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하자 2학년들이 엉기적엉기적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씻고 싶어.”
“으윽…… 배고파.”
“나 제대로 못 잤어.”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래곤 로드에세 초대장을 받고 부푼 마음으로 수련회에 참석했던 영웅 후보생들은 단 하루 만에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이건 뭐, 난민촌이 따로 없군.”
“난민도 상황이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을걸? 그냥 완전 거지 소굴이야, 거지 소굴.”
짧은 시간이지만 편하게 눈을 붙인 칼은 아까 전보다 더 쌩쌩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칼이 푸념을 내뱉었다.
사실 어제 잠들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 처참한 몰골들은 아니었다.
각 영웅 사관 학교에서 야생에서 살아남는 훈련을 한다.
영웅 사관 학교 2학년쯤 된다면 사막 한가운데나 바다 한가운데 던져 놔도 살아 돌아올 능력을 익힌다.
그런 학생 중에서도 특출나게 우수한 학생만이 선별된 이번 수련회에서 학생들이 이렇게 된 원흉은 단 하나.
기괴하기 짝이 없는 멜리나의 가디언 군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제 마법사 학생들을 괴롭히던 물리력에는 취약했던 가디언뿐만이 아닌 막강한 물리 방어력을 지닌 가디언까지 출몰했었다.
전날에 험난한 훈련을 한 후 제대로 된 식사는 물론이고 잠까지 설쳤으니 이런 몰골들이 되는 건 당연했다.
레오가 혀를 차는 사이.
팔랑~
“응? 이게 뭐야?”
레오와 칼 앞으로 종이 한 장이 날아왔다.
칼이 종이를 펼치자 작고 정갈한 예쁜 글씨로 짧은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칼 학생, 지금 숲의 서쪽으로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피해 와 주세요. 드래곤 로드가?”
헉-! 하며 숨을 들이켜는 칼.
레오 역시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레오 너도 똑같은 내용이야?”
“응.”
“와, 이거 대체 무슨 일이냐?”
“일단 가보자.”
무슨 일인지 아는 레오는 덤덤하게 흥분한 칼과 함께 멜리나가 부르는 곳으로 갔다.
학생들을 빠져나와 서쪽의 수풀로 다가가자 루니아, 에이란, 아르, 드리아나도 있었다.
“헉?! 레, 레오님?”
레오를 발견한 에이란이 기겁하더니 황급히 루니아 뒤로 숨었다.
“왜 그래?”
루니아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에이란이 대답했다.
“레, 레오님께 이런 몰골을 보여주기엔 창피한걸요.”
“넌 이미 레오에게 볼꼴 못 볼 꼴 다 보였잖아.”
“제가 언제 레오님께 추태를 보였다는 건가요?”
“이상한 망상의 폭주라던가.”
“마, 말하지 마세요!”
에이란이 울상을 지으며 루니아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자네들도 드래곤 로드님이 불러서 온 건가?”
“응. 이렇게 보니까 완전 드웨노님 세계 공략 멤버네?”
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최대한 정리하던 아르가 말했다.
“따로 우리에게 특별 훈련이라도 시키실 생각이신 걸까?”
아르는 머리카락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지 인상을 썼다.
“뭐가 됐든 얼른 씻고 싶어.”
고양이 수인은 수인족 중에서도 깔끔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아르를 보며 칼이 말했다.
“넌 고양이니까 고양이 세수하면 되잖아.”
“너 지금 나 놀려? 튠 가문의 후계자인 내가 얼굴에 물을 대충 찍어 바르고 끝낼 것 같아? 그리고 고양이 세수든 뭐든 물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아니, 물로 세수하는 거 말고. 왜? 그루밍이라고 하나? 침으로 털 정리하잖아. 컥?!”
킬킬 웃으며 말하는 칼의 옆구리에 아르의 주먹이 꽂혔다.
간단한 주먹질이었지만 마치 첼시에게 드롭킥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바닥을 구르는 칼을 보며 아르가 코웃음을 칠 때였다.
“여러분, 간밤에 잘들 잤나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오를 제외한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사박- 사박-
빙그레 웃으며 등장한 멜리나를 보며 칼이 입을 떡 벌렸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멜리나의 자태는 압도적이었다.
