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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476화 (476/483)

476.

휘오오오오오-!

메마른 바람이 평야를 가로지른다.

피와 살점이 분쇄되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으며 곳곳에 부서진 무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참혹한 전장의 한복판 갈색의 로브를 걸친 엘프 여인이 바닥에 무릎 꿇은채 웅얼거리고 있었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저벅- 저벅-

순백의 갑옷과 로브를 입은 이들이 그 엘프 여인을 향해 다가섰다.

“화려하게 해주었구려.”

선두에 선 마법사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철혈의 마법사 티아르님이 맞소?”

인자한 느낌을 주는 늙은 마법사의 물음에 엘프 여인, 티아르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언은 긍정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런데 허참. 그거 신기한 일이구려.”

늙은 마법사가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철혈의 마법사는 1000년 전 영웅. 그런데 갑자기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 말에도 티아르는 머리를 쥔 채 웅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아, 당신이 철혈의 마법사 본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오.”

늙은 마법사의 말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지금 시대는 용자 아르온, 성운의 시조 루나,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이 재림하는 시대니까요.”

그 순간.

멍하게 같은 말만 내뱉던 티아르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뭐라…… 고?”

넋이 나간 얼굴로 티아르가 기사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그분들이…… 그분들이 그럴 리 없어…… 그분들은 나와 같을 리 없어…… 나처럼…… 추악할 리 없다고…….”

망가진 인형처럼 또다시 넋두리를 내뱉기 시작한 티아르를 보며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정령사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당신과는 다르지. 그분들이 다시 이 땅에 드러낸 건 위대한 신의 뜻.”

정령사 여인의 얼굴에 혐오감이 깃들었다.

“사악한 타르타로스의 흑마력으로 되살아난 당신과는 명백하게 달라.”

하지만 그 말에도 티아르는 ‘그럴 리 없어.’라는 말만 내뱉었다.

그런 티아르를 보며 순백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말했다.

“이만 편히 잠들게 해주겠소, 과거의 망령이여.”

화르르륵-

마법사의 손에서 거대한 화염이 터져 나왔다.

“과거 그대가 이룬 위업을 생각해 편히 눈감게 해주겠소. 다만…… 그대의 이름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겠구려.”

늙은 마법사가 진중하게 말했다.

“영웅은 세계를 이끌어가기 위해 선택받은 존재. 간악한 사령왕의 마수에 놀아난 영웅은 용납할 수 없지.”

애초에 엘프 사이에서도 철혈의 마법사 티아르는 이단으로 취급받는 영웅이다.

“이 일을 계기로 역사의 페이지에서 그대의 이름을 지우겠소.”

콰가가가강-!

강력한 폭발과 함께 화염이 솟구쳤다.

거대한 불기둥을 뒤로 한 채 늙은 마법사는 하얀 로브를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모든 건 정의의 이름 아래.”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났네.”

정령사 여인, 화이트 인페르노라는 이명을 가진 영웅, 켈레니가 코웃음을 쳤다.

“한때 영웅이었다고 해도 이제는 사령왕의 손아귀에 넘어간 가련한 영혼. 진짜 영웅인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하지.”

“네르기안 경의 말이 옳네.”

영웅, 섬광의 송곳 네르기안의 말에 정화의 지팡이 노게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영웅으로 저스티스 길드의 일원이었다.

“훗, 철혈의 마법사를 쓰러트린 공이라면 충분히 퀸 클래스로 진급할 수 있겠지?”

“공적을 세운 건 노게른님이다만?”

“아, 몰라. 몰라. 함께 처리한 거잖아?”

“공적을 독차지할 생각은 없소. 다만 아무리 과거의 영웅이라고 해도 망자 따위를 쓰러트린 걸로 진급을 할 수 있을는지.”

“이 정도면 충분히 길드의 위상을 드높였다고 생각하는데? 호호호호!”

웃음을 터트리는 켈리니를 보며 네르기안이 혀를 찼다.

그렇게 한 눈이 팔린 두 동료를 보며 고개를 젓던 노게른이 멈칫하며 앞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레오 플로브.”

“뭐?!”

“레오 플로브라고 했소?”

켈레니와 네르기안이 경악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레오 플로브가 세 영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건방진 애송이가 죽고 싶어서 이곳에 왔나 보네?”

“길드원들의 원한, 잊지 않겠소.”

“이상하군. 나는 저스티스 길드의 길드원을 죽인 적이 없는데?”

레오의 말에 노게른이 말했다.

