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
초감각.
그것은 아르온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힘으로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르온에게 알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 덕에 초감각을 활성화했을 때의 아르온은 예지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힘과 관련하여 아르온에겐 친구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난 이 힘이 싫어.’
정확하게는 이 힘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특히나 재앙의 시대는 더더욱.
세계를 뒤덮은 재앙의 공포를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느껴왔다.
작은 것에도 잘 놀래고 겁에 질리게 된 것 역시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단 한 번도 초감각을 극한의 한계까지 사용한 적이 없었다.
스승을 만나 수련을 받고 어느 정도 초감각을 통제할 수 있게 된 후에야 아르온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온이 강해질수록 초감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전투에서 짧은 미래를 예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최후의 전투에 들어서기 직전.
아르온은 카일과 루나의 죽음을 봐야만 했다.
‘싫었어.’
미래를 보는 것이.
‘무서웠어.’
그 미래가 자신들의 실패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하지만 어떻게든 카일과 루나가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찾은 길이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친구들을 살리기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멋대로 형과 누나… 가족 같은 사람에게 어리광을 부렸을 뿐이야.’
아르온이 이를 악물었다.
‘그저 믿고 편한 길을 선택한 겁쟁이일 뿐이야.’
그리고 구원받은 미래를 보고 멋대로 안도했다.
레오가 아직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세계가 구원받았으니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겠다고 떠들었다.
‘내가 카일이 죽는 것이 괴로운 만큼. 카일도 내가 죽는 것이 괴로웠을 거야!’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치가 떨리도록 싫어졌다.
어떻게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초감각을 열어 미래를 보려 애썼다.
그 초감각이 지금 사라졌다.
정확하게는 무뎌졌다는 것이 옳은 말이었다.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
날카롭게 다듬어진 감각은 여전히 수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예지에 가까운 전투 감각은 상실되었다.
지나친 능력 사용으로 인한 과부하.
에레보스의 말을 듣고 지나치게 초감각을 사용한 결과였다.
그렇게 미래를 보려 발악했음에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가짜라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
아르온이 이를 악물었다.
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이곳에 있는 자신은 그저 히어로 레코드의 기록일 뿐.
화악-!
아르온이 검은 화염을 뚫고 나왔다.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에레보스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하압!”
콰가가가강-!
황금의 오러가 에레보스의 몸을 베었다.
-그런 무뎌빠진 검으로 날 벨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에레보스가 일갈하며 아르온을 손으로 후려갈겼다.
퍼억-!
“컥?!”
초감각이 제한된 상태에서 미처 에레보스의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다.
공격에 직격당하자 온몸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덮쳐왔다.
단순한 육탄 공격.
하지만 그 공격에는 육체와 정신을 으스러트리고 영혼을 파괴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휘이이잉! 콰앙-!
에레보스의 공격에 맞고 날아간 아르온이 바닥에 처박혔다.
레오가 다급히 아르온에게 달려갔다.
“아르온!”
콰아아아! 후두둑-!
아르온이 땅에 처박히며 하늘로 솟았던 흙먼지와 돌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윽-!
몸을 일으킨 아르온이 말했다.
“카일. 이노센트를 준비해줘.”
“너 괜찮냐?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아.”
아르온이 에레보스를 노려보았다.
“날 믿어 줘. 더 이상 짐 같은 건 되지 않을게!”
“뭐? 야! 아르온!”
“크허어어어엉!”
레오의 다급한 부름을 뒤로한 채 아르온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듯 하울링을 내질렀다.
눈을 치켜뜬 아르온이 검을 고쳐 쥐고 달려갔다.
“저 바보가!”
그 뒷모습을 보며 레오가 이를 갈았다.
“아르온님께서 왜 저런 말을 하시는 거죠?”
멜리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레보스의 말에 흔들린 거야. 아르온은 쉽게 주눅 들어 버리는 녀석이니까.”
동생처럼 여겼던 친구가 너무 여리고 착하다는 걸 레오는 잘 알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멜리나의 눈이 떨렸다.
그런 멜리나의 물음에 레오가 심호흡했다.
“괜찮아.”
레오가 아르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중 가장 많이 좌절했던 게 아르온이야. 그만큼 많은 시련을 이겨낸 녀석이기도 해.”
레오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르온은 저따위 말에 흔들려서 무너질 녀석이 아니야.”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며 레오가 말했다.
“멜리나, 넌 마수들을 상대하러 가.”
“네!”
***
끝없이 밀려오는 마수들을 보며 성을 지키던 영웅 후보생들의 안색이 굳었다.
“너무 많아!”
“작년에 상대한 마물 여왕의 군단보다도 많잖아!”
루메른과 세이룬 학생들 사이에서 불안감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화염의 오러를 일으킨 리스가 소리쳤다.
“숫자에 겁먹지 마! 지난번 마물 여왕의 군단과 비교해 숫자는 많을지 몰라도 한 마리, 한 마리의 힘은 약하다!”
리스의 외침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에레보스를 상대하던 파티원이 도착했다.
“도울게! 많은 적을 쓸어버리는 건 내 특기니까.”
빙긋 웃은 토루아가 말했다.
“마법학과 집합! 합동 마법을 준비해!”
그 말에 1, 2학년 마법학과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세이룬도 정열!”
리에니아가 세이룬 학생들을 지휘했다.