“에이란양과 칼군과 이렇게 따로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죠? 반가워요. 드래곤 로드 멜리나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위대한 용족의 로드시여. 에이란 에르사르라고 합니다.”
“후훗,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요.”
부드럽게 웃어주는 멜리나를 에이란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영웅담을 좋아하는 에이란은 침묵의 용의 활약상도 모두 꿰뚫고 있었다.
눈앞에 현 시대를 살아가는 영웅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영웅의 등장이니만큼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칼 토마스라고 합니다, 로드님.”
“반가워요, 칼군.”
면사포 밑으로 멜리나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걸 보고 긴장하고 있던 칼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드님…… 저와 혹시 어디선가 만나 뵌적 있습니까?”
“후훗. 지금 저에게 작업 거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는 익숙함에 자신도 모르게 물었던 칼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난스럽게 칼에게 인사한 후 멜리나가 말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부른 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당부하고 싶은 말이요?”
“네, 잠시 후 이번 수련회에서 여러분을 훈련 시킬 교관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 자리에서 절대절대 흥분하지 마세요. 알았죠?”
“흥분할 일이 뭐가 있어?”
“알았죠? 아르 양?”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르에게 웃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멜리나가 강조하듯 말했다.
“네.”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아르를 보며 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이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세요. 조금 있다 뵙도록 해요.”
멜리나의 말에 일행은 ‘이게 끝?’ 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야영지로 돌아갔다.
-왜 굳이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한 거야?
레오가 마법을 이용해 멜리나에게만 들리게 물었다.
-깜짝 이벤트는 언제나 즐겁잖아요?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멜리나를 보며 레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넌 어떻게 된 애가 드래곤 로드님께 수작질을 부릴 생각을 해?”
“아니, 진짜 어디서 만난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루니아는 기가 차다는 듯 칼에게 말했고 칼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오! 너도 본 적 있다고 느꼈지?”
“글쎄.”
레오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예리하다니까.’
다른 건 몰라도 관찰력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칼이다.
석연치 않는 얼굴을 하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곳에는 학교별로 정렬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와, 리스 선배님은 물론이고 울타 선배님과 자무아 선배님까지.”
루메른 작년 졸업생 중 최고의 활약상을 펼치는 선배들을 보며 칼이 감탄했다.
“루니아 양! 리에니아 선배님도 오셨어요!”
“저 선배가 이런 자리에 빠질리 없잖아. 윽, 근데 저 차림은 대체 뭐야? 선글라스에 캡모자까지 눌러 쓰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에이란과 다르게 루니아는 작년 학생 회장인 리에니아가 반가우면서도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워낙 돌출 행동으로 유명했다.
작년 루세전 당시에는 레오에게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도발하다가 도리어 폴리움에 도발 당하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뭔가 이상한 차림으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 외에도 세이룬 졸업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아조니아 측에는 역시나 작년 학생회장 바니르를 필두로 졸업생이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흥분하지 말라는 거야?”
아르는 고양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리아나도 졸업생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말대로 별 특별한 게 없구먼.”
그렇게 학생들이 집합할 때였다.
“동작 봐라, 동작. 다들 뭘 꾸물꾸물하는 겁니까!”
갑자기 리에니아가 고개를 들고 버럭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학생들이 멈칫했다.
“당장 뛰어!”
갑작스러운 윽박에 학생들이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똑바로 정렬합니다! 영웅 후보생들이라는 사람들이 이것밖에 못합니까!”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소리치는 리에니아를 보며 세이룬 여학생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서, 선배님. 무서워요. 왜 그러세요?”
엉뚱하긴 하지만 언제나 친절했던 전 학생회장의 살벌한 모습에 겁을 먹은 듯했다.
“누가 선배라는 겁니까! 난 수련생 여러분을 훈련 시키러 온 교관입니다. 앞으로 우리를 부를 땐 교관님이라고 부르도록 합니다. 알겠습니까?”
“서, 선배님.”
세이룬의 차가운 북풍보다 싸늘한 리에니아의 목소리에 세이룬 여학생은 눈물을 보였다.
“틸레나 수련생. 앞으로.”
