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
‘상황을 정리해보자.’
패자의 무덤을 떠난 레오가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이 나라는 저스티스 길드의 위협을 받고 있고 놈들은 황천의 기사의 무덤을 찾고 있다.’
제레민 왕세자의 말에 의하면 영웅의 무덤을 도굴하는 건 저스티스 길드임이 명명백백했다.
‘두 번째. 장송의 대공은 이 나라에서 고아병을 키우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영웅의 무덤 도굴 사건과 장송의 대공은 연관이 없는 건가?’
지금의 사령왕에게 살아생전 강대한 힘을 지녔던 영웅을 되살릴만한 권능은 없다.
에레보스가 살아생전에는 그의 권능이 강력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사령왕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에레보스의 조각이 걸려.’
여름방학 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루메른을 찾았던 사령왕은 미약하게나마 에레보스의 불꽃을 사용했다.
‘조각을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할지 몰라도 전성기 시절의 권능을 손에 넣는 수준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영웅을 망자로 살려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만약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이다.
‘어쨌든 정보가 필요해.’
레오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숲속에 도착했다.
잘린 나무 밑동에 앉은 레오는 품에서 작은 포션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하늘색 액체를 바닥에 따랐다.
바닥에서 꾸물거리던 액체는 이내 쩌저적-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거울처럼 변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한 엘프였다.
[부르셨습니까, 위대한 그림자의 신이시여.]
정중하게 레오에게 인사하는 이는 북부 마탑주, 알그렌이었다.
그는 북부 마탑주이기 이전에 엘프의 그림자 군주이기도 했다.
레오는 알그렌을 보며 말했다.
“도움이 좀 필요한데.”
[예, 당장 준비시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뭐?”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말없이 알그렌과의 통신이 끊겼다.
통신 마법은 흔적이 남는다.
통신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는 그 흔적을 이용해 통신 마법을 도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알그렌이 만든 이 마법은 마력 흔적이 아예 남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되는 그림자에게는 제격인 마법이다.
단점은 연결 시간이 짧다는 것.
‘그래서 간단하게 요건만 전하려고 했는데. 무슨 상황인지 묻지도 않고 사람을 보낸다고 하다니.’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륙 북동부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건가?’
엘프 그림자들의 거점은 대륙 북부.
그리고 이곳은 동북부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알그렌은 이번 일을 파악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뭐, 사람을 보낸다고 했으니 준비되면 연락을 주겠지.’
그리고 정확하게 한 시간이 흐른 후.
알그렌은 준비를 끝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자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엄청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레오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엘프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저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기억 못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아냐스 베그스.”
“위대한 그림자의 신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기억해주신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불러주시다니!”
고개를 든 아냐스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신님. 위대하고 존귀하신 신님. 제 보잘것없는 이름까지 기억해주시는 신님. 아아, 너무 가슴이 떨려 죽어버릴 것만 같아요. 하악! 하악!”
‘머리가 맛탱이가 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째 더 심해진 것 같은데?’
“당신의 루비 같은 눈은 어찌 그렇게 고귀하고 고결한 빛을 띠는 건가요? 당신의 순결한 백발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만 같아요. 하아…… 하아…….”
숨을 고르던 아냐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님. 제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뭔데?”
“부디 당신의 손으로 뽑은 머리카락 한 올만 제게 하사해주세요.”
“뭐에 쓰게?”
“제가 만든 종교의 성유물로 삼으려고 해요.”
“뭐?”
“보세요. 아직 저밖에 입교하지 않았지만 이런 것도 만들었답니다.”
아냐스가 건네준 것은 전단지에는 [레오교에 입교해서 구원 받으세요.]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전단지 뒷면에는 레오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다.
“이런 미친…….”
광기마저 느껴졌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공식적으로 이 레오교인지 뭔지를 선포하여 진심으로 포교 활동을 할지도 모른다.
아연실색하는 레오를 보며 아냐스가 말했다.
“그리고 최근 신님에 대한 악평을 쏟아내는 자들의 명단도 모두 추렸습니다. 조만간 피의 응징을…….”
양손을 꼭 쥐고 의욕적으로 말하는 아냐스의 귀가 날갯짓하듯 파닥거리고 있었다.
“아냐스 베그스.”
“네!”
“이런 거 만들지 마라.”
“네?”
“내가 지금 처리하려는 저스티스 길드가 그런 사이비 종교 같은 집단이다. 그런데 내가 똑같이 될 순 없잖아.”
“하, 하지만 사이비 종교 놈들과 다르게 우리 교에는 실제로 신이 존재하는데요?”
그 말에 레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신이야. 인간이지. 다시 한번 말한다. 하지 마라.”
“레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아냐스의 귀가 축 늘어졌다.
마치 삶의 의미를 잃은 것만 같은 모습에 레오가 순간 위로를 해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그래도 레오님. 머리카락 한 올은 주시면 안 될까요?”
“왜?”
“컬렉션에 추가하려고요.”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자신의 고민을 무색하게 만드는 아냐스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레오는 마음먹었다.
“아냐스, 도타른 공작이 키웠다는 고아병에 대해 알고 있어?”
“네. 고아들을 모아 병사 훈련을 시켜 사병화 한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최근에는 제레민 왕세자가 도타른 공작의 산하의 고아병들을 자기 산하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림자답게 북동부 지역의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고아병과 타르타로스가 연관되었다는 것도?”
그 말에 아냐스의 안색이 돌변했다.
