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아르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 사이
“멜리나님. 이건 어떻게 할까요?”
첼시는 아르온이 내팽개친 검을 가지고 와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멜리나가 말했다
“브레이브군요. 아르온님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죠. 첼시도 알고 있죠?”
“네, 하지만 부러졌는데요?”
첼시가 불안한 얼굴로 말하자 멜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영웅의 세계에서 나오기 전부터 부러져 있었습니다.”
“부러진 검은 아르온님께 방해가 될까요?”
“맨손으로 맞서 싸우시는 것보다는 부러졌다고 해도 브레이브를 쥐고 싸우시는 게 나으시겠죠. 하지만… 지금의 아르온님은 여유가 없….”
콰아아앙-!
다시 한번 성벽 앞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레보스의 공격에 맞고 날아온 아르온이 성벽 앞 지상에 추락한 것이다
그 충격의 여파로 성벽을 향해 돌격하던 마물들이 휩쓸렸다
아르온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러의 힘은 건재했다
하지만 아르온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두려움을 억지로 떨쳐 내듯
투지를 불사르며 에레보스를 노려보았다
쾅-!
아르온의 바로 앞으로 에레보스가 착지했다
-무엇이 너를 그리 발악하게 만드는 것인가? 겁 많은 용자여. 네놈이 희망이라고 믿고 있는 저 하찮은 것들의 죽음이 두렵나?
“크허어어어어엉!”
아르온의 입에서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온몸에 오러를 휘감은 아르온이 또다시 에레보스를 향해 돌격했다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번뜩인 에레보스가 팔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다시 튕겨져 날아가는 아르온
하지만 굴하지 않고 땅을 뚫고 나와 손톱을 세우고 에레보스의 팔을 찢어발겼다
초감각을 통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지금
아르온은 무모해 보이는 전투를 속행해 나갔다
용자와 태초의 악이라는 전대미문의 전율스러운 육탄전
그 전투의 여파는 가공스러운 수준이었다
애초에 아르온이 아니었다면 태초의 악을 단신으로 저지하는 건 그 누구도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카일의 주문이 완성돼!’
자신의 역할은 그때까지 에레보스를 막아내고 힘을 갉아내는 것
아무리 꺼지지 않는 재앙의 불꽃이라도 끝없이 베어내면 힘은 약화 된다
불멸의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타격을 입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노센트가 놈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약화시켜야 해!’
온몸에 끔찍한 화상이 더해져 갔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에 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껏 아르온이 겪어왔던 그 어느 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버텨!’
아르온이 눈을 부릅떴다
‘카일은 이거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거야!’
“크아아아아아!”
아르온이 포효하며 에레보스의 목을 찢어발겼다
그러는 사이 에레보스에 의해 창조된 마수들이 성벽을 덮쳤다
아르온의 처절한 싸움을 지켜보던 첼시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아르온님께 도움이 될 수 없을까?’
자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던 아르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들이 밝게 웃는 미래를 원했다며 진심으로 기뻐하던 아르온이 지금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런 아르온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발을 동동 굴리던 첼시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브레이브를 보며 소리쳤다
“제가 브레이브를 아르온님께 전해드리고 올게요!”
멜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무 무모해요.”
“하지만 이 역할에 가장 적합한 게 저인걸요?”
첼시가 진지하게 말했다
“전 작고 빠르니까 충분히 마물들의 공격을 피해 다녀 올 수 있어요! 이런 일은 바람 마법사의 특기니까요!”
“그럼 나나 울타군 같은 이를…”
“멜리나님이나 울타 선배님은 마물들을 막아야죠!”
멜리나와 울타는 현재 성벽을 지키는 강력한 전력이다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곧바로 성이 무너질지 몰랐다
“… 드래곤 로드 실격이네요. 아직 어린 당신을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니.”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칠게요!”
“야, 첼시. 괜찮겠냐?”
칼이 걱정스럽게 묻자 첼시가 검지를 세우며 자신있게 소리쳤다.
