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
“조금만 더!”
절벽의 끝자락에서 아르가 소리쳤다.
탁-!
가까스로 절벽 끝자락에 손을 올린 아르가 낑낑거리며 위로 기어 올라왔다.
오러가 봉인 당하고 몸에 엄청난 무게까지 더해진 상황.
그렇기에 까마득한 절벽을 오르는 데 모든 힘을 쥐어짜 내야 했다.
“하악- 하악-”
절벽 위로 올라와 대자로 누운 아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헐떡였다.
“수고했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레오가 바위에 걸터앉은 채 아르를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클리어했네?”
“후후. 나를 얕보지마, 검은 토…… 우웁?”
지나친 체력 소모로 인해 구토감이 몰려왔는지 아르가 입을 막았다.
가까스로 참사를 피한 아르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지금 막 루니아와 드리아나도 클리어한 모양이야.”
“훗, 내가 1등이라는 거네?”
아르가 우쭐했다.
“뭐, 너는 개인전이라면 루니아와 드리아나는 일종의 팀플레이였으니까.”
“웃?!”
레오의 말에 아르의 눈에 경쟁심이 피어올랐다.
아르의 목표는 용자의 뒤를 따라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루니아와 드리아나는 같은 목표를 가진 경쟁 상대였다.
물론 각자가 따르는 길과 종착지는 다르다.
하지만 아르온의 동료였던 루나와 드웨노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하는 루니아와 드리아나에게 강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르가 절벽 아래를 바라보려 할 때였다.
탁-!
양손이 동시에 절벽 끝을 쥐었다.
셀리아와 듀란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절벽 위로 올라왔다.
그 뒤를 따라 에이란 역시 함께 올라왔다.
세 사람 모두 숨을 헐떡였다.
“모두 수고했어.”
그런 그들을 보며 레오가 웃으며 말하자 듀란이 코웃음을 치며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위에서 기다리는 사람치고는 친절하시군, 그래.”
‘정말 보고 있으면 승부욕과 근성의 화신이라니까.’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올려다보며 레오가 말했다.
“어쩔래? 교관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쉬었다 갈래?”
“그럼 조금 쉬었다가……!”
에이란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는 찰나.
“당연한 걸 왜 물어! 지금 당장 가야지!”
팔짱을 낀 아르가 콧김을 흥! 내뱉었다.
셀리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땀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출발해, 레오.”
“뭘 더 묻는 거냐. 레오 플로브.”
듀란 역시 기다릴 것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조 원들의 반응에 에이란이 귀를 축 늘어트렸다.
“지금 출발해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오가 품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그와 함께 워프 포탈이 생성되었다.
레오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이들도 뒤를 따랐다.
“앗! 레오 오빠다!”
포탈 너머에는 먼저 도착해 있던 첼시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륙 동부 전통 복장의 너른 소매 안에 양손을 넣고 있던 첸 시아도 레오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뒤따라온 두 사람을 보고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첼시는 셀리아와 듀란을 보고는 혀를 빼물었고 첸 시아는 반가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 뒤를 이어 아르와 에이란도 도착했다.
첼시는 에이란을 발견하고는 그녀 곁에 딱 붙어 재잘재잘, 즐겁게 떠들었다.
아르는 팔짱을 꼈다.
“우리 학교에서는 디온이랑 바보 호랑이. 세이룬에서는 에이란. 루메른에서는 셀리아 제르딩거, 듀란 모이라, 첸 시아, 첼시 르왈린, 검은 토끼.”
인원을 체크한 아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 교관은 대체 누구야?”
“훗. 루메른의 자무아 교관이 아닐까 싶군.”
호랑이 수인, 보르만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단련 된 육체!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넌 인간의 육체는 나약해 보여서 싫다면서?”
“리 자무아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에게는 분명 배울 것이 있을 터! 그렇지 않나? 루메른의 학생들!”
“자무아 선배라. 그분이 교관이면 달갑지 않겠네요.”
“체력 단련만 엄청나게 할 것 같아서 싫은데. 우린 조금 전까지 절벽을 기어올랐다고.”
첸 시아와 셀리아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누가 오든 상관없다.”
팔짱을 낀 듀란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애초에 기사학과가 드글드글한 이곳에 난 대체 왜 온 거야?”
첼시는 살짝 불만을 드러냈다.
순수 마법사는 첼시뿐이었다.
그때였다.
바스락-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아르의 귀가 쫑긋하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이 풀 밟는 소리! 이 냄새!”
아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분이 틀림없어! 아르……!”
“아르님이 존경하는 아칸님이요?”
에이란이 다급하게 정정해줬다.
“아칸님!”
아르가 다급하게 풀숲으로 돌격했다.
