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특별 교관이라는 사람, 이름이 아칸이라고 했지?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아니었어?”
첼시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레오에게 주며 말했다.
“아르온님과 닮았었지?”
“쿨럭, 쿨럭.”
레오의 말에 옆에서 물을 마시던 칼이 사례가 들렀는지 마구 기침했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칼과 거리를 벌렸다.
“오! 그러고 보니 닮았었어.”
첼시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레오는 연금 마법으로 만든 돌냄비에서 스튜를 뜬 후 첼시에게 건네주었다.
“와! 맛있겠다!”
첼시는 스튜에서 나는 냄새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늘 아침 식사 담당은 다름 아닌 레오였다.
전생에서 원정 당시에 식사 시간은 그나마 여유와 평화를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다.
그런 만큼 대영웅들도 식사 시간 만큼은 최대한 맛있는 걸 먹고 싶어했다.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식사 준비를 했었지만, 대영웅 중 가장 인기 있는 순번은 카일과 루나의 순번이었다.
카일의 경우에는 용병이었기에 노숙과 외부 생활에 익숙했고 루나의 경우에는 비약 제조 경험을 살려 훌륭한 요리를 만들곤 했다.
‘리시나스는 요리에 젬병이고, 아르온은 그냥 고기만 구워주면 좋아라했지.’
그래도 두 사람이 식사 당번을 맡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한 게 나오기는 했다.
문제는 드워프였다.
‘요리 또한 예술! 자네들을 위해 독창적인 요리를 준비했다네!’
루나보다 더 연금술에 조예가 깊은 주제에 예술이랍시고 끔찍한 걸 만들어 오곤 했다.
요리하겠다고 화톳불 앞에 서서 수상한 행동을 할 때면 루나가 달려가 걷어차곤 했다.
“으음~!”
스튜를 한 입 떠먹은 첼시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양 볼을 감싸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는 게 굉장히 맛있는 모양이었다.
“먹을만해?”
“응! 맛있어! 엄청 맛있어! 전에부터 생각했는데 레오 오빠는 요리도 잘하는구나! 못하는 게 없네!”
맑게 웃는 첼시의 반응에 레오 앞에 줄 서 있던 학생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레오! 나도 빨리 줘!”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 어제 그 끔찍한 훈련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한참 성장기인 배고픈 십 대들은 레오를 보챘다.
레오에게 스튜를 받은 학생들이 떠들썩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살았어, 레오 녀석이랑 같은 조라서 살았어!”
테이드가 눈물을 흘리며 스튜를 퍼먹었다.
어젯밤 부실했던 식사 탓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레오의 요리는 말 그대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첼시는 절대 요리에 손도 못 대게 해. 쟤가 만든 건 독극물이니까.”
칼이 스튜를 먹으며 경고하자 울컥한 첼시가 앞에 앉아 있는 칼의 등짝을 발로 꾸욱-! 밀었다.
밀리는 와중에도 칼은 단호했다.
“쟤가 만든 건 아마 마족도 죽일 수 있을 거야.”
본격적인 아침 식사 시간이 시작되고 여기저기서 떠들썩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자, 다들 먹어요.”
첸 시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클로에와 셀리아에게 그릇을 나눠줬다.
첸 시아와 같은 식사 조인 학생들도 그릇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표정이 오묘해졌다.
“…… 스튜가 초록색이네?”
조금 굳은 얼굴로 묻는 클로에를 보며 첸 시아가 대답했다.
“피로 회복에 좋은 풀을 넣었어요. 게다가 잘 손질하면 맛도 훌륭하죠. 보기는 조금 그래도 맛있을 거예요.”
셀리아가 용감하게 한 모금 마셨다.
“음. 맛있어. 시아가 우리에게 이상한 걸 줄 리 없잖아?”
그 말에 다른 학생들도 첸 시아표 스튜를 입에 넣었다.
“와, 진짜 맛있는데?”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
“비주얼은 조금 그렇지만 훌륭한걸?!”
“그런데 대체 뭘 넣었길래 초록색이 된 거야?”
