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아무래도 아르온님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네요.”
멜리나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녀석도 어느 정도 감안했겠지.”
“어떻게 할까요?”
“저 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릴 거라고는 생각 되지 않아.”
세 사람 모두 전직 학생회장 출신.
아르온이 지금 시대에 모습을 드러낸 사실이 알려지면 일어날 파장에 대해서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따로 이야기는 해두겠습니다.”
“그래.”
멜리나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는 졸업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아르온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너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구나.’
“그리고 레오님.”
“왜.”
“전에 말씀해주신 건에 관해서 말인데요.”
“응.”
“다음 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 물음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수련회 3주째 되는 날.
첨벙-
“살 것 같아~”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제는 야영지에 살림을 차린 2학년들은 의식주를 모조리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 목욕탕까지 만들 줄 누가 알았어?”
“전 좋은데요? 셀리아 양도 기뻐했잖아요.”
셀리아의 중얼거림에 첸 시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기는 하지.”
아무리 영웅 후보생이라고는 해도 이제 사춘기의 학생들이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외모에 신경을 쓰는 학생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야생에 던져진 상황에서도 깔끔함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욕구는 커져만 갔다.
결국 그 때문에 목욕탕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하루의 피로를 날리고 있을 때였다.
“1학년 고것들! 응? 선배들은 이 개고생을 하는데! 엉? 자기들은 두 발 쭉 펴고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어?”
그때 일리아나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욕탕에 들어온 일리아나가 넬라를 붙잡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1학년들도 우리처럼 고생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엾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 배신감 어쩔 거야!”
“넌 그런 이유로 후배들에게 성질내고 싶니?”
넬라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야생에 던져진 상태에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2학년들과 달리 1학년들은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수련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나도 캠프파이어 하고 싶단 말이야! 만날 맛있는 거 먹고! 밤마다 놀기 바쁘고! 나도 그런 수련회를 꿈꿨단 말이야! 나도 캠프파이어 앞에 앉아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효녀가 되고 싶다고!”
양팔을 휘두르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일리아나를 루메른 여학생들이 외면했다.
그렇게 온천으로 들어온 일리아나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런 노천탕인데 훔쳐볼 생각을 하는 응큼한 애들이 없네.”
“그런 바보짓을 할 사람이 있겠어?”
당연한 말이지만 오러와 마법과 소환술의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 모여있는 만큼 여학생들의 눈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자살행위인 것이다.
그 말에 일리아나가 말했다.
“왜? 반장은 그만한 능력이 있잖아?”
“레오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반장도 남자인데.”
넬라의 말에 일리아나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동의하는 학생은 없었다.
“바보 같은 생각도 정도껏 해.”
첼시가 핀잔을 주었다.
그에 입술을 삐죽 내밀던 일리아나가 히죽히죽 웃었다.
“뭐야, 그 나쁜 웃음은?”
첼시가 눈을 게슴츠레 뜨자 일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넌 확실히 어리다 싶어서. 그에 비교한다면.”
일리아나가 첸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아는 확실히 언니야, 언니. 음음! 커헉! 꾸르르륵-!”
괜히 놀리다가 첼시에게 걷어차인 일리아나가 허우적거렸다.
잠시 소란이 있은 후.
“아! 그나저나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내일은 훈련 없대!”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일리아나의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은 자유 시간이래! 델라드 왕국의 수도 델란에 놀러 가도 된다나 봐! 내일모레 복귀하면 된다던데?”
“뭐?!”
“진짜!”
“거짓말 아니지?”
여학생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일리아나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러엄~ 칼에게 들은 정보니까 확실해!”
“이 지옥에서 해방이다!”
“하루뿐이긴 하지만! 편하게 쉴 수 있어!”
“만세!”
***
다음 날 아침.
아침 점호 시간에 멜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3주 동안 열심히 훈련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가혹한 일정을 모두 잘 버텨주었어요. 그래서 1박 2일 동안 여러분께 외출을…….”
“우와아아아아아! 자유다”
“소리 지른 것들. 지금 당장 뒤로 나와라.”
리에니아의 싸늘한 목소리에 소리를 질렀던 학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몇몇 학생들이 기합을 받는 와중에 멜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마무리했다.
“모두 즐거운 외출이 되길 바라요.”
***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르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르온이 지금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델란의 거리였다.
“이곳이 지금 시대의 도시구나.”
아르온이 감탄했다.
비록 변방의 약소국이지만 한 나라의 수도인 만큼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찼다.
마차와 사람이 오가는 걸 구경하며 아르온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며 첼시가 중얼거렸다.
“아르온님을 보고 있으면 조금 불안하지 않아?”
“뭐가?”
“잘 챙겨드려야 할 것 같아. 뭐랄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느낌?”
“제일 애 같은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진짜 웃긴 거 아냐?”
킬킬거리는 칼.
그에 첼시는 망설이지 않고 칼의 옆구리에 드롭킥을 작렬시켰다.
무참하게 무너진 칼이 한참을 옆구리를 잡고 신음성을 흘리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레오랑 첼시. 너희는 로드님께서 아르온님의 안내를 맡겼지?”
“응!”
첼시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활짝 폈다.
영웅 후보생 입장에서 어릴 적 동화 속에서나 만나던 대영웅의 안내를 직접 맡는다는 건 무한에 가까운 영광이었다.
