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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472화 (472/483)

472.

짹- 짹-

새들이 아침이 밝았음을 알렸다.

“우으.”

이불 속에서 릴이 괴로운 신음성을 내뱉으며 뒤척거렸다.

엄청난 숙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물…….”

“여기요.”

상체를 일으킨 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리자 옆에서 누군가 물을 건넸다.

“아, 고맙습니다. 레오.”

릴이 힘겹게 미소 지으며 꼴깍- 꼴깍- 물을 마셨다.

“푸흡?! 케헥?! 콜록! 콜록!”

그러다가 사레가 들려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왜, 왜왜왜왜왜왜왜 레오가 여기에!”

패닉에 빠진 얼굴로 황급히 묻는 릴을 보며 레오는 자신의 잔에든 물을 홀짝이며 답했다.

“여긴 제 방이에요. 어제 릴 선배가 술에 잔뜩 취해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잔 거죠.”

그 말에 릴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추태를 부렸군요. 미안해요. 레오.”

보기 드물게 귀까지 빨개졌던 릴이 심호흡을 하더니 침대 위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레오, 만약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억지로라도 방에서 내보내 주세요.”

“이상한 마음을 품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레오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습니다. 내 말은 괜한 소문이 나면 곤란해진다는 겁니다.”

“확실히 선배가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도 있겠네요.”

“나보다는 레오가 더 곤란할 겁니다.”

릴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레오는 이미 작년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이제는 영웅이기까지 하죠. 많은 사람이 레오를 존경하고 또 동경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시기와 질투를 하는 사람도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렇겠죠.”

“예. 그런 사람들은 레오를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고 할 겁니다. 난잡한 여자관계는 물어뜯기 딱 좋죠.”

릴이 한숨을 쉬었다.

“물론 역사를 들여다본다면 호색한 영웅은 많습니다. 도의적인 것을 어기는 영웅도 많죠. 당장에 저스티스 길드만 봐도 제대로 된 집단은 아니니까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요.”

촤악-

릴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었다.

그 햇살을 받으며 릴이 기분 좋게 눈살을 찌푸린 후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이상적인 영웅을 원합니다. 지금 사람들의 머릿속에 레오는 그런 영웅이죠.”

“딱히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걱정 안 해줘도 괜찮습니다.”

“음. 확실히 레오의 정신력은 대단하죠. 하지만 레오가 완전무결한 영웅으로 남는 건 내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합니다.”

“왜요?”

“난 레오를 좋아하거든요.”

내리쬐는 햇살을 등진 채 채 릴이 빙긋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후배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처음 봤을 때부터 팬이었어요.”

“영광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진지하게 다시 부탁하겠습니다.”

릴은 레오 앞에 다가오더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 들여주세요. 레오.”

릴은 경건한 얼굴로 말했다.

“…….”

‘잘 배울게요. 제자로 받아 들여주세요.’

보이지 않는 미래에 희망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어린 엘프 소녀가 떠올랐다.

‘제자로 삼아주세요.’

눈앞에 보이는 현재에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 눈을 가진 인간 소녀도 떠올랐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던 두 제자는 추구하는 것이 너무도 달랐다.

하지만.

‘강해지면 뭘 할 건데?’

카일은 두 제자에게 귀찮다는 듯 물었다.

‘조금이라도 이 세계에 보탬이 되고 싶으니까요.’

‘이 한 몸 바쳐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베르키아나 비하르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인데 말이야.’

“세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눈빛은 왜 이렇게 똑같을까?’

한치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

자신보다는 세계를 위하는 마음.

어딘지 모르게 리시나스와 닮았다고 느끼며 레오가 입을 열었다.

“가차 없을 겁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말도 편하게 할 거야.”

“괜찮습니다! 애초에 레오…… 아니 스승님은 오빠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환하게 웃던 릴이 잠시 고민하더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보니 남들 앞에서 선배인 내가 후배인 스승님께 스승님이라고 하면 이상하겠죠?”

“그냥 평소대로 해. 이참에 남들 볼 때는 말도 놓는 게 어때?”

“그럴 순 없습니다. 나이를 떠나 윗사람에 대한 호칭을 함부로 할 순 없습니다.”

릴이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군인 집안이라 서열에 굉장히 고집스러운 모습이었다.

