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
난민 도시 레이사르는 재앙의 시대 당시, 그나마 상황이 좋았던 도시 중 한 곳이었다.
도시의 규모는 당시에 명맥을 유지했던 도시 중 가장 컸으며 도시의 사정 역시 다른 도시들에 비해 나았다.
‘물자가 풍부한 도시였지. 결정적으로 창천의 수호자가 있었어.’
아르온의 스승인 창천의 수호자 아곤.
리시나스와 카일을 필두로 한 대영웅들이 두각을 드러내기 전.
세계의 희망이라 불렸던 사내였다.
아곤은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레이사르에서 고아들을 거둬들였다.
최소한 창천의 수호자 아곤이 살아 있던 시절의 레이사르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숨을 거둔 후.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되었다.
레이사르의 성주는 거리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훈련 시키고 세뇌시켰다.
오직 싸우기 위한 존재로 개조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타르타로스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훈련 과정은 간단했다.
그저 끝없이 경쟁을 시키는 것이다.
극한의 훈련을 이겨낸 아이들에게만 식사가 주어졌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상대를 짓밟고 죽이는 것도 허용되었다.
말 그대로 생지옥.
강력한 전사는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가 탄생하기는 글렀다.
‘그중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도 많았어.’
정말로 세계에 보탬이 될 법한 재능과 힘을 가진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레이사르의 영주는 오로지 그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했다.
소모품으로 전장으로 내몰린 아이들은 허망하게 죽어갔다.
증오와 원한을 품은 채.
그러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카일 레이사르의 성주를 처단하기 전까지.
‘내통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레이사르의 성주를 처단하던 중 계획한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장송의 대공 아트칸.’
사령왕의 심복.
그가 번거롭게 이런 일을 계획한 이유는 간단했다.
‘시체를 얻기 위해서였지.’
사령왕 헬 카이저가 이끄는 마족 군단, 네크로맨서들의의 주특기는 사령술.
시체를 이용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놈들이다.
그렇기에 전장 한복판에서 가장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쓰러진 동료가 언데드가 되어 살아나 자신을 공격하는 경험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놈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사기가 저하되지.’
그리고 강대한 네크로맨서일수록 살아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
‘그리고 원한과 증오를 품은 시체야말로 놈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무기지.’
고위 네크로맨서는 망자로 되살리는 시체의 능력을 살아생전 수준 이상으로 강화시킬 수도 있다.
마치 기사와 전사가 오러를 이용하여 무구를 강화시키는 것과 같다.
물론 살아생전의 시체가 너무 강하다면 그 힘을 온전히 되살릴 순 없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원한, 증오, 절망, 미움, 시기 같은 어두운 감정을 지닌 시체가 네크로맨서에게 있어 최고의 무기라면 반대로 고결함을 품은 시체는 그들이 다룰 수 없다.
망자로 되살린다하더라도 통제를 따르지 않으며 저항한다.
어떤 의미에서 무뎌빠진 무구와 같다.
당연히 시체의 힘도 끌어내기 힘들다.
‘리시나스가 빛이 되어 에레보스와 타르타로스에 맞서 싸울 때는 고결한 영웅들이 탄생했지.’
리시나스가 제시한 빛과 희망에 이끌려.
무수히 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리시나스가 특별한 이유가 그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빛과 희망이 있다며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걸 끝내 진실로 만든 리시나스는 말 그대로 세계의 구원자 그 자체였다.
용자 아르온이 용기의 상징이라면.
지혜의 왕 리시나스는 구원과 희망의 상징이다.
‘뭐, 난 평생 따라 할 수 없는 능력이지.’
어쨌든 리시나스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사령왕의 군단에 강력한 무기를 빼앗아 갔다.
그래서 장송의 대공 아트칸은 계획을 세웠다.
레이사르를 이용해 자신들이 쓸 수 있는 시체를 생산하자고.
그것이 고아병의 탄생한 이유였다.
‘고아병들이 품은 원한과 증오는 컸지.’
비록 서로를 짓밟아야 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고아병들의 유대감은 끈끈했다.
강해지기 전에 죽으면 소용없다.
그렇기에 계획을 주도한 아트칸은 고아병들이 서로를 의지할 수 있도록 세뇌했다.
배고픈 동료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내주는 경우도 부기지수다.
훈련 과정에서 스스로를 희생해 동료를 살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고아병에게 있어 서로야말로 살아가는 이유였다.
‘동료를 잃으면 잃을수록 원한과 증오는 강해지지.’
처음에는 원한과 증오의 칼끝이 향하는 곳을 타르타로스다.
‘하지만 소모품으로 전쟁에 내몰리고 죽게 되는 순간 고아병들은 깨닫게 돼.’
자신들이 그저 죽기 위한 살아온 존재라는 걸.
자신들을 수확하는 네크로맨서를 보며 원한과 증오가 폭발하는 것이다.
‘지독했지.’
카일의 제자 중 한 사람.
비하르가 재앙의 시대가 끝났음에도 결국 빛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녀석도 고아병 출신이었으니까.’
카일은 모든 것이 끝나고 제자가 빛 속에서 살기를 바랐다.
자신이 걸었던 어둠의 길을 걷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하르는 끝내 어둠 속에 남는 걸 택했고 그림자가 되었다.
‘끝내 베르키아처럼 될 순 없었겠지.’
회색빛 하늘 아래 태어나 카일의 두 제자.
그 중 베르키아는 빛으로 향했고 비하르는 어둠으로 향했다.
비하르를 떠올리며 입맛이 써지는 걸 느낀 레오는 고아병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왜 저 아이들을 제레민 왕세자께서 관리하고 있는 겁니까?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데요.”
내뿜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도타른 공작이 비밀리에 키우고 있는 이 아이들을 내가 강제로 데려왔습니다.”