“끄아아아아악?!”
잠시 후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르온의 발에 매달린 아르가 살짝 맛이 간 눈으로 숨을 거칠게 내뱉고 있었다.
“후욱! 후욱! 존경해요! 후욱! 멋있어요!”
“저, 저리 가아아아아!”
눈이 돌아간 아르를 보며 아르온이 기겁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레오는 그런 아르를 떼어놓기 위해 꼬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르는 더더욱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 아르온의 발에 매달릴 뿐이었다.
“어, 어쩌죠.”
아르를 떼어 놓기 위해 잡아당기던 에이란이 당황한 얼굴로 묻자 레오가 한숨을 쉬었다.
“제압해.”
“제, 제압이요? 어, 어떻게? 힘을 주면 아르양이 다칠 텐데……!”
“안 다칠 정도로 깔끔하게.”
“안 다칠 정도로 깔끔하게?”
고민하던 에이란이 양손으로 아르의 머리와 턱을 잡았다.
우둑-!
“커헉?”
그리고 그대로 꺾어 버렸다.
목이 꺾인 아르가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레오는 그대로 꼬리를 디온에게 넘겼고 디온은 축 늘어진 아르를 질질 끌고 가 옆으로 치워 버렸다.
레오 뒤에 숨어서 얼굴만 빼꼼 내민 첼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에이란에게 말했다.
“에이란 언니 무섭다.”
“굉장히 살벌하네.”
“흥,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과연 세이룬의 2인자라는 건가. 손속에는 가차 없군.”
듀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 아니 전. 그러니까 소설에 서 본 대로…….”
“와! 굉장하네요. 혹시 암살 기술 같은 걸 익히셨나요?”
첸 시아는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저, 전 그런 무서운 걸 익힌 적 없어요!”
작정하고 자신을 놀려대는 루메른 학생들을 보며 에이란이 울상을 지으며 항변하는 사이.
레오는 아르온을 일으켜 세워 학생들 앞으로 다가왔다.
아르 역시 정신을 차렸다.
아르온을 보며 움찔움찔 몸을 떨긴 했지만 달려들고 싶은 욕구를 참아냈다.
교관이 앞에 서자 학생들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조금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어도 눈앞의 교관은 드래곤 로드가 직접 특별 초빙했다고 말한 교관이다.
‘아칸이라,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걸?’
‘아르 녀석은 왜 괴상한 짓을 한 거야?’
‘뭐랄까, 카리스마가 없어 보이는 분이네.’
‘아르온님께서 왜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신 거지? 설마하니 루나님과 세이룬님처럼 기적을……!’
‘아르온님! 아르온님! 아르온님! 아르온님!’
각자 의아한 눈으로 아르온을 주목할 때였다.
긴장된 표정을 짓던 아칸이 헛기침을 했다.
“으흠.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아칸. 짧지만 너희의 교관을 맡게 되었어.”
“아칸 교관님.”
그때 보르만이 손을 들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살벌한 인상의 호랑이 수인이 자신을 부르자 아르온은 살짝 긴장했다.
“왜 부르지?”
“아조니아 졸업생 출신이십니까?”
“아니.”
아르온이 고개를 졌자 보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온에게 졸업생 출신이냐고 묻는 상황이 일어날 줄 아조니아님께서는 상상이나 하셨을까?’
아르는 학교의 설립자이자 용자의 후계자라 칭송받는 대전사 아조니아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음으로는 첼시가 손을 들었다.
아르온은 학생 중 가장 작고 어린 첼시가 손을 들자 조금 안도했다.
“응.”
“교관님, 전 순수 마법사인데 왜 오러를 다루는 학생들과 같이 이곳에 왔나요?”
“넌 마법사지만 최전방에서 활약하는 근접형 마법사라고 들었어.”
“네.”
“레오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아주 날래다면서?”
“헤헤헤.”
첼시가 긁적긁적, 뒷머리를 긁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내가 가르쳐줄 능력은 분명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오러 스킬인데도요?”
“그렇긴 한데 마나로도 응용이 가능해.”
아르온은 후대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호흡을 보고 초감각을 오러가 아닌 마나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바꿨다.
‘물론 아르온 본인이 사용하는 초감각만큼은 아니지만.’
극한으로 단련된 감각 너머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전투의 양상이 달라진다.
‘확실히 저 재능은 천부적이야.’
오러학의 발전으로 재앙의 시대에 존재하지 않던 응용 개념은 무수히 늘어났다.
용자의 숨결은 그 오러학과 아르온의 호흡이 어우러져 탄생한 기술의 결정체다.
아무리 자신에게서 파생된 기술이라고 해도 그걸 단번에 이해하는 건 레오로서도 불가능한 개념.