“물론이지!”
그 말을 남긴 첼시가 브레이브를 등에 메고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열풍.’
첼시가 자신의 고유 마법을 사용했다
주변의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
그 마법은 첼시에게 압도적인 기동성과 회피력을 선사했다
화악-!
첼시가 엄청난 속도로 아르온과 에레보스의 치열한 전장으로 날아갔다
마물들이 첼시를 발견하고 살기를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첼시는 바람 조작을 이용해 마물들의 공격을 모조리 회피했다
‘레오 오빠와의 수련이 도움이 되었어! 게다가 아르온님의 초감각도!’
아르온에게 수련받은 초감각은 아직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련의 성과로 감각이 아주 날카롭게 가다듬어졌다
몇몇 마물들이 집요하게 첼시를 노렸다
하지만 성벽에서 날아온 마법이 그런 첼시를 엄호했다
리에니아나 쥬엔 같은 저격 마법에 특화된 이들의 지원이었다
이윽고 첼시가 아르온과 에레보스의 전장에 다다른 순간
콰앙-!
첼시 앞으로 무언가 날아왔다
“아르온님!”
온몸이 한계에 다다른 아르온이었다
수화까지 풀린 아르온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첼시가 허둥지둥 아르온을 부축하려는 순간
-하찮은 피조물이여
멸시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첼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겁 많은 용자를 버리고 자리를 떠나라. 그렇다면 하잘것없는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명백한 조롱과 비웃음이 담긴 악의 목소리에 첼시의 본능이 신호를 보냈다
도망치라고
자신이 절대 감당할 수 없는 미증유의 재앙이라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몸이 덜덜 떨려왔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첼시는 아르온을 놓치지 않았다
“첼시… 물러서.”
아르온이 비틀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러니 안전한 곳으로 가.”
“아르온님은 한계세요! 저랑 어서 빨리 가요!”
겁에 질렸음에도 첼시는 아르온을 데리고 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어린 인간 계집이 너보다 훨씬 더 용감하구나, 용자여. 갸륵하기도 하지
물러서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에레보스에게 첼시의 죽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저 아르온이 희망이라고 여겼던 미래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꼴사나운 모습을 비웃으며 아르온을 조롱하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에레보스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쓸데없는 만용을 부린 네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죽어라, 인간 계집
콰아아악-!
에레보스의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화염이 일어났다
그걸 본 아르온이 오러를 사용하려는 순간 그의 몸이 희미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다!’
최악의 타이밍에 신력이 모두 소진되었다
아르온이 이를 악물고 첼시를 품으로 잡아당기며 오러를 쥐어 짜냈다
‘최소한 첼시만이라도!’
화악-!
검은 불꽃이 아르온과 첼시를 덮쳤다
***
화르르륵-!
“아…”
모두가 넋을 잃었다
에레보스를 막아내던 용자가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패배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공포로 질려갔다
화르르르르륵-!
검붉은 밤하늘
검은 화염에 의해 타오르는 세계
영웅 후보생들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재앙의 재림’
타닥-!
모두가 절망하는 그때 하늘에서 레오가 내려와 검은 불꽃에 타오르는 대지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 에레보스를 올려다보았다
-끝이다
에레보스가 레오를 조롱했다
-용자는 이제 사라졌고 네놈들의 힘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희열에 찬 목소리
에레보스는 레오의 얼굴에 절망감이 깃들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앙의 시대가 다시금 도래할 것이다!
에레보스의 선언과 동시에 검은 화염이 더욱더 거세게 타올랐다
화르르륵! 타닥- 타닥-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오의 얼굴에는 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이노센트를 날리기 위한 힘을 계속해서 축적할 뿐이었다
지금 레오의 힘으로는 모든 걸 쥐어짜 낸다 해도 에레보스를 쓰러트릴 위력의 마법을 완성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순수의 마나가 태초의 악의 천적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큰 힘의 차이가 난다면 소용없다
그런데도…
-무어냐, 그 얼굴은
평온하기까지 한 레오의 얼굴에 에레보스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런 한결같은 믿음을 보낼 수 있는 거지?! 놈은 이제 없다! 그 겁쟁이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단 말…
“웃기지 마! 이 망할 놈아! 누구 더러 겁쟁이라는 거야!”