“우리가 페티먼 왕국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가 모른다고 생각되진 않구려, 레오 플로브.”

늙은 마법사 영웅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레오 플로브, 저스티스의 길드장. 라이트 씨커는 그대의 적대 행위에 매우 유감을 드러냈소.”

“유감을 드러낼 것까지야.”

레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대를 저스티스 길드에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마음도 크다고 했소. 그대가 길드에 가입한다면 퀸 클래스의 지위를 보장한다고 했소. 또한 길드원을 살해한 것 역시 눈 감아 준다고 했소.”

“노게른, 그게 정말이야?! 용납할 수 없어! 저 따위 외부인에게 퀸 클래스라니!”

“그렇소! 길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에게 퀸의 자리는 과분하오!”

켈레니와 네르기안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반발했다.

퀸 클래스.

그것은 간부의 자리였다.

저스티스 길드는 길드장을 킹이라 부르며 길드를 좌지우지하는 간부들에게 퀸의 칭호를 부여했다.

영웅에게는 기사는 나이트, 마법사는 룩, 정령사는 비숍의 칭호가.

일반 길드원들에게는 폰의 칭호를 부여했다.

퀸 클래스는 차기 킹의 후보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길드에 가입한 후 활약을 해야만 올라설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자리를 길드와 적대하는 애송이에게 부여한다니!

“이건 길드장만의 뜻이 아닐세. 모든 간부들의 뜻이기도 하지. 그리고 레오 플로브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어.”

노게른의 말에 레오가 입을 열었다.

“그 퀸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가치가 있나?”

“가치가 있소. 계급에 따라 훗날 우리 길드가 세우게 될 나라에 영토를 받을 테니.”

“나라?”

“그렇소. 우리 저스티스 길드는 영웅이 다스리는 새롭고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 계획이오.”

“영웅이 세운 영웅 국가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는데 새로울 게 있나?”

“다르오. 영웅이 곧 법인 국가를 만들 계획이오.”

“…….”

“영웅은 신의 대리인과 같은 존재지. 오직 특별한 자만이 영웅이 될 수 있지. 그렇다면 세상을 다스릴 권리도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노게른이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반인들을 빛으로 인도할 자격과 의무가 우리에겐 있소.”

“일어나지도 않아도 되었을 전쟁을 굳이 일으켜 억지로 카르마를 쌓아 영웅이 되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없나?”

“없소. 그들의 희생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발판이 될 테니까.”

레오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생각하는 영웅이랑은 다르군.”

“그대가 생각하는 영웅은 무엇이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싸울 수 있는 사람.”

“코흘리개나 할 법한 소리로군. 그건 세상을 너무 모를 때나 내뱉을 수 있는 망상이오.”

“망상이든 아니든 최소한 너흰 영웅이 아니야.”

레오가 싸늘하게 말했다.

“자신이 대단하고 특별하다고 느끼는 얼간이들일 뿐이지.”

“그대의 사견은 필요 없소. 우리가 영웅이라는 건 히어로 레코드, 신들이 증명하기 때문이오.”

“그 신들이 등신들이겠지.”

레오는 신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다.

올곧고 질서를 추구하는 신이 있는가 하면 혼돈을 추구하는 신도 있다.

순수하게 재미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들.

그런 신들이 하계를 지켜보고 있다면.

‘저런 것들이 영웅이 되어서 꼴깞떠는 꼴을 보는 것도 그런 신들에게는 충분히 유희가 되겠지.’

레오의 말에 노게른이 차갑게 대답했다.

“신성 모독을 하지 마시오. 그리고 우리 길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예정된 길은 파멸뿐이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사냥당해 죽을 수도 있소.”

노게른의 말에 레오가 팔짱을 꼈다.

“나한테 덤비기 전에 뒤를 먼저 신경 쓰는 게 어때?”

“뭐라……?”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각-!

높이 치솟았던 불기둥이 사라지고 검붉은색 마법진이 허공에 솟았다.

전율스러운 마력에 저스티스 길드의 영웅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말도 안 돼!”

“과거의 망령 따위가 저런 거대한 마력을 지녔을 리가!”

켈레니와 네르기안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는 그 마법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게 별의 마법이라고?’

레오조차도 섬뜩함이 들 정도로 일그러진 마법이었다.

철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은 영웅 마법으로 남아 루메른에도 전해졌다.

하지만 강력한 위력에 비례하는 그 난해한 술식 난이도 덕분에 기피되는 마법 중 하나다.

