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
쿠웅-!
에레보스가 발을 내디뎠다.
쿠가가가가가가가강-!
단 한걸음에 지축이 거세게 흔들렸다.
화르륵-!
에레보스의 주변에 검은 불꽃이 거세게 일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토루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존재 자체만으로 이 정도라니.”
에레보스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한걸음.
발걸음을 옮겼을 뿐.
하지만 그런데도 마치 거대한 재앙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하늘은 더더욱 불길한 검붉은 빛을 내뿜었다.
리에니아를 앞에 태운 울타가 중얼거렸다.
“과연. 아르온님께서 다른 전위를 데려오지 않은 건 이런 이유에서였군.”
아르온을 제외한 파티원 대부분이 장거리 공격에 능한 자들이다.
루니아와 에이란, 엘리자의 경우에는 셋이 한 조였다.
루니아가 피닉스 킹의 백염으로 공격에만 집중한다.
에이란은 가문의 고유 마법인 아니무스의 검과 갑옷으로 루니아의 방패가 되어주고 엘리자의 경우에는 루니아를 태우고 에레보스의 공격을 피하는 역할.
아직은 미숙한 루니아가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맞춘 조합이다.
“처음에는 아르온님 단신으로 막는다기에 역시 용자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리에니아가 식은땀을 흘렸다.
“다른 기사 클래스가 전위를 맡았다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을 거야.”
리스나 자무아, 바니르 같은 전위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아직 이곳에 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 역시 이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
그저 전장 바깥에서 아르온을 서포트 하는 것만 간신히 할 뿐이다.
‘뭐, 학생 중에 이미 저 무대에 선 녀석도 있지만.’
리에니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레보스를 내려다보고 있는 레오의 모습이 보였다.
심호흡한 리에니아가 활을 들어 올렸다.
“부탁해, 울타.”
“맡겨 둬라.”
이곳에 있는 영웅 후보생 중 순수한 화력으로만 본다면 가장 강력한 건 리에니아다.
전직 세이룬의 학생회장 출신.
마법과 오러를 다루는 마궁수이지만, 그녀가 있을 때만 해도 단순히 강하다는 것만으로 세이룬의 학생회장이 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작년까지 당대 최강의 별의 마법사만이 세이룬의 학생회장이 될 수 있었다.
리에니아의 뒤를 이어 토루아가 루니아를 엘리자에게 날려 보냈다.
“부탁해, 성격 나쁜 소환학과 후배.”
“여유로우시네요. 지금 상황에서.”
“응. 우린 어디까지나 무대 바깥에서 아르온님을 지원해 주는 역할이잖아. 게다가.”
토루아가 거대한 검은 재앙 앞에 선 아르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는 용자가 있으니까.”
***
“다시 한번…… 세상이 불타는 모습을 볼 각오가 되었냐고?”
아르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아르온을 보며 에레보스의 눈이 꿈틀거렸다.
아르온의 눈에서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오.
에레보스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음을 직감했던 그 순간까지도 죽을 각오를 하지 못했던 놈이 되레 이제 와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아르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에레보스에게 겨누었다.
-죽음을 경험했기에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냐. 아니면…….
스윽-!
에레보스의 검은 팔이 들어 올려졌다.
-하찮은 과거의 망령이라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은 것이냐!
콰가가가가가가강-!
있는 힘껏 휘둘러진 에레보스의 팔에 검은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검은 화염이 아르온을 정통으로 휩쓸었다.
“아르온님!”
멜리나가 다급히 소리치자 레오가 대답했다.
“괜찮아.”
“네?”
“저 정도에 당하지는 않아.”
그 말과 동시에 검은 화염을 뚫고 황금색 섬광이 치솟았다.
아르온이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우웅-!
“후우-”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초감각이 개방되었다.
눈을 뜨자 에레보스의 주변에 화염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에레보스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자신을 향한 명백한 비웃음.
하지만 아르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평온해.’
