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
베르키아 에이사르.
성운의 시조-페어리 나이트-혜성의 마법사로 이어지는 엘프 종족의 삼대 위인.
재앙의 시대가 종식된 이후 세계의 재건과 종족의 부흥을 이끈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인지도 면에서 세이룬 녀석에게도 밀리고 있지.’
레오는 교과서를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럴 수밖에 없어. 베르키아 녀석의 히어로 레코드도 많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게다가 녀석은 영웅의 시대 인물로 분류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녀석은 우리랑 같은 시대 사람.’
무려 5000년이다.
베르키아의 일화는 그녀의 후손인 에이사르 가문을 통해 내려오고 있지만, 워낙 오래된 내용이다.
거기에 더해 히어로 레코드는 3000년 전, 에레보스의 조각을 봉인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다.
3000년 전.
에레보스에게서 세상을 다시 한번 구해낸 세이룬과 비교하자면 인지도에서 밀리는 건 당연했다.
레오 역시 제자인 베르키아의 기록에 대해 찾아봤다.
하지만 그 많은 기록 속에서 베르키아의 힘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키아의 성장 가능성은 그때도 무궁무진했었어. 베르키아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을 거야.’
제자를 떠올리며 레오는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생의 삶에 큰 후회는 없다.
세상의 멸망의 끝에 다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가족 같은 이들도 있었고 끝내는 세상을 구했으니까.
비록 불완전한 상태로 후대에 넘기긴 했지만 새로운 삷으로 태초의 악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얻었다.
가족 같은 친구들이 죽은 것은 비통하다.
하지만 그 누구 한 명 자신의 죽음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루지 못하고 보지 못한 미래에 눈물지은 이는 한 명도 없다.
그렇기에 레오는 친우들의 죽음에 슬퍼할 뿐.
연민하지 않았다.
카일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빼앗기고 잃기만 했던 삶이지만.
의미 있는 것을 이루었으니 후회는 없었다.
‘다만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면.’
제자들의 성장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비하르의 삶은 안타까웠다.
‘충분히 빛 속에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살았으니까.’
그 또한 대영웅들이 물려준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 길을 걸었겠지만, 레오로서는 입맛이 썼다.
베르키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래전의 과거다 보니 레오는 자신이 죽은 이후의 제자에 대해 알지 못했다.
베르키아와 루메른.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평가한 건 그 때문이었다.
베르키아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어느 영역에 다다랐을지 레오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루나와 아르온이 인정했던 재능이야. 마검사로서 센스 역시 대단했어. 내가 기억하는 베르키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강해졌을 거야.’
루나의 별의 마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스승이 전수해준 마법 지식을 토대로 자신만의 확고한 마법 세계관을 완성시켰다.
아르온의 오러 스킬을 오롯이 전수받지 못 했지만, 스승이 전해준 기술로 자신의 기술을 만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쉬움이 크네.’
레오가 눈을 감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베르키아는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까?’
레오가 베르키아를 떠올리는 사이.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대체적으로는 자신들에게 훨씬 익숙한 황혼의 기사의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였다.
그런 학생들을 보며 멜이 말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루메른님은 대영웅님들에 이어 세계를 다시 한번 구하신 분들이죠.”
뚜벅- 뚜벅-
“반대로 베르키아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세계를 재건했다는 것 정도로 알려져 있죠.”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과연 세계의 재건이 쉬웠을까요?”
“그야 어려웠겠죠.”
“쉽지 않은 건 당연해요.”
“그런데 에레보스는 이미 사라졌던 시대잖아요?”
학생들의 말에 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과연 에레보스가 사라졌다고 해도 세계가 바로 평화를 맞이했을까요?”
“그건…….”
학생들이 말끝을 흐리자 멜이 칠판에 <대전쟁>이라는 단어를 썼다.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대전쟁은 여러분도 들어보셨죠?”
대전쟁.
에레보스가 토벌된 후 타르타로스가 에레보스의 숙원을 일으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학계에서는 이 전쟁에 관해서 크게 주목하지는 않아요. 에레보스가 토벌된 직후이기도 하고. 에레보스가 사라져 타르타로스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던 시절이니까요.”
