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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2화 (2/189)

< 2회차 인생 >

본능적으로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깨달았다.

‘내가 유사 이래 최고의 행운아가 될 거라고?’

가벼운 흥분이 밀려들었다.

“그 행운이란 것이 사기만 하면 로또 1등, 찍기만 하면 시험 만점, 길 가다가 돈벼락을 맞기는 예사고, 뭐 그런 겁니까?”

[하하하, 살다 보면 어쩌다 그런 횡재를 얻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매번 그런 일만 바라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 인세(人世)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묻는 겁니다.

[네가 천벌을 받았을 때 말이다. 하는 일마다 번번이 훼방을 받았었지? 하지만 이번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오!

[좋은 인연이 모이고, 거기에서 크고 작은 기회가 생기고, 때마침 운까지 따라주면 제법 살맛이 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운(大運)이니라.]

염라대왕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부디 인연을 신중히 맺거라. 인세(人世)의 운이란 본디 인연에서 유래하는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굽혔다.

뼈에 새겨지는 말이었다.

난 정말 인복이 더럽게 없었다.

[다음 생은 어찌 살고 싶으냐?]

지난 생에는 누리지 못했던 걸 누려보고 싶다.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내 이름 석 자 걸고 살아보는 양지의 삶.

겉으로 드러난 흉터 때문에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를 받지 않는 건강한 몸.

어려서부터 부모 사랑 듬뿍 받고 커서는 처자식과 알콩달콩 사는 단란한 가정.

날 때부터 금수저 하나 물고 있으면 더 좋고.

[어떤 복을 원하느냐?]

염라대왕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부귀, 공명, 출중한 재능, 잘생긴 외모, 아름다운 여자, 귀한 자식, 건강과 천수. 어디 골라보아라.]

“감사합니다.”

온몸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난 억울하게 받은 천벌과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약자 주제에 시시비비를 따지겠다는 것 자체가 객기다. 청구는 명분이 있을 때가 아닌 상대를 감당할 능력이 있을 때나 하는 거지. 난 지금 선처를 바라야 하는 처지다.’

염라대왕은 일방적으로 내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갑이다.

“염라대왕께서 괜찮다 싶은 것으로 골라 주십시오. 믿고 따르겠습니다.”

[음, 내세(來世)의 복이라면 다들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던데. 정말 내가 골라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어련히 잘 골라주시려고요.”

[하하하, 현명하다. 좋다. 아주 좋다!]

염라대왕이 탁자를 탕 두드리며 시원시원하게 선언했다.

[내 이름으로 책임진다고 약속했느니라. 아까 말했던 복, 전부 챙겨주도록 하마! 물론 모두 최고 등급으로.]

말 그대로 횡재(橫財)였다.

내가 직접 골랐다면 몇 개는 포기해야 했을 텐데, 오복(五福)을 전부 얻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흐음, 헌데 표정이 왜 그러한가? 무엇이 마음에 걸리느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떼었다.

“외람된 말이오나 지난 생에 미련이 남아서 그러합니다.”

[미련이라. 양아들 쪽인가, 부모 쪽인가?]

“둘 다입니다.”

하늘도 끊어내지 못할 깊은 인연이 셋 있다지.

사람들은 그것을 천륜이라 일컬었다.

부모, 부부, 자식과의 인연.

나는 그중에 부부의 인연은 없었으니, 남은 두 인연에 미련을 둘 수밖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저승이 아니라면 달리 만날 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내 나이 일곱 살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차씨 성을 썼다는 것만 알 뿐, 평생 단 한 번도 못 만났다.

그렇게 부모님은 내 평생의 그리움이자 한이 되었다.

[으음.]

하지만 어째서인지 염라대왕은 곤란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털썩.

나는 무릎을 꿇었다.

“부디 불쌍한 영혼을 위해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어주십시오. 자비를 구합니다.”

이걸로 부족하다면 오체투지(五體投地)할 의향도 있었다.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리다가 소중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건 못난 사내나 할 짓이니까.

난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는 사람이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치르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는 겁니까?”

딱.

염라대왕이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러자 망자(亡者)의 시간이 멈췄다.

*

염라대왕은 차정혁을 데려온 저승사자에게 말했다.

[차사야.]

[예, 대왕.]

[난 저놈이 인세에 다시 나오기 힘든 최고급 보석처럼 보이는구나.]

저승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왕께서 한낱 인간의 영혼을 이리 극찬하시다니!’

차사 생활 삼만 년 만이었다.

저승사자는 동그래진 눈으로 차정혁을 다시 보았다.

[대왕, 진심이십니까?]

[물론이다.]

염라대왕은 말했다.

[매국노에게 내려지는 천벌에 대해 알고 있겠지.]

[예, 저승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끔찍한 형벌을 인세(人世)에서 치르게 되지요.]

