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
첼시의 말에 레오의 움직임이 멈췄다.
술병을 든 채로 고개만 든 채 첼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긴장된 얼굴로 첼시는 레오의 붉은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침묵 후.
테이블 위에 있는 새 잔에 손을 뻗은 레오가 술을 따랐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첼시에게 건넸다.
“마실래?”
“어, 응?!”
첼시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양손으로 술잔을 받고는 망설이더니 이내 한 모금 입에 가져다 댔다.
“아욱! 써”
인상을 찌푸리는 첼시를 보며 턱을 괸 레오가 키득거리며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아르온 녀석, 오지랖 부리긴.”
레오의 말에 첼시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레오와 아르온의 관계를 보고 혹시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후 아르온의 말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역시나 레오에게 직접 그 사실을 전해 들으니 충격이 달랐다.
“세상에. 나 어떡해? 그럼 지금까지 레오 오빠에게…… 아니, 카일님께 무례를 저질러 온 거야? 어떡해! 어떡해!”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첼시.
어쩔 줄 몰라 하는 첼시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돼.”
“하, 하지만! 아니지 참. 하지만요!”
평소대로 대답하던 첼시가 황급히 존대하더니 슬금슬금 레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감히 대영웅님을 서슴없이 대해 온 건…… 굉장한 결례가 아니었을지…….”
“달라지는 건 없어. 네가 편한 대로 날 대하면 돼.”
레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레오를 첼시가 손에 쥔 술잔을 꼭 쥐었다.
아르온이 자신에게 레오의 비밀을 알려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르온님께서는 레오 오빠와 가까운 누군가가 레오 오빠의 비밀을 알기를 바라셨어.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얻길 바라시면서.’
첼시로서는 레오가 걸어온 길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영웅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가장 좋아했던 건 역시나 대영웅들의 영웅담.
하지만 대영웅들의 이야기는 첼시에게 있어 동화 속, 혹은 역사 속 저편의 이야기였다.
비단 첼시뿐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에레보스의 조각을 경험한 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에레보스의 진정한 공포와 절망이 무엇인지.
‘아르온님이나 레오 오빠가 없었다면 우린 모두 죽었을 거야.’
그리고 기나긴 시간 동안 온전한 에레보스와 맞서 싸워 끝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준 대영웅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실감하게 되었다.
‘레오 오빠는…… 다시 한번 그 시련을 되풀이하는 거야. 혼자서.’
그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어.’
지금의 첼시는 너무 미숙했다.
첼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이라도 레오 오빠가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주어야 해.’
아르온도 그걸 원했기에 비밀을 알려줬을 것이다.
레오의 말대로였다.
바뀌는 건 없다.
자신의 태도가 바뀐다면 분명 레오도 어색할 게 분명했다.
심호흡한 첼시가 단번에 잔에 있는 술을 들이켰다.
“흡? 콜록! 콜록! 켁!”
식도를 타고 전해지는 화끈함에 첼시가 기침을 했다.
“무울! 물!”
허둥지둥 물을 찾는 첼시에게 레오가 물을 따라줬다.
“후아!”
첼시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어른들은 대체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야? 맛도 없는데!”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첼시가 질겁했다.
“그러게, 왜 마시는 걸까.”
“어쩐지 레오 오빠는 너무 어른스럽다고 했어.”
이제야 레오의 성숙함이 이해가 되었다.
한편으로 규격을 벗어난 레오의 강함도 납득이 갔다.
“입학 초기에 레오 오빠가 시작의 영웅에 큰 관심을 보였었잖아? 그건 왜 그런 거야?”
“아, 그거.”
레오는 입학 초기에 동아리를 만들어 시작의 영웅을 재조명하려고 했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레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억울하잖아.”
“억울해?”
“그래. 사기꾼 도마뱀이랑 성질 더러운 귀쟁이, 겁쟁이 수인, 변태 드워프는 대영웅으로 칭송받는데 나만 가상의 인물 취급받잖아.”
레오의 입에서 거론된 이들이 누구인지 깨달은 첼시가 입을 떡 벌렸다.
보통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
“풉.”
입을 뻐끔거리던 첼시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말을 하니까 레오 오빠가 시작의 영웅이라는 게 확실히 와 닿아.”
오직 절친한 사이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레오 오빠! 나 대영웅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될까?”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해줄게.”
“응? 왜? 아직 시간도 많은데.”
“손님이 와 있거든. 계속 방치하면 이상한 생각을 마구 할 거야.”
“이상한 생각?”
첼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레오가 몸을 일으켜 방문으로 다가갔다.
벌컥-! 콰당-!
“히익?”
문을 열자 방문에 얼굴을 대고 있던 에이란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에, 에이란 언니?”
첼시가 당황했다.
설마 이야기를 엿들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레오의 얼굴이 태연한 걸 보고 안도했다.
‘마법을 썼구나.’
레오의 실력이라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차단할 수 있었다.
첼시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란이 놀람과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레오님이 정말로 시작의 영웅 카일님이신가요?!”
“뭐?”
“에엑?!”
예상 밖의 상횡에 레오와 첼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이란의 귀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
혼자 복도를 걷던 에이란은 곧 레오의 방 주변에 도착했다.
‘야심한 밤…… 혼자서 레오님의 밤에.’