“아르 녀석은 거의 오열하면서 루니아한테 끌려가던데.”
아르는 아르온의 안내 역을 자처했지만, 기각당했다.
은연중 아르를 두려워하는 아르온이 편하게 현재를 즐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멜리나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저녁에는 같은 숙소에서 머물기로 했으니까.”
첼시와 칼이 아르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칼은 넌 뭐 할 거야?”
“훗. 난 안에서 몰래 숨겨 들어갈 물품들을 구하려고. 비싸게 팔릴걸?”
“걸리면 끔찍한 꼴을 당할 텐데?”
“안 걸리면 돼. 안 걸리면.”
칼이 킬킬 웃었다.
그런 칼을 보며 첼시가 고개를 저었다.
“레오 오빠 앞에서 잘도 말하네.”
학생회장인 레오는 교칙을 교묘하게 어기는 칼을 몇 번이고 학생회에게 신고한 적이 있었다.
“심각한 게 아니면 가벼운 금지 품목은 봐준다고 했거든? 음화화화화!”
칼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디 잘해 봐.”
“그래.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라! 아르온님! 저녁때 뵙겠습니다!”
칼이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런 칼에게 손을 흔들어준 아르온이 첼시에게 다가가 말했다.
“첼시. 저거 사줄게. 같이 먹자.”
아르온은 노점상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네! 아르온님!”
점심시간.
레오의 추천에 따라 셋은 델란의 숨겨진 맛집에 도착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델란에서 살았던 레오가 추천한 만큼 맛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후아.”
식당 주변의 벤치에 앉은 첼시가 쨍한 여름의 햇볕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행복해. 이게 사는 거지.”
삼 주 동안이나 산에 틀어박혀서 굴러다닌 탓에 첼시는 지금 상황이 굉장히 즐거웠다.
헤실헤실 웃던 첼시의 앞에 아르온이 다가왔다.
“첼시. 햇볕이 강해. 살이 타겠어. 여기 모자 사 왔어.”
“감사합니다!”
“음료수도 사 왔어. 후식으로 마시자.”
“네!”
아르온에게 받은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얼음이 띄워진 음료수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짓던 첼시가 ‘헉!’ 하더니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이건 뭔가 잘못됐어요!”
첼시의 다급한 외침에 빨대에 입을 가져가던 아르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레오 오빠는 아르온님이 관광하는 걸 도와주고 있잖아! 그런데 난 뭐야? 아르온님이 챙겨주시기만 하고! 나도 아르온님을 안내해드려야 하는데!”
도시에 온 이후부터 레오는 아르온에게 가이드 역을 맡았다.
애초에 이 자유 시간을 만들어 준 것도 아르온에게 지금 시대를 누리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성장을 도울 거라며 아르온이 극구 사양했지만, 레오가 아르온을 위해 억지로 하루의 시간을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온은 마치 동생을 챙기듯 살뜰하게 첼시를 챙겨주고 있었다.
세계를 구한 대영웅의 안내 역을 맡았다며 의욕이 충만했던 첼시로서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게 좋은데.”
“네?”
“아르나 루니아, 에이란, 드리아나, 칼은 베르키아 같아.”
아르온에게 있어 베르키아는 동생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제자였다.
함께 전장에 설 제자.
몇 번이고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줬던 소중한 동생.
“하지만 첼시. 너는 내 어릴 적 동생들이 떠올라.”
“어릴 적 동생들이요?”
“응.”
아르온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한심함 탓에 지키지 못했던 동생들.”
고아원의 동생들.
죽기에는 지나치게 어렸던 동생들.
“그때 내가 바보 같이 굴지 않았다면…… 다들 어른이 되어서 이런 푸른 하늘을 봤을지도 모르지.”
아르온은 푸른 하늘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챙겨주고 싶어. 혹시 불편해?”
“아뇨. 뭐랄까. 이렇게 챙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할까. 오라버니도 레오 오빠도 귀엽게는 봐줘도 이렇게 살뜰하게는 챙겨주지 않으니 낯설다고 할까. 기쁘다고 해야 할까.”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첼시를 보며 아르온이 웃었다.
“그러면 나와 어울려줘.”
“네! 그런데 저만 이렇게 챙겨주시면 레오 오빠가 조금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첼시가 레오를 보며 말하자 아르온이 피식 웃었다.
“레오라면 괜찮아. 그렇지?”
“난 신경 쓰지 마.”
“봤지?”
레오의 대답에 첼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슬슬 이동해볼까?”
“그러면 나 다음은 도서관에 가보고 싶은데.”
아르온의 대답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 오빠는 대단해.’
그 모습을 보며 첼시가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아르온과 편하게 말을 하는 레오를 보며 놀랐다.
‘칼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영웅의 세계에서 만나는 대영웅들과 대등하게 이야기했다고 했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당당한 레오인만큼 놀라우면서도 레오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르온님도 그런 레오님을 더 편하게 대하는 것 같고. 레오 오빠의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
앞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첼시가 빙긋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레오와 이야기를 나누는 아르온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레오와 아르온은 마치 친구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첼시에게 묘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첼시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르온의 모습은 동생으로서 레오에게 의지하는 자신과 닮아 있었다.
‘어라?’
첼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의문을 내뱉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