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
델라드 왕국에서 벌어진 이상 사태에 세계가 뒤흔들렸다.
대륙 서부의 통신 마법 및 공간 이동 마법 체계가 일순간 먹통이 되었다.
그와 함께 불길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3000년 전 일어났던 재앙의 재림과 같은 현상에 세계는 공포에 휩싸였다.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난 후 드래고니아에서 영웅 소집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세계의 존재하는 영웅 길드와 영웅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르타로스의 움직임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세계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사태를 파악한 영웅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렇게 절망과 공포에 휩싸인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을 무렵.
이상 사태는 말끔히 사라졌다.
상황을 심각하게 파악하던 많은 영웅이 안도감과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3000년 전 공포! 태초의 악! 부활하다!>
에레보스에 대한 소식이 신문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에 모든 이들이 공포를 느낄 때.
또 하나의 소식이 전해졌다.
<5000년 만에 눈을 뜬 용자! 성운의 시조와 혜성의 마법사에 이은 또 다른 전설의 재림!>
용자 아르온이 모습을 드러냈고 부활한 에레보스를 토벌했다는 소식에 세계의 사람은 흥분했다.
그에 따라 성지 순례가 시작되었다.
대사건 후 수련회는 일정은 빨리 마무리되었다.
각자의 방학을 맞이하기 위해 돌아간 이도 있었고 플로브 저택의 영지에 남은 이들도 있었다.
수련회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늦은 밤.
칼을 포함한 루니아, 아르, 에이란, 드리아나는 손님용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히 해야 한단 말이야?”
칼은 싱글벙글 웃으며 상자에서 책상 위로 무언가를 하나, 둘 꺼냈다.
그걸 보고 루니아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건 또 뭐야?”
“뭐긴, 뭐야. 조각상이지.”
칼이 꺼내놓은 건 다름 아닌 손바닥 크기만 한 아르온의 조각상이었다.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르온의 조각상은 여러 가지 멋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몰라서 물어? 그런 걸 왜 잔뜩 만들었냐고?”
“당연한 걸 왜 물어? 팔려고.”
“너 미쳤어? 대영웅을 돈벌이 수단으로 쓰겠다는 거야? 불경죄로 잡혀가고 싶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루니아.
엘프 사회에서는 성운의 시조를 이용해 돈을 벌 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면 불경죄로 잡혀가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종족의 대영웅을 이용한 만큼 죄질 역시 나쁘다고 보기에 엄벌에 처했다.
“엘프들 사이에서는 위법이지? 하지만 수인은 아니란 말씀.”
칼이 히죽 웃었다.
“아하! 수인 사회에서는 그런 법이 없군요.”
에이란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팔짱을 낀 루니아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법이 없다고 해도 감히 아르온님을 장사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널 수인들이 가만두지 않을 걸?”
“쯧쯧쯧. 내가 말했지.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해야 한다고.”
우쭐한 표정을 지은 칼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루니아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받아 읽은 루니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칼이 아르온 본인의 조각상을 만들어서 팔아도 된다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언제 이런 걸 허락받았어?”
“훗, 아르온님이 영웅의 세계에서 넘어오셨다는 걸 아는 순간 느낌이 딱 오더라고! 성지 순례다 뭐다 대박이 날 거라고. 아르온님 보증도 받았겠다 돈 많은 관광객들! 특히 수인들에게 비싸게 파는 거지! 우하하하하!”
“자네는 왜 그렇게 돈을 좋아하는 건가? 내가 알기로 자네는 이미 학생이면서도 상당한 재력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자네 능력이라면 졸업 후에도 충분히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나도 궁금해, 네가 대놓고 속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녀석이라는 것도 알고 있거든. 필요 이상의 재물에 집착할 녀석이 아니야.”
드리아나의 말에 루니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바라보았다.
에이란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칼이 뻘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너희도 알겠지만 난 영웅이나 뭐나 대단한 자리에 오를 만한 그릇은 아니잖아.”
“그렇지.”
“응, 맞아.”
“아, 아니에요. 칼님은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드리아나와 루니아가 즉답했고 에이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칼을 달랬다.
“고맙다, 에이란. 좋게 말해줘서. 역시 넌 이 성질 더러운 엘프와 드워프와는 달라.”
칼의 말에 루니아의 눈이 번뜩였다.
그걸 외면하며 칼이 말했다.
“서포터 지망인데 단순히 전투에서만 너희를 돕고 싶지 않거든.”
칼이 어깨를 으쓱했다.
“필요한 무구든, 재료든, 포션이든. 구할 수 있는 모든 걸 구해서 너희를 돕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거든.”
“얼마나 모을 생각이야?”
“최소 나라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칼을 보며 루니아와 에이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로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든든해요! 칼님!”
루니아와 에이란은 감탄했다.
“칼! 역시 자네는 내 훌륭한 친구야!”
반대로 드리아나는 기뻐하며 칼을 얼싸안았다.
그런 드리아나를 내려다보며 칼이 말했다.
“네 예술 작품에 후원할 생각은 1도 없어.”
그 말에 드리아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치사하게 왜 그러나? 나라 하나도 사겠다는 사내가 통이 어찌 그리 작은가! 드웨노님의 뒤를 이어 장차 위대한 예술가가 될 나를 후원하면 자네의 이름은 길이길이 후세에 남을 텐데!”