“순순히 내주던가요?”
“아니. 하지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걸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분노가 깃든 제레민을 바라보던 레오가 말했다.
“이 아이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저 고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기 위해 키워졌다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존재 자체는 나라 내에서도 비밀이겠죠?”
“그렇소.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는 걸 알았다면 내가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제레민을 바라보며 레오가 고아병들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 도타른 공작이란 작자도 저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란 걸 알았다면 절대 왕세자에게 넘겨주진 않았겠지.’
일반인인 왕세자와 공작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 고아병들은 한 명 한 명이,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해. 이미 모두 오러에 입문한 상태다. 두세 명 정도는 루메른에 입학할 수준은 되고.’
카넬 같은 작은 왕국에서는 반란도 일으켜 볼법한 전력이다.
대륙 북동부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
그런 만큼 고아 수급도 손쉬웠을 것이다.
“왕세자는 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힘들지 모르겠지만 전쟁과는 먼 삶을 살았으면 좋겠군.”
왕세자는 측은함을 보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잡혀가 끔찍한 훈련을 받았다.
그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왕세자는 사람이 된 것 같군.’
방탕한 이 나라의 왕과 대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왕이다.
“정말로 황천의 기사가 남긴 유산을 루메른에 넘겨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게 뻔하지. 아무리 대단한 유산이라도 활용하지 못하면 가치가 없지 않습니까?”
제레민이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우리 왕국의 유물을 루메른에서 관리를 하면 좋지요. 게다가 열쇠를 주려면 내가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영웅 레오 플로브와 거래 관계를 유지하면 도움이 많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생각했군요.”
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레민이 빙긋 웃었다.
“저 아이들은 영웅이나 영웅담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진짜 영웅을 만나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제레민이 진지한 얼굴로 레오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레오 플로브. 저 아이들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무리 작은 왕국이라도 왕세자씩이나 되는 이가 고개를 숙이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설령 영웅의 자리에 오른 이라 할지라도.
그런 왕세자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레민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어차피 저 아이들의 존재를 안 이상. 저도 내버려 둘 순 없거든요.”
***
고아병들은 절도 있게 정렬한 채 레오와 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레오에게 향했다.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었다.
눈빛은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고아병들은 레오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나이는 평균적으로 13~14살 정도.’
아직 많이 어린 나이였다.
이 중에는 턱걸이기는 해도 루메른에 입학할 만한 수준의 이들이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겠지. 물론 성향은 루메른과 전혀 맞지 않겠지만.’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루메른에 입학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장에 가고 싶다고?”
레오의 물음에 선두에 선 소년이 대답했다.
“네. 당신이 우리를 전장에 내보내 주실 분입니까?”
소년의 물음에 레오가 피식 웃었다.
“아니.”
그 말에 소년의 눈이 꿈틀거렸다.
“너희는 대체 왜 전장에 나서고 싶은 거야?”
“우리를 이 꼴로 만든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장에는 우리 부모님을 죽인 놈들이 있다고 했어요!”
“그 새끼들 때문에 친구를 죽이고 이 자리에 왔어요!”
“죽여 버릴 겁니다!”
증오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릴이 손을 들었다.
“자자, 진정하세요. 여러분.”
“곱게 자란 댁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
그때 소년 옆에 있던 소녀가 사납게 소리쳤다.
“적들 모가지 꺾어 놓으면 오히려 댁들한테 좋은 거 아니야?”
말투가 특히 거친 소녀는 레오와 릴에게도 살기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릴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그때 레오가 피식 웃었다.
“좋아, 그렇게 원하면 보내 줄게.”
“스승님!”
릴이 당황한 목소리로 레오를 불렀다.
레오는 그럴 릴을 자신 앞으로 데려와 고아병들 쪽으로 밀며 말했다.
“대신, 너희가 이 애를 이기면 보내줄게.”
레오의 말에 고아병들의 살벌한 시선이 릴에게 향했다.
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스, 스승님. 갑자기 싸우라니요?”
“스승으로서 첫 번째 명령이야.”
“웃?!”
“이 애들을 굴복시켜.”
레오의 말에 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적인 표정이 된 릴이 고아병들 앞에 섰다.
“덤비세요.”
그 말에 선두에 선 소년과 소녀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건 소녀였다.
손에 쥔 단검을 휘리릭- 돌리며 묘기를 선보인 소녀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귀족 언니.”
그런 소녀를 보며 릴이 말했다.
“누가 혼자서 덤비라고 했습니까?”
“뭐, 혼자서 우리 둘을 상대하겠…….”
“여기 있는 전원, 한꺼번에 덤비세요.”
“뭐?”
고아병들은 모두 벙찐 표정을 지었다.
릴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알려주겠습니다.”
***
‘굴복시키라고 하긴 했지만 한꺼번에 모두 상대를 하려고 하다니.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스케일이 크단 말이야.’
릴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레오가 뒤돌아섰다.
레오가 릴에게 고아병들을 맡긴 이유는 간단했다.
‘몇 살 위의 또래가 상대하는 게 가장 좋지.’
겉모습은 어떨지 몰라도 레오는 고아병들과 정신적인 나이차가 너무 심했다.
‘교감을 하는 건 또래에게 맡기는 게 좋지.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릴의 가치관은 고아병들과 완전히 다를 테고.’
어둠을 아는 사람은 어둠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빛을 산 사람은 어둠을 이해하기 힘들다.
‘저런 애들은 자신과 다른 사상에 정면으로 부딪쳐 깨지는 게 낫지.’
결정적으로 레오는 할 일이 있었다.
레오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이런 방식으로 육성된 고아병이 이 나라에 있다면 장송의 대공, 놈이 이 나라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소리겠지.’
레오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어렸다.
‘사냥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