그런데 아르온은 현대 오러학의 개념들을 단번에 이해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또 다른 기술인 초감각에 응용해 또 다른 새로운 기술을 파생시켰다.
“그 기술이란 게 뭡니까?”
보르만이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초감각이라는 기술이야.”
“초감각?”
아르온의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감각을 극한 이상으로 날카롭게 다듬는 기술이지.”
“그냥 오러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거랑 뭐가 다른 건가요?”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는 개념은 이미 있는 것이다.
오러를 익힐 때부터 모두가 익히는 기초적인 기술.
그런 그들의 반응에 아르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러니까 그것보다 더 날카롭게 감각을 다듬는 건데. 말로 설명하기 어렵네. 음…… 좋아. 그러면 되겠네.”
아르온이 레오를 보았다.
“레오. 마법으로 내 시각과 후각, 청각을 차단해 줄 수 있어?”
그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레오는 마법으로 아르온의 촉각을 제외하고 전투에 필요한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간 아르온이 말했다.
“너희, 다 같이 나를 한번 공격해볼래?”
“예?”
그 말에 아르온의 정체를 아는 세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숙련된 기사나 전사라도 저런 식으로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공격받는 건 위험하다.
“걱정하지 말고 공격해.”
아르온의 말에 보르만이 말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공격해보라니까?”
“아, 귀도 안 들리시지.”
머리를 긁적이던 보르만이 이내 자세를 낮추었다.
콰악-!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아르온에게 돌격했다.
휙-!
“……!”
아르온은 가볍게 뛰어 보르만의 공격을 피했다.
“흠. 그럼 이건 어떨까?”
보르만이 빠르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르온은 그런 보르만의 주먹을 모두 피해냈다.
후웅-!
살벌한 바람 소리와 함께 보르만이 팔을 휘둘렀다.
탁-!
아르온은 그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때 디온이 가세했다.
후웅-!
디온의 날카로운 발차기가 아슬아슬하게 아르온을 스치고 지나갔다.
텁-!
“큭?”
디온의 발끝을 잡은 아르온이 그대로 잡아당겼다.
쿵-!
중심을 잃은 디온이 그대로 무너졌다.
아르온은 다른 학생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가만히 있을 거야?”
“정말로 시각이랑 청각, 후각까지 차단된 사람 맞아?”
첼시가 살짝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아르가 자세를 굽혔다.
콱-!
그와 함께 탄환이라도 된 듯 엄청난 속도로 아르온에게 날아들었다.
화악-!
텁-!
쿠구구구궁-! 쩌저저저저저적-!
아르의 발차기가 아르온의 손바닥에 막혔다.
아르온이 서 있던 주변 땅바닥에 금이 갔다.
하지만 아르온이 서 있는 땅은 굳건했다.
아르의 눈이 빛났다.
‘역시 아르온님!’
충격을 완벽하게 흘려보냈다.
아르온은 아르의 발목을 잡고 위로 휙 던졌다.
에이란 역시 검을 뽑고 망설이지 않고 날카로운 검격을 아르온에게 날렸다.
“첼시, 공격해.”
셀리아의 말에 첼시도 마법을 이용해 아르온과 거리를 좁혔다.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영웅 후보생들의 공격을 어려움 없이 막아냈다.
‘단순히 시야, 냄새, 소리. 이 세 가지가 없어진 걸 떠나서 이 사람의 움직임 자체가 소름이 돋아!’
셀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아르온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다.
무의 길을 걷는 자라면 추구해야 할 길.
살면서 셀리아를 이 정도로 소름 돋게 할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 이는 자신의 사촌, 레오 한 명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레오 이상이야!’
레오와는 다르다.
레오에게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면.
눈앞의 아칸이라는 교관은 끝을 알 수 없는 높이가 느껴졌다.
셀리아가 놀란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는 가운데.
화악-!
아르온은 셀리아의 검을 검지와 중지에 끼우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털썩-!
“허억! 허억!”
“이 사람! 완전 괴물이야!”
첼시가 숨을 헐떡이며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아르, 에이란, 셀리아, 듀란, 첸 시아, 디온, 보르만, 첼시.
여덟 명이 협공해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러와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아르온은 그 공격을 모두 예측하고 막거나 흘려보냈다.
“어떻게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우리의 움직임을 읽는 게 가능한 거지?”
“이게 초감각이란 건가?”
디온과 보르만이 숨을 고를 때였다.
터벅- 터벅-
“조금 곤란한데.”
아르온이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넌 적당히 할 수가 없잖아.”
아르온의 말에 레오가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지금의 내가 너에게 얼마나 다가갔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스릉-!
레오가 검을 뽑았다.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