원래 말투로 돌아온 드리아나를 보며 칼이 말했다.
“네 예술 활동에 돈을 후원하면 드웨노님이 내 멱살을 잡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실걸? 그리고 네 예술 활동에 돈을 후원하느니 그 돈을 땅에 묻는 게 더 이로울 거야.”
“땅에 돈을 묻는 무의미한 행동이 왜 이롭다는 건가?”
“최소한 세상 사람들이 네 끔찍한 작품은 안 볼 거 아니야.”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네.”
칼의 말에 루니아가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을 보며 드리아나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에이란이 기겁하며 말렸다.
“그나저나 저 고양이는 왜 저러고 있어?”
플로브 가문의 저택.
방에 한쪽에서는 아르가 부러진 브레이브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르온님이 떠나신 게 울적한 모양이에요.”
에이란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루니아와 드리아나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르에게 다가갔다.
“언제까지 우울해하고 있을 거야?”
“맞네. 너무 아르온님 생각만 하지 말게.”
그 위로에 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들어왔다.
“야, 아르. 너무 울적해하지 말라니…….”
“만지지 마.”
자신의 어깨를 잡으려는 루니아의 손길을 피하며 아르가 차갑게 말했다.
그 태도에 루니아가 멈칫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태도가 차가운 거 아니야?”
“어딜 감히 만지려고!”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 아르가 샥-! 루니아의 손길을 피했다.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르를 보며 루니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 아르 튠은 아르온님께 직접 후계자라고 인정받았어! 너희와는 격이 다르다고 격이!”
아르의 반응에 칼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흰 걔가 침울해 있을 거라고 생각 했냐?”
칼의 말을 듣고 드리아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래서? 격이 다르다는 건 무슨 소린가?”
“루니아, 넌 루나님에게 직접 후계자란 소리 들었어? 아니지? 드리아나. 너도 아니잖아? 나뿐이라고. 대영웅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은 건!”
헹-! 하고 웃으며 눈을 감은 아르고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후계자. 이 얼마나 좋은 울림이야?”
단어를 음미하듯 중얼거린 아르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그런 내가 너희랑 겸상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제 이 몸의 시대란 말씀!”
그 말에 루니아와 드리아나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드리아나가 꼬리를 살랑거리는 아르의 뒤로 다가가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준비됐나? 루니아.”
“물론이지. 드리아나. 꽉 붙잡고 있어. 힘껏 칠 테니까.”
“명치를 치게.”
“냐아아아악?!”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는 세 사람을 보며 칼이 에이란에게 물었다.
“안 말려?”
“저쯤 되면 말려도 소용없잖아요?”
“너도 성장했네.”
칼이 감탄하면서도 세 사람을 보며 측은하게 중얼거렸다.
“루나님과 아르온님, 드웨노님이 본다면 참 슬퍼하실 거야.”
“왜요?”
“자기들의 후계자 소리 듣는 애들이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안 슬프시겠어?”
“왠지 안 슬퍼하실 것 같은데요.”
에이란이 볼을 긁적이자 칼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기도 하네.”
이미 대영웅에 관한 환상이 많이 깨진 두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레오님은 방에서 안 나오시네요?”
“그러게, 한 번 갔다 와줄래? 난 쟤들을 말릴게.”
“레, 레오님의 방에요? 야심한 이 시간에요? 저 혼자서?”
눈에 띄게 당황하던 에이란이 볼을 붉혔다.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을 보며 칼이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같이 가 줄까?”
“혼자 다녀올게요.”
그 말을 남기고 에이란은 냉큼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칼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성장했네.”
***
영지 저택의 자신의 방.
수도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방이다.
변방 귀족 가문의 특징이었다.
땅이 넓다 보니 쓸데없을 정도로 방이 컸다.
창가 의자에 앉은 레오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전생에 카일이던 시절에는 술을 자주 즐겼지만, 다시 태어난 이후에는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았다. 딱히 어리기 때문도 아니고 학교의 교칙 때문도 아니다.
‘딱히 술을 마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대영웅들은 모두 술을 자주 마셨다.
대영웅들뿐만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영웅들은 모두 술을 자주 마셨다.
술로 힘든 시기를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서였다.
‘뭐, 루나 녀석이나 드웨노 녀석은 정말 좋아서 퍼마시기도 했지만.’
턱을 괴며 레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만 머뭇거리고 들어 와.”
이미 방문 앞에 손님이 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님이 누군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레오의 말에 작은 기척이 움찔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레오 오빠, 뭐해?”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방문자는 다름 아닌 첼시였다.
레오의 대답에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첼시가 레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레오 앞에 있는 술병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 마셔?”
그 말에 레오는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레오를 보며 첼시가 머뭇거렸다.
그런 첼시를 보며 레오가 앞에 자리를 가리켰다.
첼시는 레오 앞에 앉은 채 말 없이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런 첼시의 시선에도 레오는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은은한 달빛이 레오의 하얀 머리카락을 반짝거리게 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첼시가 이내 다짐을 한 듯 심호흡했다.
“레오 오빠.”
“응.”
술을 따르며 대답하는 레오를 보며 머뭇거리던 첼시가 입을 열었다.
“아르온님께 들었어. 레오 오빠가…… 시작의 영웅 카일님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