‘사용자라고 해봐야 엘레나뿐이고.’

고약한 심보를 가진 루메른의 마법학과 4학년, 엘레나 제르온을 떠올랐다.

‘엘프들 사이에서 왜 이단으로 배척받는지 알겠군.’

티아르의 마법은 증오로 가득했다.

‘저 정도의 증오라면 사령왕 놈에게는 이상적인 언데드 재료였겠지.’

레오가 인상을 쓸 때였다.

“네르기안 경! 켈레니! 진영을 갖추시오!”

노게른이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저 망령을 척결해야 하오!”

그 말에 네르기안이 오러를 일으키고 켈레니가 정령을 소환했다.

“영웅의 이름을 더럽히는 저 망령에게 진짜 영웅의 힘이 무엇인지 알려주겠소!”

***

재해와도 같은 영웅의 싸움이 끝이 났다.

초토화된 싸움터 한복판.

“빌어먹을…… 감히…… 감히…… 더러운 망자 따위가……!”

하반신이 사라진 노게른이 힘겹게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그런 노게른을 끝장내기 위해 티아르가 다가왔다.

터벅-

그런 노게른 앞에 레오가 걸어왔다.

“레, 레오 플로브. 도, 도와주시오……!”

그 말에 레오는 싸늘한 눈으로 노게른을 내려다보았다.

“우, 우리는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영웅…… 간악한 타르타로스의 언데드와 맞서 싸우는 데 힘을 합하는 게 옳지 않겠소?”

그런 노게른을 내려다보던 레오가 티아르 앞으로 걸어갔다.

“이익! 이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가! 살려……! 살려줘! 나는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죽을 존재가 아니란 말이…… 커헉!”

분노하며 목숨을 구걸하던 노게른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저스티스 길드의 세 영웅이 쓰러지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철혈의 마법사와 세 영웅의 역량 차이는 너무도 컸다.

‘뭐, 만들어진 영웅의 한계겠지.’

카르마를 쌓아 만들어진 그들과 다르게 눈앞의 마법사는 진짜 영웅이다.

비록 사령왕의 술수에 의해 망자가 되어 살아났고 세상을 향해 끝없는 증오를 불태우고 있다고 해도 눈앞의 영웅이 쌓아온 노력과 업적이 진짜라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레오는 티아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세상을 향한 증오뿐.

사령술에 의해 되살아난 망자는 모두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증오를 품고 있다.

레오 역시 무수히 많은 망자를 처리했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근본적으로 달라.’

마법사는 상대방의 마법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철혈의 마법사의 마법은 그 자체만으로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레오가 알고 있는 한 이 세상의 모든 엘프는 루나를 존경한다.

그녀가 남긴 별의 마법을 몹시 소중히 여긴다.

마법이란 곧 마법사의 마음이니까.

루나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함부로 더럽히는 행위는 루나를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 된다.

‘이 녀석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테지.’

고오오오오-!

“아이젠 언 블루트.”

티아르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철과 피로 상대방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마법.

티아르에게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자 하는 증오만 남았을 뿐.

‘이걸 내버려 둘 순 없어.’

증오에 가득 찬 언데드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살육을 일으키는 재앙이다.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눈앞의 모든 것을 죽이는 걸 멈추지 않을 게 분명했다.

‘쓰러트린다.’

레오가 마력을 일으키는 순간.

화악-!

순간 레오의 손에서 칠흑의 마나가 일어났다.

“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마나를 보며 레오의 얼굴이 굳었다.

‘폭주?’

일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나는 폭주하지 않았다.

레오가 다급히 티아르의 마법을 피한 후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오른손에서 흘러나오는 칠흑의 마나를 내려다보았다.

‘리시나스의 마나?’

느닷없이 발현된 리시나스의 마나를 보며 레오가 당황하는 순간.

칠흑의 마나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화악-!

“큭?”

레오가 눈을 감았다.

“부디…… 다음 생에는 편안하기를.”

전장의 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은 리시나스가 기도를 하고 있다.

그녀의 주변에는 순백의 영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령왕이 조종하는 수천의 데스나이트 부대를 쓰러트린 후 영령술사로서 그들의 넋을 기리던 리시나스의 모습이었다.

화악-!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칠흑의 마나는 순백의 영력이 되어 있었다.

레오는 멍한 얼굴로 물었다.

“녀석을…… 구원하라고?”

우웅-!

레오의 물음에 답하듯.

리시나스의 영력이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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