“음. 스승님이 부담스러우면 오빠라고 부를까요?”

“더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겠냐?”

“그렇겠죠?”

릴이 고민하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럼…… 형?”

‘왜 내 제자가 되겠다는 것들은 왜 하나 같이 사고방식이 정상들이 아니지?’

레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마 루나가 있었다면 ‘네가 정상이 아니니까.’라고 대답했겠지만, 이곳에 루나는 없었다.

***

그날 아침.

레오와 릴은 교복으로 갈아입고 왕을 알현하기 위해 알현실로 향했다.

왕이 연회의 후유증을 이유로 면회를 저녁으로 미루자는 이야기를 해왔다.

오후도 아닌 저녁으로 미루자는 소식에 레오는 어이가 없음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갔다.

‘나라가 위급한데 국고를 털어 엄청난 규모의 연회를 열 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지금 볼 생각이 없다면 도움이 없는 걸로 판단하고 루메른에 복귀하겠습니다. 멸망하든 말든 알아서 하십시오.”

그 말에 비상이 걸린 신하들이 미친 듯이 움직여 가까스로 오전에 알현 약속을 잡게 되었다.

“폐하, 레오 플로브 공과 릴 루체 공이 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끼익-

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레오와 릴은 국정을 논하는 회의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나 가장 상석 위에 앉은 카넬 왕이었다.

그는 술독에 찌든 눈으로 불만스럽다는 듯 레오와 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갑소, 플로브 공. 루체 공. 헌데 연회의 피로가 풀리기도 전인데…… 이리 급하게 나를 찾다니. 급한 용무라도 있소?”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위기에 빠진 왕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언동이었다.

‘자신이 남들 위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군.’

재앙의 시대 당시에도 저런 인간은 있었다.

하는 것도 없이 그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

물론 그들의 끝은 하나 같이 좋지 못했다.

‘평화의 시대야 잠자코 지켜보고 있지.’

세상이 평화로울 때는 혈통에 딸린 부가적인 것들이 지켜줄 수 있다.

하지만 법과 사라진 세계에서 혈통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면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탐욕은 끝내버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무수히 많은 왕족과 귀족이 재앙의 시대 때 참살당했다.

‘뭐, 이후에 능력 있는 쓰레기들이 권력을 많이 잡았지만.’

리시나스가 가드스론을 다스릴 때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도시를 운영했다.

‘리시나스는 행정 능력은 물론이고 사람을 보는 눈이 소름 돋을 정도였으니까.’

사실 에레보스의 토벌이 아닌 타르타로스의 침공을 끝까지 저지할 수 있었던데 리시나스의 능력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레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다.

릴은 울컥해서 무어라 한마디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레오 때문에 참았다.

레오는 입을 열었다.

“저스티스 길드가 카넬 왕국을 멸망시키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나도 그걸 모르겠소. 정의를 부르짖는 저스티스 길드가 어째서 역사와 정통을 자랑하는 우리 카넬이 아닌 족보도 없는 데다 약소국이었던 페티먼을 돕는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이유가 있을 텐데요?”

“흥. 놈들이 요즘 영웅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걸 보면 카넬 왕국의 유산이 탐나서겠지.”

“저스티스 길드에서 탐낼만한 게 카넬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영웅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레오의 물음에 카넬 왕이 흠칫하더니 이내 머리를 부여잡았다.

“끄으- 머리가 너무 아프군. 여봐라!”

“예, 폐하!”

뒤에 있던 시종이 고개를 조아렸다.

“술독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프구나!”

“예. 곧 숙취에 좋은 음식과 음료를 대령하겠습니다.”

‘말해줄 생각이 없군.’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영웅의 무덤을 도굴한다는 놈들이 저스티스 길드였나?’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카넬 왕의 말을 들어 보니 저스티스 길드에서 이 나라에 있는 영웅의 무덤을 도굴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설마 사령왕 놈과 연관이 있나?’

이미 저스티스 길드가 상식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건 알아냈다.

그리고 그런 집단을 가장 잘 이용해 먹는 것이 바로 사령왕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저스티스 길드가 이유 없이 전쟁에 개입해서 우리 왕국을 위협한다는 거요. 루메른에 공식적인 중재를 요청하는 바이오.”