[온갖 장애와 병마, 배신과 사기, 이유 없이 쏟아지는 비난과 굴욕. 거기에 가난과 박복함까지.]

말 그대로 산지옥을 겪어야 한다.

[천벌 받은 놈들의 말로는 대개 비슷하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팔자를 핑계로 온갖 죄를 또 짓는다. 한마디로 구제불능.]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놈은 달라. 부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거늘. 저놈은 천벌마저 이겨내고 스스로 천국행 표를 끊었다.]

인생은 본래 자업자득이거늘.

[허락된 재물은 검은돈뿐이었고, 얽히는 인연마다 악연뿐인 인생이었을 텐데. 그놈 재주 한번 참으로 좋구나.]

염라대왕은 손깍지를 낀 채 턱을 괴었다.

차정혁을 바라보는 눈길이 뜨거웠다.

[이대로 기억을 전부 지우기엔 너무 아깝다. 도로 원석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대왕, 환생하는 인간의 기억은 반드시 지워야 합니다. 그것이 저승의 율법입니다!]

저승사자는 기겁하여 외쳤다.

[아니 됩니다! 작은 호기심 때문에 대죄를 지으시렵니까!]

[대죄? 그건 자네가 구국의 영웅을 매국노로 잘못 분류해 처리한 일을 말하는 거겠지.]

[끄응······.]

[책임지고 똑바로 수습해야 하지 않겠나?]

저승사자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침 이번 일을 수습할 좋은 방법이 있도다.]

염라대왕이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다시금 망자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염라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너의 원을 들어주겠다. 네 부모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정말입니까?”

[양아들과의 인연도 이어 주마. 이번엔 네 친아들로.]

“감사합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뻤다.

무려 45년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뵐 수 있다는데!

상상으로만 그려오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데!

내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데!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딱.

염라대왕이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러자 황금빛 광채가 내 몸에서 번쩍 터졌다.

[거기에 나 염라의 이름으로 네게 특별한 눈을 선물하지. 부디 유용하게 쓰길 바란다.]

특별한 눈?

[하나 더. 몰랐던 모양인데, 사실 넌 재벌 3세였다. 단지 천벌을 받아 못 누렸을 뿐.]

“네?”

[네 모친께 직접 물어보아라. 네 아버지가 누구인지.]

잠깐만요!

[이번엔 외가도 한번 찾아가고.]

웨이러 미닛!

[그럼 2회차 인생, 행복하게 살다가 백 년 후에 다시 보자.]

휘이잉!

염라대왕이 소매를 떨치자 광풍이 나부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회오리에 휩쓸렸다.

날 데려왔던 저승사자도 비명을 지르며 같이 뱅글뱅글 빨려들어갔다.

[저건 네 수호신. 덤이다.]

그게 저승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허억!”

꽉 막혔던 숨이 터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불 밖 차가운 공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윽! 머리야!”

지독한 두통에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죽을 때 주마등으로 보았던 52년 치 기억이 폭포수처럼 흘러들었다.

살면서 대충 스쳐봤던 전단지, 신문, 티비, 책 문구까지 뇌리에 강제로 새겨지는 것 같았다.

밀려드는 정보가 너무 방대했던지라 눈앞이 어질어질했고,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허억, 허억, 허억······!”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머릿속도 뒤죽박죽이었다.

염라대왕의 말을 끝으로, 지독한 두통은 끝났다.

‘조실부모하여 사고무친인 줄 알았더니, 내가 재벌 3세라고? 게다가 나한테 외가도 있었어? 대체 어머니는 왜 내게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었던가.’

어쨌거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누구도 날 찾아오지 않은 것이 팩트.

고아원에도 못 들어가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상상 이상으로 외롭고 잔혹한 뒷골목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물어봐야지.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어디 계시지?’

나는 어머니를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창밖에 비추는 어스름한 달빛에 방 안이 새파랗게 빛났다.

꽃무늬 벽지에 알루미늄 샷시, 누런 싸구려 장판과 알록달록한 호랑이 담요, 비닐 장롱과 접이식 철제 밥상.

거기에 형광등 줄에 달려 있는 전등 스위치까지.

“어······?”

이곳이 어딘지 깨닫자, 소름이 쭉 끼쳤다.

‘여긴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살던 구로동 판잣집이잖아?’

기억 속 그대로였다.

다만 이곳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강제 철거되어 사라진 지 오래일 터였다.

눈길이 벽에 걸린 일력(日曆)에 닿자 순간 멈칫했다.

“······!”

내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

난 일곱 살이던 이날 어머니를 잃었다.

‘설마 2회차 인생이라는 게 환생이 아니라 회귀였나? 그럼 난 지금 어머니를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서······.’

당장 이불을 들추었다.

“엄마!”

어머니는 새우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작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리운 어머니 냄새와 함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 2회차 인생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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