아르온은 패배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아르온이 잘 알았다.
초감각을 통해 카일과 루나의 죽음을 알았던 순간.
아르온은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대신해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
친구들이 죽는 것이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카일이 구하러 와줬던 그 순간 나는 포기했어.’
마지막 순간 아르온은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절망했다.
‘드웨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던 친구를 떠올렸다.
‘루나는 끝까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었을 거야.’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졌던 친구.
‘리시나스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겠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큰 희망을 가졌던 친구.
‘끝까지 카일이 포기하지 않으리라 믿었을 테니까. 나랑은 다르게.’
아르온이 검을 세워 들었다.
칼날에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수없이 겁에 질렸고 이제는 정말 꺾여 버린 겁쟁이가 있다.
‘하지만 친구들 덕분에 구원받은 세상을 볼 수 있었어. 그러니 더 이상 미련은 없어. 그러니…….’
“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멸시키겠어!”
번쩍!
아르온의 일갈과 동시에 황금색 검기가 에레보스의 목을 후렸다.
하지만 베이지는 않았다.
콰가가가가강!
에레보스의 거대한 몸이 쓰러지며 바닥에 처박혔다.
“과거의 잔재는! 과거의 망령이 처리해주마!”
아르온이 검을 하늘 위로 겨누었다.
스각-!
찬란한 황금빛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마치 태양 같은 작은 황금의 구체가 하늘에서 폭발하는 순간.
번쩍-! 콰가가가가가가강-!
하늘에서 비처럼 검기의 폭우가 쏟아져 에레보스를 덮쳤다.
***
“세상에.”
“저게…… 대영웅의 싸움……!”
성벽 위에 선 영웅 후보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대영웅의 싸움은 말 그대로 상식을 초월했다.
일평생 대영웅의 영웅담을 듣고 그들을 존경하고 동경해오며 그들의 힘과 위업을 찬양해온 이들에게조차 충격을 선사할 정도로.
“저 정도가 되니까 세상을 구한 건가.”
듀란은 경외감이 깃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가드스론의 공방전 때도 정말 엄청나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인걸?”
그 옆에서 칼이 혀를 내둘렀다.
일전에 아르온의 힘을 한 번 목격한 칼에게도 충격적일 정도였다.
“저게 최종장의 아르온님인가?”
문헌에서 묘사된 모습과 같았다.
말 그대로 ‘무신’ 그 자체였다.
“레오는 저런 싸움의 최전방에 서 있는 건가?”
아바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르온의 공격을 시작으로.
토루아와 울타, 리에니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토루아의 마법이 에레보스가 뿜어내는 화염을 뚫고 몸에 적중했다.
울타는 페가수스를 타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며 에레보스의 화염을 저지했다.
화르르륵-!
그 순간.
거대한 순백의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걸 본 순간 드리아나가 중얼거렸다.
“루니아군.”
그녀가 중얼거리는 순간.
화악-!
염제가 에레보스를 덮쳤다.
세이룬 학생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루니아 선배님이셔!”
“세이룬의 차기 학생회장!”
“문헌에 의하면 피닉스 킹의 불꽃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했지?”
세이룬 1학년들이 눈을 빛냈다.
쿠과가강!
하지만 곧 백색의 화염을 뚫고 나온 에레보스를 보며 흠칫했다.
토루아와 루니아의 마법에 정통으로 직격당했음에도 에레보스는 주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 마법을 맞았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다니…….”
“저런 전투에 참여하는 게…… 가능할까?”
1학년들은 물론이고 2학년들 사이에서도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보며 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은 상상을 초월하는 걸 보면 겁에 질리곤 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1학기 중간고사.
레오의 존재는 말 그대로 전율 그 자체였다.
레오를 보고 겁에 질리고 절망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고개 숙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
마치 등을 보여주며 나아가는 레오의 모습은 마치 따라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같은 전장에 서는 날을 기다리겠다고.