“네, 네?”
“앞으로 나옵니다.”
틸레나는 우물쭈물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엎드립니다.”
“네? 여긴 맨바닥인데요?”
“세 번 말 안 한다. 엎드려.”
틸레나가 힉- 하며 엎드렸다.
“좌로 굴로. 우로 굴러.”
괜스레 눈물을 보인 틸레나라는 학생은 영문도 모른 채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에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눈물을 보입니까! 정신 못 차리지!”
리에니아는 더욱 분노한 얼굴로 악을 질렀다.
“죄송합니다!”
리에니아에게 시달리던 틸레나가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루아가 친분이 있는 세이룬 졸업생에게 물었다.
“쟨 왜 혼자서 저렇게 흥분하고 있어?”
“몰라, 요 며칠 동안 이상한 책을 잔뜩 보더니 자기는 완벽한 교관이 되었다면서 좋아라하던데?”
리에니아의 동기생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흐응? 우리도 저래야 하나? 왠지 재미있어 보이는데?”
토루아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는 사이 후배를 굴릴 만큼 굴린 리에니아는 학생들 앞에 서며 말했다.
“본 교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여러분의 행동에 따라 이 수련회는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예.”
“목소리가 작다!”
“예엡!”
살벌한 리에니아의 모습에 루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럴 줄 알았어.”
“너희 선배 무섭다.”
“난 저런 사람 몰라.”
아르의 말에 루니아가 딱 잘라 모른 척했다.
레오도 리에니아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에도 느꼈지만 굉장히 특이한 애군.’
그렇게 야영지에 살벌한 분위기가 흐를 때였다.
“모두 안녕하세요.”
멜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 로드의 등장에 2학년 전체가 오오오! 탄성을 내질렀지만 이내 리에니아의 살벌한 기세에 똑바로 차렷했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 거린 멜리나가 의례 그렇듯 훈화를 시작했다.
“미래가 창창한 영웅 후보생들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네요. 이번 수련회에서 여러분이 많은 걸 얻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하품이 나올 것 같은 말이 끝나고 멜리나가 말했다.
“본격적인 수련회에 들어가기 앞서, 특별 교관님을 초빙했답니다.”
멜리나의 말에 졸업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 교관이라는 말에 학생들은 눈을 반짝였다.
저벅- 저벅-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한 수인 청년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제가 특별 초빙한 교관인 아칸님입니다.”
“바, 반가워요. 여러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하품을 참던 칼은 일순간 등장한 특별 교관을 보며 멈칫했다.
“커헉?”
“응? 왜 그래?”
칼이 격한 숨을 내뱉자 앞에 있던 테이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루니아와 에이란 역시 입을 떡 벌렸다.
드리아나는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어딘지 모르게 딱딱한 움직임으으로 주눅 든 듯 조심스럽게 멜리나 곁으로 걸어가는 수인 청년.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엄청 패기가 없지 않아?”
“드래곤 로드께서 초빙한 교관님이라면 뭔가 대단할 게 분명한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후욱- 후욱-!”
아르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귀는 쫑긋 서고 눈은 고양이처럼 땡그래졌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전신의 근육이 긴장됐다.
아르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릴 때였다.
콱-!
“냐악?!”
레오는 어느새 아르의 뒤로 다가와 강하게 꼬리를 잡아당겼다.
“이게 무슨 짓이야! 검은 토끼!”
아르는 자신의 꼬리를 잡아당긴 후 냉큼 자리로 돌아간 레오를 향해 도끼눈을 뜨고 소리쳤다.
그와 함께 리에니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구야! 로드께서 말씀하시는데!”
“이, 이건 검은 토끼가!”
아르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리에니아는 단호했다.
“따라 나와라!”
“두고 보자! 검은 토끼!”
리에니아에게 끌려가며 아르가원한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르온은 끌려가는 아르를 보고 살짝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치미를 떼고 있던 레오는 리에니아에게 붙잡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아르를 보며 혀를 찼다.
‘아르온에게 많이 배워야 하는데.’
그런데 정작 가르쳐야 할 아르온이 아르에게 겁을 먹고 있다.
‘갈 길이 멀군.’
헛웃음을 터트리며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