굴로 모닥불 앞에 서 있었다.
“볼일은 보고 왔냐?”
칼은 퀭한 눈으로 레오를 맞이했다.
“첫날부터 완전 지옥이야. 하하하.”
구슬픈 웃음을 짓는 칼을 보며 레오가 피식 웃었다.
“좀 자 둬. 아침까지 내가 대신 서줄 테니까.”
“그렇게 해줄래? 고맙다! 레오!”
평소라면 사양했을 칼이지만 지금은 너무 힘들었기에 레오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레오가 모닥불을 주시했다.
‘아르온이 이 시대로 넘어오다니.’
신력이 기적을 일으켰다.
그때 아르온에게 손을 뻗은 건 순전히 본능이었다.
그 순간 아르온을 구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르온은 이미 죽었으니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안심시켜주고 싶었어.’
친구에게 그가 이룬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의지에 신력이 반응해 아르온을 지금 시대로 데려오는 기적을 일으킨 것 같았다.
‘아르온에게 허락된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평화의 시대를 함께 만끽한다면 좋겠지.’
심호흡한 레오가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아르온이 교관이라.’
레오가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새로운 종류의 절망감을 한 번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