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이곳은 카넬 왕국의 변방 국토인 티뷴 자작령.
그중에서도 외각 구역에 있는 도시였다.
원래는 제법 규모가 있는 농경 도시였다.
하지만 전란이 극심해지자 결국 이곳에까지 전쟁의 불씨가 닿았다.
도시와 마을가 불탔다.
사람들의 터전이었던 장소가 잿더미가 되어갔다.
페티먼 왕국군이 손에 쥐어진 횃불을 집으로 던지며 불씨를 키워갔다.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던 페티먼의 기사 중 한 사람이 검 끝으로 바깥의 피난 행렬을 가리켰다.
“보아라, 자랑스러운 페티먼의 군사들이여! 저기 간악한 카넬의 잔당들이 있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놈들을 쳐라!”
선두에 선 기사의 우렁찬 외침에 병사들이 흠칫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기사가 일갈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빨리 저놈들을 쫓지 않고!”
“나, 나으리! 저들은 아무리 봐도 카넬의 잔당들이 아닌 피난민들입니다.”
애초에 카넬 왕국군의 잔당이 있을 리 없었다.
카넬 왕국은 얼마 전 페티먼 왕국과의 전면전에서 패배해 병사들을 뒤로 크게 물린 상황.
카넬 왕국군이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병력을 물린 동안 페티먼 왕국군은 카넬 왕국의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투가 있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은 말단 병사들까지 알고 있었다.
“우매한 것들! 저들의 손에 칼과 창이 쥐어지는 순간! 자랑스러운 우리 페티먼을 위협하는 악의 군대가 되는 것이다!”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이가 병사들에게 일갈했다.
눈에 핏대가 선 그는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폐하의 이름으로! 악을 뿌리 뽑아라! 정의를 바로 세워라! 그것이 너희! 자랑스러운 페티먼 왕국군의 사명이다! 저것들을 모조리 참살하라!”
“하, 하지만 나으리! 저기에는 노인과 아이들도…….”
자신을 설득하는 병사를 본 기사단장의 눈이 꿈틀거렸다.
“네놈, 지금 감히 항명하는 것이렷다?”
말에서 내린 기사단장이 병사에게 다가갔다.
“항명이 아니오라.”
푹-!
“커억?”
병사의 복부에 기사단장의 검이 꽂혔다.
피를 토하며 움찔움찔 떨던 병사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폐하의 은덕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알지 못하는 무지한 놈들.”
기사단장의 눈에 혐오감이 떠올랐다.
“폐하의 은덕을 배반한 네놈들은 더 이상 위대한 페티먼 왕국군이 아닌 반역자다. 기사단이여.”
스릉-!
기사단장의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페티먼 기사단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것을 본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무도한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위대한 국왕 폐하께 영광이 있으라!”
“정의가 우리와 함께 한다!”
오러를 내뿜은 기사들이 자신 산하의 병사들을 도륙하려 했다.
“으아아악!”
“이, 이러지 마십시오!”
병사들은 겁에 질려 도주했다.
그들은 각자 병장기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과 맞서 싸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전장을 경험한 만큼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병사들을 보며 기사단장이 코웃음을 쳤다.
“한때 폐하의 이름 아래 있었던 만큼 경건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지. 볼품없이 도망가는 꼴이라니. 역시 경박한 쓰레기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군.”
기사단장은 바닥에 쓰러져 움찔하고 있는 병사를 향해 검을 고쳐 쥐었다.
“네놈도 죽어라.”
부하였던 이의 목숨을 끊으려고 검을 휘두르는 순간.
텁-!
“내가 보기에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는 네놈들 같은데.”
뻗어 나온 손이 기사단장의 검을 쥐었다.
몸을 흠칫 떤 기사단장이 자신의 손을 잡은 이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붉은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냐! 카넬 왕국의 앞잡이냐!”
기사단장이 검을 거칠게 휘두르며 일갈했다.
하지만 레오의 손에 잡힌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힘이!’
상상을 초월하는 레오의 힘에 눈을 부릅뜨던 기사단장이 오러를 일으켰다.
“손째로 잘라 주마!”
그와 함께 검에서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걸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기사단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여전히 레오의 손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검.
레오는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커헉?!”
검이 오러 째 폭발했다.
그와 함께 검과 오러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은 레오에게 조금의 생채기도 입히지 못했지만, 기사단장의 몸은 그대로 넝마 조각이 되었다.