에이란은 일전에 봤던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늦은 밤에 하녀가 가문 도련님의 방에 찾아가서…….’
얼굴을 붉히던 에이란이 고개를 휙- 휙 저었다.
‘레오님은 신사시니까 그럴 리는 없을 거야.’
그렇게 레오의 방 가까이 다가가던 에이란의 귀가 쫑긋거렸다.
레오의 방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헉? 여자 목소리?’
에이란의 손이 살짝 떨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에이란이 기척을 죽이고 레오의 방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댔다.
‘이건…… 첼시 양의 목소리? 서, 설마! 밤늦게 밀회?’
에이란이 입을 뻐끔거렸다.
‘화, 확실히 레오님과 첼시 양은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첼시 양도 예쁘니까 서로 사귀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야. 하, 하지만 인간 귀족들은 서로 연애가 쉽지 않다고 했는데? 게다가 레오님의 외가와 첼시 양의 가문은 서로 앙숙 가문…… 아! 가문의 반대를 무릅쓴 사랑?!’
에이란의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그리고 방안의 내용을 듣기 위해 더더욱 귀를 밀착시켰다.
하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자세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체 왜 안 들리는 거야?’
엘프의 예민한 청각에도 불구하고 내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에이란은 답답함을 느꼈다.
잠시 후, 눈을 감은 에이란이 청각에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런데도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웅웅- 대화 소리가 뭉개진다.
에이란이 더더욱 마나를 집중시켰다.
잠시 후.
뭉개지던 소리가 차츰 선명함을 되찾았다.
마치 막혀 있던 벽이 스르륵 녹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에이란은 놀라움을 느꼈다.
청각이 마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감각.
‘……초감각?’
아르온에게 배운 초감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레오 오빠가 시작의 영웅이라는 게 확실히 와 닿아.”
첼시의 목소리에 에이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당황하는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에이란은 방 안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엿듣는 걸 들켰다는 사실을 당황할 틈도 없이 황급히 물었다.
“레오님이 정말로 시작의 영웅 카일님이신가요?!”
그리고 현재 상황에 이르렀다.
자리에 앉은 채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에이란을 바라보며 레오가 중얼거렸다.
“초감각인가.”
“초감각?”
첼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으로 방의 목소리가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차단해놨는데도 에이란은 대화 소리를 들었어.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에이란이 초감각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 역시 초감각이었군요.”
에이란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그런데 왜 저만 초감각을 발동하는 데 성공했을까요? 아르 양이나 다른 아조니아 학생분들은 물론이고 루메른의 학생분들도 아직 초감각을 발동시키지 못했는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에이란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베르키아의 영향이겠지.”
“선조님의 영향이요?”
“그래. 베르키아도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 계속해서 수련 했으니까.”
하지만 당시의 오러 이론학으로는 아르온의 고유 기술인 초감각을 완성 시키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베르키아의 연구는 에이사르 가문의 오러에 남아 후대에 계속해서 전해졌다.
‘독자적으로 계속 연구해 발전해 온 에이사르 가문의 오러와 아르온의 어드바이스가 합쳐져 에이란이 초감각을 완성 시킨 건가.’
아무래도 엘프의 특성상 청각이 가장 먼저 각성한 모양이었다.
레오의 설명을 듣고 첼시와 에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레오님이 대단하셨던 건 시작의 영웅 카일님이셨기 때문이군요!”
해맑게 웃는 에이란을 보며 첼시가 말했다.
“에이란 언니, 이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알고 있어요, 첼시 양.”
에이란이 첼시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레오님의 정체가 밝혀지면 많이 혼란스러워질 테니까요. 당분간은 우리 두 사람의 비밀로 간직하도록 해요.”
에이란의 말에 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란이 레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동경해온 세상을 구한 대영웅이 눈앞에 있다.
언제나 레오를 동경하고 그의 활약을 지켜보고 싶은 에이란에게는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레오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레오님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요.”
“그렇다면 조금 더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레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직은 레오님이 짊어진 걸 나누기에는 부족할지 모르죠. 하지만 아르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레오님이 잠시나마 모든 걸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은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에이란이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그러니 레오님. 힘들 때면 제게 기대세요!”
“고마운 말이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언제 어디서든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레오님을 위로해드릴 테니까요!”
상기된 표정을 지은 에이란의 목소리는 어딘지 결의에 찬 것 같아 보였다.
다시 한번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시련에 나서는 시작의 영웅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의지.
하지만 그런 에이란의 의도와 다르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첼시는 복잡미묘한 민망함을 느꼈다.
“에이란 언니. 조금 전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조금 오해가 있을 수도…….”
“네? 뭐가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에이란의 얼굴이 점점 굳기 시작하더니 이내 화악!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지금 말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발작하듯 외친 에이란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피,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달라는 뜻…… 아, 아니아니아니! 이용? 이, 이것도 아니라!”
“너 너무 이상한 소설을 많이 읽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에이란이 고개를 마구마구 젖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에 쭈그려 앉아 버렸다.
첼시는 그런 에이란을 곁에서 다독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성격은 다른데 독서 취향은 왜 저렇게 똑같아?’
즐거운 기분을 느끼며 레오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한결 편했다.
‘나쁘지 않네.’
편안함을 느끼며 레오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