에레보스의 말을 끊고 누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느새 달려온 아르가 레오의 곁에 서서 에레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르온님은 겁쟁이가 아니야! 세계에서 가장 강한 용기를 가지신 분이라고!”
-무지란 무섭군
에레보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미 5000년 전에 죽고, 신들의 얄팍한 기적도 끝이 나 이 세상에 자취를 감춘 겁쟁이다. 그런 겁쟁이에게 용기를 얻어 나에게 대항하려 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
“냐아아악! 아르온님을 겁쟁이라고 부르지 마! 이 면상 박살 난 덩어리 놈아!”
아르가 또다시 에레보스의 말을 끊으며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아르온님이 겁이 많은 건 알아! 하지만 겁쟁이는 아니야! 겁에 질려 있어도 그걸 이겨내시는 분이라고! 용자 아르온은 세계를 구했어! 그래서 대영웅이란 말이야! 그런 분이 겁쟁이란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5000년 동안 잠들어 있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르는 삿대질까지 해가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그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재앙의 상징
신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공포의 존재, 태초의 악 에레보스였다
그 모습은 에레보스마저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에레보스의 눈에는 확연하게 공포에 질린 아르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라면 수인 따위
자신의 앞에서 한 마디도 뻥끗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이 전장에 설 자격조차 되지 않는 나약한 존재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어야 하는 하등한 피조물
그런데
“아르온님은! 다시 일어나실 거야! 일어나서 네놈을 두들겨 패버릴 거야!”
겁에 질렸음에도 굴하지 않고 소리를 질러댄다
이미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아르온이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놈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
“아르온님은 신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터무니 없는 바보로군
“누구더러 바보라는 거야! 이 바보야!”
“크큭… 푸흐흐흐하하하하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레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에 막 나가는 것으로 유명했던 루나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는 아르에게 경이로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맞는 말이야.”
레오가 빙긋 웃었다
“아르온은 돌아올 거야.”
화르르륵-!
-정신이 나간 거냐?
“아니, 나는 지극히 정상이야.”
아르온은 쓰러졌지만 레오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녀석은 절대 포기할 녀석이 아니거든.”
“크르르르-”
아르가 옆에서 낮게 으르렁 거리더니 하늘을 향해 하울링을 내뱉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황금색 오러가 아르의 몸에서 일었다
그 하울링에 에레보스의 눈이 꿈틀하는 순간
번쩍-!
아르온과 첼시를 뒤덮었던 화염을 뚫고 황금색 오러가 치솟았다
그걸 본 에레보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돼!
아르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는 그 모습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누가 짐이란 거냐, 이 바보야.’
레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르온의 오러에 반응하듯
드웨노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걸 보고 주먹을 꼭 쥔 레오가 속으로 말했다
‘내가 포기하지 않은 건 짐을 짊어졌기 때문이 아니야.’
안도감을 줬던 루나의 목소리가, 안심하고 목숨을 맡길 수 있었던 드웨노의 무구가
눈을 감아도 눈이 부신 리시나스의 빛이
그리고 그 누구보다 믿음직했던 아르온의 뒷모습이 있었기에 레오는 버틸 수 있었다
첼시를 품에 안은 채 검은 화염을 뚫고 나온 아르온을 보았다
‘넌 포기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후의 순간, 넌 다시 일어섰어.’
세계는 구원받을 거라며 모두를 다독이며 용기를 줬다
‘우리는… 이길 거야.’
친구들이 승리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는 늘 아니라고 하지만. 언제나 기적의 신호탄은 바로 너였어. 아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