멜의 말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시 타르타로스의 힘은 건재했습니다. 권능을 잃었어도 군단장은 군단장. 당시의 타르타로스의 세력은 강대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5000년의 영웅의 시대 중 타르타로스가 가장 강력했던 시대가 바로 그때죠.”
세계의 명운을 건 싸움은 에레보스가 토벌된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자료에 의하면 대전쟁의 기간은 10년이라고 하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게 베르키아님입니다.”
그 말에 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에레보스가 있던 시절에도 가드스론은 타르타로스의 공격을 막아냈잖아요?”
“네. 하지만 타르타로스에 에레보스가 없었던 것처럼 세계 역시 대영웅님들을 떠나보낸 뒤였죠.”
그 말에 학생들이 침묵했다.
멜이 빙그레 웃었다.
“오늘 수업에서 중요한 건 전기 영웅들이 위대하냐, 후기 영웅들이 위대하냐. 루메른님이 더 강하시냐, 베르키아님이 더 강하시냐가 아니랍니다. 전기 시대의 영웅들 역시 후대 영웅들 만큼 위대하고 강한 존재라는 걸 여러분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이 오늘 수업의 주된 내용입니다.”
딩동댕동-
때마침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책을 정리하며 멜이 빙그레 웃었다.
“다음 시간에는 전기 영웅들의 영웅담과 그분들에게 본받을 점에 관한 레포트를 써오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멜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전기 시대 영웅들에 대한 자료는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으휴! 어려운 숙제를 떠맡았네.”
일리아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지만 필요한 수업 내용이라고 생각해. 지난번 정상 회의에서 재앙의 시대 이전 영웅들의 히어로 레코드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잖아?”
“맞아요. 이때까지 발견되지 않는 영웅들의 히어로 레코드가 발견되고 있어요. 어쩌면 그분들의 히어로 레코드를 공략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때를 대비해두는 것도 좋죠.”
첸 시아가 빙긋 웃더니 레오를 바라보았다.
“레오 도령은 어떤 영웅에 관한 레포트를 쓸 생각인가요?”
“페어리 나이트 베르키아.”
제자에 관한 걸 써서 날로 먹을 생각이었다.
“오호, 그렇다면 나도 마검사로서 베르키아님에 관한 걸…….”
“안 보여 줄 거다.”
“치사해!”
일리아나가 턱을 쓰다듬다가 레오의 말에 발끈했다.
“얘들아! 뉴스 떴다!”
그때 학교 내에서 청소를 하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칼이 눈을 번쩍 뜨더니 레오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뭔데?”
일리아나가 눈을 빛내자 칼이 말했다.
“2학년 기숙사 공동 정원에 의뢰 게시판이 만들어졌대!”
그 말에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흠칫했다.
의뢰 게시판.
오늘 오전 세드젠이 공지한 2학기 전투학 평가 점수를 매기는 의뢰가 분명했다.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할 때였다.
휘릭-! 팍-!
켁!
날아든 채찍이 칼의 목을 휘감았다.
“그 중요한 정보를 왜 다른 기숙사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거죠? 칼 토마스.”
“뭐 어때? 같이 알면 좋…….”
“당신은 노블 소속인 걸 잊었나요?”
엘리자가 차갑게 말하자 일리아나가 팔짱을 끼고 ‘훗-!’ 하고 웃었다.
“몰랐어? 칼은 우리가 심어 놓은 스파이란 걸? 어쨌든 얘들아! 우리도 얼른 가자! 좋은 의뢰 다 뺏기겠어!”
일리아나가 쌩하고 달려 나갔다.
“야! 너희가 심어 놓은 스파이면 좀 챙겨라!”
“넌 노블 학생이잖아!”
매정하게 소리치는 일리아나를 보며 칼이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참 눈물겨운 우정이네요.”
엘리자가 코웃음을 치자 칼이 말했다.
“그래도 레오랑 클로에, 첼시는 남아 줬잖아? 너희밖에 없다!”
“우린 그냥 어떤 의뢰를 하든 크게 상관없어서 남았을 뿐이야.”