“기사학과는 아조니아와 데미안 학생들과 성벽 위로 올라오는 마수들을 저지한다!”
자무아가 진두지휘하며 앞으로 나서자 아르도 그 옆에서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르온님 앞에서 꼴불견인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아조니아 학생들도 앞으로!”
“너! 건방진 고양이! 지휘는 내 몫이거든?!”
“끄아아악!”
바니르가 아르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울타는 소환사들을 모아 놓고 기사학과와 마법사들 사이에 잘 분배했다.
그런 가운데 성벽 위에 올라온 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물 여왕의 군단만큼 강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데?”
지난번에는 마물 여왕의 군단도 강했지만 그만큼 아군의 전력도 막강했다.
인간과 엘프의 영웅들은 물론이고 루메른과 세이룬의 영웅 후보생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걸들까지.
그에 비해 지금 아군의 전력은 영웅 후보생들이 전부였다.
칼의 중얼거림에 첼시가 지팡이를 꼭 쥐었다.
“괜찮아.”
칼과 첼시는 합동 마법에는 어울리지 않기에 성벽에서 몬스터를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에게는 드래곤 로드님이 있잖아?”
그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마력이 꿈틀거렸다.
멜리나의 주변에 본래의 은빛 마력과 리시나스의 힘을 계승하며 얻게 된 검은색 마력이 동시에 일렁이고 있었다.
두근- 두근-
멜리나의 드래곤 하트가 빠르게 뛰며 마력을 분출했다.
그에 따라 그녀가 있는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져 갔다.
그걸 본 첼시가 꼴깍 침을 삼켰다.
“침묵의 용 멜리나… 오랜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잊고 있는 사실이지만… 저분은 개벽의 세계를 공략하셨던 분이야. 비록 결과는 실패했지만.”
파지지직-!
멜리나의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다 못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영웅의 시대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대한 드래곤 로드로 평가받는 분이야.”
첼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멜리나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사일런스.”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성벽을 향해 돌격하던 에레보스의 창조물들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자리에 선 마수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하나둘, 하얀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타르타로스의 군단급 병력이 단 한 번의 마법에 의해 조용히 소멸했다.
그걸 본 모두가 경이로운 눈으로 멜리나를 바라보았다.
멜리나가 성벽 위에 착지했다.
마침 칼과 첼시가 서 있는 곳이었다.
면사포가 바람에 흩날렸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멜리나가 강함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있는 한, 성벽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말에 영웅 후보생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치켜들며 환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드래곤 로드!”
멜리나의 압도적인 위용에 순식간에 사기가 치솟았다.
“와… 여신님 같아.”
“고마워요, 칼군.”
칼의 중얼거림을 들은 멜리나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일순간 면사포 아래로 멜리나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그걸 본 칼이 흠칫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겉으로 보이는 연령대도 명백히 달랐다.
하지만 분위기는 칼이 아는 누군가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칼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멜 선생님?”
옆에 있던 첼시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칼을 바라보았다.
그런 칼의 반응에 멜리나가 검지를 입가에 대고 작게 소리 냈다.
“쉿-!”
그 행동에 칼과 첼시가 자신도 모르게 멜리나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물 군단은 끝없이 소환되고 있었다.
그걸 본 멜리나와 영웅 후보생들이 힘을 내려는 순간.
휘이이이이이잉-! 콰아아아앙!
무언가 날아와 성벽에 처박혔다.
모두가 흠칫하며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았다.
후두둑-!
그곳에서 아르온이 몸을 일으켰다.
“젠장!”
아르온이 그답지 않은 격정을 드러냈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있었다.
아르온의 눈에 흉흉한 기세가 아른거렸다.
그 기백에 모두가 흠칫하며 물러섰다.
아르온은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아르온에 의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당한 에레보스가 있었다.
몸을 꿈틀거리던 에레보스가 곧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르온이 완전히 못쓰게 된 검을 버리고 무의식적으로 루나가 만들어준 아공간 팔찌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쥐었다.
그리고 이내 멈칫했다.
이를 악물고 손에 쥐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부러진 브레이브가 있었다.
“이런 검으로는 안 돼!”
챙그랑-!
아르온이 거칠게 브레이브를 내팽개쳤다.
온화하고 순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르온의 얼굴은 어딘지 사나워 보였고 또 조급해 보였다.
“아, 아르온님…”
아르가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아르온의 모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 기다려.”
고오오오-!
아르온의 몸에서 황금색 오러가 일렁였다.
“저건 내가 물리칠 테니까.”
사나운 기세가 담긴 목소리.
그 모습은 아르가 아조니아 입학 전까지 알고 있던 아르온의 모습이었다.
전장에서는 한 마리 맹수와 같은 모습.
절망적인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적과 맞서 싸우는 전사.
압도적인 무위를 가진 용자 아르온.
“자, 잠깐만요! 아르온님!”
아르가 다급히 아르온을 불렀지만 아르온은 땅을 박차고 그대로 몸을 회복한 에레보스를 향해 돌격했다.
검은 쥐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에레보스에게 날아간 아르온이 주먹을 내지르자 에레보스의 거대한 몸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굉장해…!”
보르만이 감탄했다.
“저게 용자님의 진정한 모습인가 보군요.”
르웬이 감탄하며 중얼거릴 때였다.
“아니야…”
아르가 이를 악물었다.
“뭐?”
“저건 아르온님의 진짜 모습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