병사들을 도륙하려던 기사들 앞에는 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장에 나선 기사로서 수하를 베려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릴의 외침에 선두에 선 기사가 창을 휘둘렀다.
“무얼 하는 계집인지는 몰라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일갈과 함께 오러가 깃든 창이 릴을 놀렸다.
화악-!
하지만 창이 릴에게 닿는 것보다 배틀 해머를 꺼내든 릴이 기사를 날려 버리는 게 빨랐다.
쩌억-!
“커헉?!”
배틀 엑스에 그대로 몸이 가격당한 기사가 허공에 뜨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카넬 왕국에서 보낸 기사구나!”
오러를 두른 병장기를 쥐고 자신을 포위하는 열 명의 기사를 슥- 훑어본 릴이 배틀 해머를 치켜들더니 그대로 바닥을 내리쳤다.
쾅-!
그와 함께 치솟은 대지의 파도가 그대로 기사들을 집어삼켰다.
“끄아아악!”
기사들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기사들이 입이 틀어막힌 채 두더지처럼 얼굴을 내밀었다.
배틀 해머를 어깨에 걸친 릴이 그들 앞에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루메른 학생 신분인 걸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가문의 일로 이곳에 왔다면 당신들의 머리를 그대로 박살 내버렸을 겁니다.”
음산한 목소리로 내뱉는 릴을 보며 기사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가 품에서 포션을 꺼내 다친 병사의 복부를 치료했다.
그리고 기사단장 앞에 다가가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놈들…… 카멜 놈들이 아니구나! 정체가 뭐냐!”
레오의 물음에 기사단장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 옷을 보면 몰라?”
대답하기도 짜증 난다는 듯 레오가 말했다.
그 말에 흠칫 몸을 떤 기사단장이 이를 뿌득 갈았다.
“루메른?! 루메른은 중립을 지켜야 할 텐데! 오호라! 사악한 카넬 놈들이 루메른을 끌어들인 거구나! 부끄러운 줄 알아라! 영웅을 목표로 한다는 자들이 감히 악의 편을 들다니!”
눈이 돌아간 기사단장이 악을 썼다.
그걸 본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화가 안 통하겠군.’
“위대한 국왕 폐하 만세! 정의가 페티먼 왕국과 함께할 것이다!”
광기에 찬 모습으로 악을 써대는 기사단장을 향해 레오가 발을 들어 올렸다.
“저스티스 길드가 네놈들을 처단할 것……!”
콱-!
레오가 신경질적으로 기사단장의 머리를 짓밟았다.
‘저스티스 길드?’
병사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말에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스티스 길드.
레오도 알고 있는 곳이다.
다름 아닌 영웅 길드.
인간 영웅 길드 중에서는 트와일라잇, 임페리얼에 이은 서열 3위의 길드였다.
‘이 전쟁에 저스티스 길드가 개입한 건가?’
레오가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지축이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낯익은 문장이 수놓아진 깃발을 나부끼며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사들이 보였다.
레오는 품에서 의뢰서를 확인했다.
‘티뷴 가문의 가문기.’
다름 아닌 루메른에 의뢰를 넣은 티뷴 자작가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워워!”
선두에 선 젊은 기사가 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리폰이었다.
환수를 타고 다니는 기사.
누가 봐도 고위 기사였다.
젊은 기사는 레오와 릴의 복장을 확인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메른 교복? 루메른 학생이 어떻게 여길?”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젊은 기사를 보며 레오가 의뢰서를 보여주었다.
“영웅의 묘 도굴 조사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루메른에서 파견을 온 학생입니다. 의뢰자인 렐겐 티뷴 자작님을 뵙고 싶은데요.”
그 말에 젊은 기사가 그리폰에서 내려 레오 앞에 섰다.
“의뢰에 응해줘서 고맙소. 하지만 의뢰자는 존재하지 않소.”
“그게 무슨 뜻이죠?”
레오 곁에 선 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나셨소. 지금 티뷴 자작은 렐겐 티뷴이 아닌 나, 에시먼 티뷴이오.”
투구를 벗으며 쓴웃음을 지은 에시먼 자작이 곤란한 듯 말했다.
“의뢰에 응해준 것은 고맙소만. 참으로 곤란한 시국에 방문했구려. 루메른의 학생분들.”