“도타른 공작은 타르타로스의 앞잡이입니까?”
스산한 목소리로 묻는 아냐스를 보며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놈은 자기가 이용당하는 지조차 모를 거다.”
아냐스의 반응을 본다면 고아병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아병들의 힘은 막강했다.
작은 왕국이 가질만한 전력이 결코 아니다.
‘더 자라서 단순한 병졸이 아니라 기사단으로서 면모를 갖춘다면 대륙 북동부의 판도가 바뀔 수준이 될 거야.’
이만한 수준의 전투력을 갖춘 집단을 아냐스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건 이들의 존재를 완벽하게 숨겼다는 걸 의미했다.
‘아트칸 놈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그림자들을 풀어 도타른 공작이란 자를 샅샅이 조사해.”
“타르타로스의 존재를 발견하면 사냥을 시작할까요?”
“아니. 나에게 보고해. 섣부르게 건드렸다가는 이쪽의 피해도 커질 거야.”
“레오님께서는 이 나라의 암약하고 있는 마족의 정체를 알고 계신 건가요?”
“장송의 대공 아트칸일 거다.”
엄청난 거물의 이름이 거론되자 아냐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조심히 움직여. 놈도 우리를 경계하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령왕의 심복인 만큼 아트칸도 레오가 시작의 영웅 카일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나라에 와서 고아병을 본 순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라는 걸 예상했겠지.’
하지만 아트칸은 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가늠하려고 하겠지.’
“레오님. 저스티스 길드는 어떻게 할까요?”
아냐스가 물었다.
“그림자들이 저스티스 길드에 대해 알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지금까지 저스티스 길드에 대한 그림자들의 평가는 어떻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아냐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은 북동부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분쟁 지역에서 전쟁을 조장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림자들이 놈들을 내버려둔 이유는 놈들이 배신자도 적도 아니기 때문인가?”
“예.”
아냐스가 레오의 눈을 피했다.
“그림자는 타르타로스와 관련된 일에만 나섭니다. 그림자 외에도 놈들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자들도 그들의 행위를 묵인하고 있죠.”
저스티스 길드가 세력을 키워온 과정은 간단했다.
분쟁이 잦은 지역에 나타나 전쟁을 격화시킨다.
그리고 그분쟁을 해결하고 마치 정의를 세운 것마냥 그 전쟁 피해자들에게 칭송받는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세력을 불려 왔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이들이 그들을 묵인한 이유는 그 칼끝이 자신들에게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스티스 길드는 타르타로스와의 전투에서 가장 적극적인 자들이기도 합니다.”
저스티스 길드의 칼끝이 자신들에게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르타로스와의 전투에서 방패가 되어 주며 필요할 때 자신들의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하기도 한다.
이 이해관계에 존재하기에 저스티스 길드는 지금까지 존속해온 것이다.
저스티스 길드를 배척하는 이들도 함부로 그들과 싸울 수 없었다.
지금 세계에는 모든 이들의 목표를 한곳으로 모을 구심점이 없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이상 내전이 될 테니까. 그건 타르타로스가 가장 원하는 구도일 테지. 하지만’
그 정체를 안 이상 레오는 그걸 묵인할 생각이 없었다.
“저스티스 길드를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그림자들을 소집할까요?”
“아니.”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가 나선다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그림자의 인식이 더욱 나빠질거야.”
누가 뭐라 해도 저스티스 길드 대외적으로 정의를 표방하는 집단이다.
그런 이들을 지워 버린다면 새로운 오해를 낳을 게 될 게 분명했다.
여름방학 직전 멜리나의 선언으로 그림자는 영웅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의 선언이 있었다고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쉽게 바뀔 리 없다.
“앞으로는 너희가 하기 나름에 달렸어.”
“저희가 하기 나름이요?”
“그래. 나는 그림자라는 말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네?”
“세계를 위해 싸운 이는 모두가 영웅이다. 너흰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해. 그러니 너희가 그림자 아닌 영웅이라 불리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
“레오님…….”
아냐스가 입을 가리고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세상을 꿈꾸셨다니…… 그런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니…….”
감격하던 아냐스가 양손을 모으더니 레오를 향해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발 신으로 섬기게 해주세요.”
“절대 하지 마라.”
레오가 인상을 쓸 때였다.
스윽-!
나무 그림자에서 한 사람의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냐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냐?”
“보고드립니다.”
그림자인 그는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카넬 왕국과 페티먼 왕국의 국경에서 거대한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페티먼 왕국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 거야?”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자 그림자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누군가 단신으로 페티먼 왕국군을 공격했고 그에 저스티스 길드가 그에 응전한 상태입니다.”
“영웅 길드가 나설 정도라면 굉장한 강자라는 의미일 텐데? 누구지?”
아냐스의 말에 그림자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현재 저스티스 길드와 교전 중인 자는 철혈의 마법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냐스의 얼굴이 굳었다.
“철혈의 마법사……? 티아르?”
아냐스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레오의 얼굴도 굳었다.
레오 역시 교과서에서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엘프 영웅 철혈의 마법사 티아르.
타르타로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위대한 영웅.
그러나 별의 마법으로 너무 잔인한 마법을 만들어 엘프 사이에서는 배척 받고 있는 영웅이기도 했다.
그리고 철혈의 마법사가 활동한 시기는.
‘1000년 전 영웅.’
레오는 자신이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되었음을 느꼈다.
‘사령왕, 놈은 영웅을 언데드로 부활시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