“아트로피 풀을 잘 손질해서 넣었어요.”
“오오, 아트로피? 그게 이런 맛이 나는구나. 전혀 몰랐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학생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었다.
“잠깐, 아트로피라면 독초잖아?”
“게다가 그냥 독초도 아니고 맹독을 가진 걸로 유명한 독초 아니야?”
“아트로피는 손질을 잘하면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고 맛도 좋아요, 몰랐죠? 많이 있으니까 다들 많이 먹고 힘내요.”
밝은 목소리로 응원하는 첸 시아를 보며 학생들은 힘겹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아침부터 힘들게 재료를 구해와 스튜를 끓인 그녀의 정성을 알고 있기에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굉장히 나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게 뭐죠?”
“스튜.”
엘리자가 그릇에 담긴 정체불명의 물체에 눈을 꿈틀거리며 묻자 일리아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보기는 이래도 맛있어. 아마.”
“아마? 아마?! 간도 보지 않은 건가요?”
“그래도 어제 네가 만든 것보다는 훨씬 맛있을 거야!”
“지금 아침부터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요?!”
“듀란, 어디가?”
“먹을 걸 구하러 간다.”
“나도 갈래.”
일리아나가 식사 담당을 맡은 곳은 이미 엉망이었다.
루메른 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 중에서도 소란이 일어나는 곳이 많았다.
그때.
“검은 토끼!”
리에니아에 의해 아침 댓바람부터 바닥을 굴렀던 아르가 달려와 레오를 마구 흔들었다.
“너 때문에 아침부터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아아아악!”
분노를 터트리는 아르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그러길래 누가 날뛰래?”
“안 날뛰었거든!”
“날뛰기 직전이었잖아?”
칼이 옆에서 거들자 아르가 눈을 치켜떴다.
“아니거……! 웁?!”
레오는 악-! 악-! 소리치는 아르의 입에 스튜를 떠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르의 눈은 이내 날카로워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라는 듯 귀와 꼬리가 바짝 세우고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성질이 난 고양이처럼 한바탕 난동을 피우려던 아르.
하지만 이내 이내 스튜 맛을 보더니 순순히 입안에 있는 내용물을 오물거렸다.
레오가 자기 그릇을 떠넘겨 주자 얌전히 스튜를 먹으며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보며 넬라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조니아 대표는 참 행복한 것 같아. 불행한 건 금방 잊어버린다고 해야 하나? 굉장히 긍정적이야.”
“킥킥- 단순해서 그래, 단순해서. 커억!”
넬라의 말에 킬킬거리던 칼이 아르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레오 오빠 몫을 주면 어떻게 해?”
첼시가 한숨을 폭- 쉬더니 이내 스튜를 떠서 ‘아-!’ 하고 레오에게 주었다.
“난 괜찮아. 그 수련은 이미 클리어 했으니까.”
레오의 말에 첼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얌- 스튜를 입에 넣었다.
“그나저나 어제 그 수련은 대체 언제까지 하는 걸까?”
“클리어할 때까지 계속할걸?”
테이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레오가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걸 통과해야 교관들에게 본격적인 수련을 받겠지.”
“우웃?!”
스튜를 먹으며 행복해하던 아르가 눈을 번쩍 뜨더니 엄청난 속도로 남은 걸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스튜를 꿀꺽 삼키고 소리쳤다.
“그럼 얼른 그 수련을 이겨내야지!”
갑자기 의욕적으로 변한 아르를 보며 루메른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토끼! 난 수련 준비하러 간다!”
아르가 우다다! 뛰어가자 첼시가 어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저래?”
“이유가 있겠지.”
칼이 입에 숟가락을 문 채 대답하고는 레오에게 작게 속삭였다.
“100% 본인 맞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일이 있었겠지. 나는 첫날 수련을 이미 통과했으니까 만나게 되면 한 번 물어볼게.”
레오의 말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한 명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냐?”
“인상이 완전 다르다 보니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실제로 수인 중에는 용자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자들도 많으니까. 설마하니 본인이라는 상상 자체를 못 하는 거야.”