에시먼 자작의 말에 릴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에시먼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에시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일단 페티먼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구금하는게 먼저인 것 같구려. 이후에 상황을 설명해주겠소.”
그 말에 릴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이 심각한 느낌이네요, 레오.”
“…….”
“레오? 무슨 일 있나요?”
“그렇네요.”
릴의 말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레오가 혀를 찼다.
‘먼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군.’
레오의 초감각이 시선을 감지했다.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
“대륙 북동부의 역사에 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죠.”
“예. 1000년 전, 타림 제국이 멸망한 이후 분열된 왕국은 끊임없이 분쟁을 계속해 왔으니까요.”
타림 제국.
대륙 북동부에 있었던 영웅의 나라였다.
그리고 타림 제국은 영웅의 시대 이후 가장 강력했던 인간들의 나라였다.
타림을 건국한 이는 다름 아닌 개벽의 영웅들과 같은 시대.
정확하게는 개벽의 영웅들보다 한 세대 이전의 영웅으로 히어로 레코드에는 황천의 기사라 기록된 타무스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황천의 기사보다 유명한 이명이 있다.
영웅 황제.
당대 최강의 영웅으로 수많은 영웅을 수하로 뒀던 남자였다.
타무스가 살아 있던 시절 타림 제국은 영웅 제국이라 불렸을 정도로 많은 영웅이 집결된 왕국이었다.
‘뭐, 대단한 녀석이었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에레보스의 조각이 부활한 이후.
황천의 기사 타무스는 에레보스의 토벌을 천명했다.
하지만 타림 제국의 영웅 군단은 에레보스는 고사하고 마물 여왕과 거인왕의 군단에 패퇴하였다.
물론 패퇴했다 하더라도 타림 제국은 건재했다.
재앙의 재림이 종식되고 2000년이나 더 제국이 지속 되었다.
그건 타림이 그만큼 강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황천의 기사와 타림 제국은 첫 전투 이후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후대에 이르러 그들이 조롱받는 이유는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건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였기에 남긴 유산 역시 막대하다.
그 유산을 바탕으로 제국이 멸망하고 수많은 나라로 분열된 이후에도 대륙 북동부에는 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전쟁으로 이제는 영웅의 씨가 마른 지역이었다.
대륙 북동부의 역사에 대해 떠올리며 레오가 말했다.
“북동부는 오랜 싸움을 해왔지만 그만큼 전쟁이 일상화된 지역이기에 선을 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요?”
정확하게는 선을 넘지 못했다.
타림 제국의 적통 후계국임을 주장하며 타림의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끊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1000년의 분쟁으로 인해 피 튀기는 살육전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그러한 전쟁을 할 기반마저도 상실한 상태였다.
1000년 동안 서로를 증오하고 칼을 겨누어 왔지만, 이제는 전쟁을 할 힘마저도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다.
남아있는 앙금 탓에 전쟁이 멈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살육전이 시작되는 순간 공멸이라는 사실을 대륙 북동부 나라들은 알고 있었다.
북동부 전쟁들은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후퇴를 하고 이긴 쪽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점령지만을 손에 넣는 일종의 땅따먹기가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타지역에서는 이를 가리켜 ‘가짜 전쟁’ 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레오의 물음에 에시먼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 전부터 이 구역의 정세가 바뀌었습니다.”
그 말에 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외부 세력이라도 개입한 건가요?”
“예.”
그 대답을 듣고 레오가 팔짱을 꼈다.
“혹시 저스티스 길드와 관련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
“폐하. 오늘도 폐하의 위대한 병사들이 승리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이것으로 폐하의 영토는 더욱 넓어졌습니다.”
“과연.”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여성을 보며 페티먼의 국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롬 경이 보기에 나의 군대의 승리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오?”
페티먼 국왕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폐하의 군대가 승리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니겠습니까?”
제롬이 빙그레 웃었다.
“바로 폐하께서는 정의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타림의 진정한 적통이니 이 모든 땅이 폐하의 것이 되는 건 당연한 이치지요.”
“후후훗! 후하하하하! 제롬 경의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구려!”
큰 웃음을 터트리는 페티먼 국왕을 보며 저스티스 길드의 수장, 제롬 카디움이 말했다.
“곧 폐하의 수하 중에서도 무수히 많은 영웅이 탄생할 겁니다.”
“정말이오?”
페티먼 국왕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페티먼 국왕을 보며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진짜 전쟁은 영웅을 탄생시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