시치미를 떼는 카넬 왕을 보며 레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잠시 간의 대화를 더 나눈 후 알현실에서 나온 레오가 왼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뚜둑-

왼손에서 뼈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불게 만들까?’

무능력한 왕의 입을 불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비하르는 히어로 레코드가 탄생한 이후 카일의 페이지 중 그림자의 행적을 찢어 보관했다.

카일의 그림자로서의 행적에는 차마 잔인한 고문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비하르는 카일의 히어로 레코드 일부분을 찢어 보관했다.

후대에 스승이 나쁘게 묘사되는 걸 원치 않았기에.

레오가 살벌한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걸었다.

그 옆에 릴 역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요?”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제가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오와 릴이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구시죠?”

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제레민 카넬. 이 나라의 왕세자입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제레민이 진지하게 말했다.

“두 분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두 사람을 초대한 제레민이 향한 곳은 왕궁 바깥이었다.

마차에 탄 채 이동했다.

그런 가운데 릴이 슬쩍 커튼을 걷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왕가의 문양을 본 수도 사람들은 마차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곱지 않았다.

수도 사람들의 행색 역시 하나 같이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나라가 많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릴의 말에 제레민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죠. 이런 말씀을 드리긴 그렇지만…… 아바마마와 재상들의 폭정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심해지고 있으니까요.”

제레민의 얼굴에 착잡함이 깃들었다.

“국정 운영은 등한시한 채 사치에 빠져 있죠. 페티먼 왕국이 대대적으로 침공했을 때는 전전긍긍하며 연회를 열지 못했지만…… 어제 두 분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때까지 참아 온 걸 풀겠다는 듯이…….”

제레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부왕과 재상들을 미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뭘 설명한다는 겁니까?”

레오의 물음에 제레민이 말했다.

“저스티스 길드에서 우리 왕국을 노리는 이유. 그리고 그건 루메른에게도 혹할만한 내용입니다.”

“뭐죠?”

“저스티스 길드가 노리는 건 황천의 기사의 무덤입니다. 우리 왕국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노리는 것이지요.”

“황천의 기사의 무덤? 그건 전설 속에서만 내려오는 거 아닙니까?”

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제레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이니 확실합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요.”

제레민의 말에 레오가 생각에 잠겼다.

‘황천의 기사.’

레오 역시 알고 있는 영웅이다.

그리고 그가 남겼다는 무수히 많은 영웅의 유품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황천의 기사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유품뿐만이 아니라 쓰러트린 자들의 유품까지 빼앗았다고 했던가?’

황천의 기사는 그 이외에도 수많은 이명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영웅 황제.

또 다른 유명한 이명은…….

‘정복자.’

무수히 많은 땅을 넓히고 무수히 많은 영웅을 쓰러트려 얻은 이름이다.

그런 영웅들이 사용했던 유품까지 모두 자신의 무덤에 파묻었다고 했다.

확실히 그것들을 찾으면 루메른 입장에서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

‘루메른 뿐만이 아니지. 다른 종족들도 마찬가지야.’

황천의 기사의 손에 쓰러져간 영웅은 인간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왕가에 내려오는 비밀이라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런 전설이야 어느 왕가든 있지 않습니까.”

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레민이 웃었다.

“그건 걱정마십시오. 무덤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는 확실히 우리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음.”

제레민의 말에 팔짱을 낀 릴이 고민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수도를 빠져나가 외각 낡고 거대한 연병장 앞에 멈추었다.

“이곳은?”

“패자들의 무덤입니다.”

“패자들의 무덤?”

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레민이 쓰게 웃었다.

“네. 오래전 황천의 기사에게 패배한 영웅들의 시체를 유기했던 장소라고 합니다. 뭐, 어디까지나 전설이지만요.”

“이곳에 우리를 데려온 이유가 뭔가요?”

레오가 마차에서 내리며 묻자 제레민이 말했다.

“거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제레민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뒤를 릴이 따랐다.

주변 풍경을 한 번 둘러본 레오가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잘 들어봐, 카일.]

뒤에서 들려온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이 뚝- 멈추었다.

[영령들의 목소리를.]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리시나스?”

솨아아아아-

레오의 부름에 대답은 없었다.

그저 텅 빈 풍경만이 눈에 비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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