“하긴.”
루나와 세이룬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그런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소곤소곤하는 거야?”
첼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늘 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비법 같은 거 없냐고.”
“흐응?”
칼의 태연한 대답에 첼시가 살짝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얼른얼른 식사를 끝내! 언제까지 꾸물거릴 거야!”
리에니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저 사람에게 걸리기 진짜 싫다.”
칼은 그런 리에니아를 보며 몸서리쳤다.
그런 칼을 보며 레오가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칼 담당이 리에니아 였지?’
친구에게 미래를 알려줄까 하던 레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수련회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
“으랴아아아아!”
아르가 눈을 부릅뜨고 엄청난 속도로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쟤 갑자기 왜 저래?”
셀리아가 엄청난 기세로 절벽을 기어오르는 아르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정상에 닫지 못하고 힘이 빠졌는지 주르르륵- 미끄러졌다.
“아르양, 괜찮나요?”
바닥에 축 늘어진 아르를 보며 에이란이 조심스럽게 묻자 아르가 벌떡 일어났다.
“이 빌어먹을 절벽을 올라서 난 빨리 다음 단계로 갈 거야!”
아르는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또다시 절벽을 기어올랐다.
“아조니아의 대표보다 먼저 올라가 주지.”
“넌 또 쓸데없이 승부욕을 불태우네.”
듀란이 코웃음을 치자 셀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흥. 기다려라, 셀리아 제르딩거. 정상에서 너를 내려다봐 주지.”
“뭐야?”
셀리아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듀란과 으르렁거리더니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여, 여러분. 쉬엄쉬엄하세요.”
에이란이 울상을 지으며 세 사람에게 말했지만 세 사람은 듣지 않았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요즘 아이들은 대단하네.”
까마득한 저편에서 눈가에 손을 가리고 절벽을 바라보던 아르온이 중얼거렸다.
“마법도 쓰지 않고 육안으로 저 아이들이 보이시나요?”
“응.”
멜리나가 놀란 얼굴로 묻자 아르온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대영웅의 신체 능력에 멜리나가 감탄하는 사이.
레오가 말했다.
“어떤 것 같아?”
“다들 나이에 맞지 않는 강한 힘을 지녔어. 특히 저 아르라는 아이. 전에 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네? 그때 이후로 1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르온은 감탄하며 셀리아와 듀란을 바라보았다.
“저 인간 소년과 소녀도 놀라운데. 저 아이들이 사용하는 호흡. 내 호흡과 조금 닮은 것 같은데.”
“네 호흡을 토대로 후대의 사람들이 만든 거야.”
“아하. 과연, 저런 식으로 응용할 수 있구나. 나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르온은 감탄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호흡 방식을 응용하면 초감각도 다른 아이들이 익히는 게 가능할까?”
초감각.
아르온이 사용하는 감각 기술.
레오 역시 흉내 내는 것 정도만 가능한 아르온을 대표하는 기술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수인족에게 큰 힘이 될 거예요.”
멜리나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도움이 된다니 기쁘네?”
아르온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저 엘프 소녀는 베르키아랑 닮았네. 분위기는 딴판이지만.”
코를 킁킁거린 아르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냄새도 닮았어.”
“아, 저 아이라면 베르키아님의 후손이에요.”
“뭐?”
아르온이 진심으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구나. 그 애도 후손을 남겼구나.”
제자의 후손이라는 말에 아르온이 기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뭐랄까, 기쁜데.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게 확연하게 느껴져.”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 아르온이 말했다.
입맛을 다시는 아르온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저 중에서 아르라는 녀석은 잘 봐둬.”
“쟨 조금 무서운데…… 이유라도 있어?”
목을 살짝 움츠리며 묻는 아르온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하울링으로 다른 수인을 수화시키는 힘을 가진 아이야.”
“뭐?”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능력을 가졌다는 말에 아르온은 눈을 크게 뜨고 아르를 보았다.
“그거 기대되는데?”
눈을 빛낸 아르온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