레오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다른 애들도 그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셀리아가 동급생들과 후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쿵- 쿵- 쿵-!
아르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왜 그래?”
칼의 물음에 아르가 소리쳤다.
“분해!”
“뭐?”
“검은 토끼와 성격 나쁜 귀쟁이! 그리고 에이란은 저 무대에 섰잖아!”
“뭐, 레오야 워낙 특출나고. 루니아와 에이란은 특수한 기술이 있으니까 무대에 선 거지. 딱히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건…….”
“그러니까 분하다고!”
아르의 몸에 변화가 일었다.
육체에 고양이의 특성이 더욱 살아났다.
수화였다.
마치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듯 털과 머리를 곤두세운 아르가 말했다.
“나는 아직 저 무대에 설 자격이 없는 거잖아! 위대한 용자가 있는데! 그와 함께 설 영광을 누릴 수 없는 거잖아!”
그 말에 모든 학생의 시선이 아르에게 향했다.
“화나! 이 분노를 저 못생긴 괴물들에게 풀어야겠어!”
냐아아아악!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아르가 성벽 위로 달려갔다.
그런 아르의 뒷모습을 보며 상식을 초월한 싸움에 기가 질려 있던 학생들이 이를 악물고 창피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은 겁에 질렸는데 누군가는 저 싸움을 보고 함께하지 못함에 분해한다.
그 극명한 차이에 창피함을 느꼈다.
“젠장!”
“내가 이렇게 약한 놈이었어? 아니잖아!”
악을 쓰듯 공포심을 이겨낸다.
그 모습을 보며 셀리아가 중얼거렸다.
“의도한 걸까?”
“저 바보가? 설마.”
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옆에 있던 드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의도한 건 아니지. 하지만 저게 아르의 능력이라고 생각되네.”
“아르의 능력?”
셀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자께서 후계자로 지목한 인물이지. 그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이에게 용기를 심어줘도 이상할 건 없지.”
드리아나가 껄껄 웃으며 아공간에서 거대한 배틀 엑스를 꺼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셀리아가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전장은 저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구워어어어어어-!
에레보스의 권능으로 태어난 마수들이 성벽을 덮쳤다.
***
“레오님, 지시를.”
멜리나의 말에 레오가 말했다.
“멜리나, 넌 리시나스의 후계자지?”
“네? 아, 네. 부족한 몸이지만 송구스럽게도 리시나스님의 세계를 공략해서…….”
“그럼 지휘는 네가 맡아.”
“네?”
멜리나가 당황했다.
“하, 하지만 레오님께서 있는데 제가 어찌 감히 지휘를…….”
“지휘는 원래 리시나스의 몫이야.”
“……!”
“언제까지 침묵할래?”
레오의 냉정한 말에 멜리나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개벽의 세계에 도전할 때.
지휘를 맡은 건 멜리나였다.
그리고 멜리나의 파티는 전멸했다.
그때 이후로.
멜리나는 침묵의 용이 되었다.
침묵을 깬 지금도 에레보스 앞에서 파티를 지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망설이고 있는 멜리나의 모습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멜리나.”
“……네.”
“저걸 봐.”
레오는 에레보스와 맞서 싸우고 있는 아르온을 가리켰다.
“레오님…….”
“겁에 질렸다면 저 뒷모습을 봐. 우리는 저 모습에 용기를 얻었어. 스스로를 믿기 힘들다면 날 믿어. 넌 이 파티를 훌륭하게 지휘해서 저 에레보스와 맞서 싸울 충분한 능력이 있어. 내가 보증할게.”
그 말에 멜리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네!”
그 말에 레오가 씩- 웃었다.
“레오님은 뭘 하실 건가요?”
“나?”
레오는 손을 뻗었다.
환한 빛과 함께 지팡이가 소환되었다.
“어울리진 않겠지만.”
레오는 지팡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루나 녀석 흉내를 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