첼시가 매정하게 말하자 칼은 킥킥- 웃었다.
“그럼 이것들 필요 없겠네?”
칼이 품에서 종이 몇장을 꺼냈다.
그걸 본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뢰서 아니야?”
“물론이지. 내가 교직원분들께 부탁해서 의뢰 게시판이 만들어지면 제일 좋은 의뢰서들은 선점해달라고 했거든? 평소 인망이 중요하다니까?”
칼이 턱을 쓰다듬으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칼 군이 순순히 그 좋은 정보를 다 까발렸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첸 시아가 빙그레 웃자 첼시가 물었다.
“그러면 일리아나에게도 귀띔을 주지 그랬어?”
“날 버린 것에 대한 복수지.”
히죽- 웃은 칼이 의뢰서를 펼쳤다.
“참고로 레오. 의뢰서만 몇 장 가져온 것뿐이라 교칙 위반 아니다? 가져다 놓으면 문제없잖아.”
칼이 레오를 보며 말했다.
“안 잡아가.”
레오가 피식 웃자 칼이 안도했다.
“확실히 좋은 의뢰들이 많네.”
A급 의뢰들 중에서도 보상이 크거나 의뢰 난이도는 쉽지만, 점수가 큰 좋은 의뢰들이 많았다.
“칼, 너는 무슨 의뢰를 할 거야?”
“북부 마탑에서 연금술 조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클로에, 북부 마탑주 딸이랑 알고 지냈지?”
“응. 아냐스 언니는 하프 엘프지만 좋은 사람이야.”
“어머, 연금술이라. 조수가 3명 필요하다는데 나도 가능할까요?”
첸 시아가 흥미를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레오는 아냐스 베그스를 떠올렸다.
‘아냐스? 그 눈이 맛탱이가 갔던 애?’
대외적인 신분은 북부 마탑주의 딸이지만 실제로는 그림자다.
첸 시아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관심을 보였다.
“레오 도령, 이 의뢰 어때요?”
“난 따로 생각해둔 의뢰가 있어서.”
“그런가요?”
첸 시아가 아쉬움을 드러내자 클로에가 말했다.
“그럼 내가 가볼까?”
클로에가 관심을 드러냈다.
“레오 오빠는 어떤 의뢰를 하려고? 혹시 지명을 받은 거야?”
첼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조금 신경 쓰이는 의뢰가 있어서.”
***
일주일 후.
워프 게이트앞에 2학년들이 가득했다.
오늘부터 2학년은 의뢰 임무에 투입되어 학교 외부로 파견되었다.
레오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대륙 북동부의 외지.
의뢰는 일전에 중앙 광장에서 본 [영웅의 묘 도굴 조사] 의뢰였다.
‘대륙 북동부는 여러 작은 왕국이 패권을 다투고 있다고 했지?’
현재 대륙에서 치안과 정세가 가장 어지러운 지역이었다.
‘의뢰 왕국은 카넬 왕국의 자작가.’
레오가 의뢰 내용에 대해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나 말고 의뢰를 맡은 학생이 더 있다고?’
미스터리 성향이 강한 의뢰인 만큼 자신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의뢰를 맡을 괴짜가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내가 의뢰를 맡는다고 해서 누가 따라붙은 건가?’
최근에 여학생들이 자신에게 과한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지간한 괴짜가 아니라면 이런 의뢰를 맡지 않기 때문이었다.
레오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오? 혹시 [영웅의 묘 도굴 조사]의 의뢰를 맡은 게 레오군인가요?”
익숙한 목소리가 반갑다는 듯 레오에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린 레오가 자신에게 다가 오고 있는 학생을 바라보았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의 여학생은 다름 아닌 3학년 대표 릴 루체였다.
“혹시 선배님이 제 파트너세요?”
“맞군요! 레오 군! 설마하니 미스터리를 좋아할 줄 몰랐습니다!”
릴이 환하게 웃으며 레오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선배님, 혹시 이 의뢰를 맡은 이유가?”
“네! 미스터리라서요!”
‘알고는 있었지만, 얘도 참 괴짜네.’
레오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