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4화 (4/189)

< 빽을 쓰다 >

‘아무래도 이건 어머니께 물어봐야 할 것 같군. 차씨 집안 남자가 한두 명도 아니고.’

입맛이 씁쓸하다.

담배가 당긴다.

“어이, 꼬맹이. 그렇게 계속 입술 깨물고 있다간 피 본다.”

옆자리에 앉았던 주인집 철구 아저씨가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오늘만 봐준다.”

“됐어요. 울어서 엄마를 살릴 수 있었다면 진즉에 대성통곡했어요. 하지만 운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면 또 모를까.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돈? 병원비 때문에 그래?”

“아뇨. 당장 부탁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원래 부탁에는 성의가 수반되어야 하는 법이다.

어머니 가방을 챙겨오긴 했는데, 고작 9,850원밖에 없어서.

“그게 뭔 소리야? 부탁이라니?”

“담당의에게 두둑한 성의를 찔러주려고요.”

“······.”

철구 아저씨는 두 눈을 꿈뻑거렸다.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물고 있던 담배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이 양반 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며 자기 위안에 그치거나, 온갖 신을 찾으며 기도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쉽고, 빠르고, 확실하죠.”

나는 손가락을 비비며 씩 웃었다.

“인생사를 매끄럽게 처리하는데 이만한 윤활유가 어디 있겠어요.”

툭.

철구 아저씨는 물고 있던 담배를 툭 떨어뜨렸다.

“그런 의미에서 돈 좀 빌려주··· 으겍!”

철구 아저씨가 내 양 볼을 잡고 사정없이 옆으로 쭉 늘렸다.

“으갸갸악······!”

“어디서 뇌물로 매수하겠단 소리를 해?”

“갸으아앗······!”

나는 얼얼한 볼을 마구 문지르며 최대한 멀찌감치 물러났다.

“병원에서는 담당의가 하느님이고, 부처님인 거예요. 우리 엄마 목숨줄이 누구 손에 달렸는데요?”

“끄응.”

“돈으로 정성과 성의를 살 수 있으면 사야죠. 연탄가스 후유증이 끔찍하다잖아요.”

어머니가 집중치료실에 들어가 있는 나보다 철구 아저씨가 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이게 일곱 살 먹은 꼬맹이가 할 소리냐?”

“그럼 연탄가스에 중독된 꼬맹이 앞에서 간접흡연은 좀 삼가달란 부탁이라도 할까 봐서요?”

나는 철구 아저씨가 툭 떨궜던 담배를 주워 들고 후후 불어 먼지를 날렸다.

딱 불곰같이 생긴 철구 아저씨는 크흠, 헛기침했다.

“그냥 물고만 있었던 건데.”

벌컥.

그때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의사가 나왔다.

우리는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의사가 말했다.

“10분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 엄마 살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난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누가 내 어깨를 단단히 붙들기에 돌아봤더니, 철구 아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것 봐라. 어머니는 무사하실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말했잖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의사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병원은 최신식 고압 챔버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최고의 의료진들이······.”

의사는 말을 길게 늘이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훑어내렸다.

나는 병원 담요를 둘둘 두른 채 한겨울에 맨발에 내복 차림이고.

철구 아저씨는 추리닝에 낡은 항공점퍼를 걸치고 꼬질꼬질한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은 상태.

의사의 말이 점점 차가워졌다.

“원무과에서 치료비부터 접수하세요. 그럼 환자 바로 일반병실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가 집중치료실에 들어간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한쪽 입꼬리가 저절로 파르르 떨렸다.

‘설마 돈 없어 보인다고 고압 산소 치료를 대충 끝내려는 건가?’

사실 일산화탄소 중독의 유일한 치료는 100% 순도의 산소를 고압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4기압의 산소 농도에서 1~2시간 놓아두고 치료한다.

하지만 고압 산소 치료에도 돈이 든다.

아마도 우리같이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은 그 돈조차 내지 못하고 많이들 튀었나 본데.

이 근방은 공장단지였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는 대개 깃털처럼 가벼웠으니까.

죽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면 병원은 의료 사고나 의료진 과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결국 후유증은 환자의 몫이 되고 만다.

‘행여나 어머니께서 일산화탄소 중독 후유증으로 고생하게 되면 곤란해지는데.’

한번 망가진 뇌는 제 기능을 되찾기 어렵다.

일산화탄소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적혈구의 헤모글로빈 결합력이 산소보다 약 200배 강하기 때문이다.

일산화탄소 혈중 포화도가 55~57% 수준이면 전신마비와 신경세포 사멸이 시작되고, 60%를 넘으면 산소부족으로 사망한다.

어머니는 내질식으로 의식을 잃었을 정도였다.

이대로 내쳐져선 안 된다.

‘어머니의 후유증 여부가 걸린 이상 나도 물러설 수 없지.’

아쉽다.

내가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애라는 게.

내가 당장 쓸 수 있는 돈, 지위, 세력은 물론 무력조차 없다는 게.

‘제일 확실하고 간단한 건 담당의 윗선에 압력을 넣는 건데. 지금 나한테는 그만한 능력도, 힘도, 빽이 없으니.’

쯧.

‘어쩔 수 없지. 일단 전 재산이라도 찔러주는 수밖에.’

지금은 짜장면 한 그릇에 300원 하던 시절이다.

1만 원도 안 되는 돈은 의사를 매수하기엔 터무니없는 푼돈이지만, 그래도 성의 표시는 될 터였다.

왜냐하면 나는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애니까.

상대는 그걸 감안하고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

‘여차하면 명품 손목시계라도 내놓는다. 지금은 어머니가 먼저니까.’

하지만 철구 아저씨가 나보다 빨랐다.

아저씨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잡히는 대로 꺼냈다.

지갑에 꽂힌 아저씨의 신분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입버릇처럼 간첩 타령이나 하는 동네 백수가 아니었다고?’

철구 아저씨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 돈을 슬쩍 찔러 넣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크흠!”

의사가 노골적으로 헛기침했다.

이 돈으로는 정성과 성의를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욕심이 과하신 양반이로군. 어쩔 수 없지.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아저씨의 신분증을 꺼낼 수밖에.’

나는 철구 아저씨의 지갑을 낚아챘다.

의사가 아저씨의 신분증을 확인할 수 있도록 지갑을 쫙 펼쳤다.

“아저씨 이름이 박철구예요? 중앙정보부 요원.”

중앙정보부, 일명 중정.

80년대 안기부의 전신으로, 현재 대통령의 막강한 칼이었다.

국내외 정보를 한 손에 움켜쥐고 검찰 권력 이상을 행사하던 조직이랄까,

“너 한글도 읽을 수 있었냐? 오, 똑똑한데?”

“요즘 간첩 잡느라 바쁘시다면서요. 간첩 신고 들어오면 당장 출동하고 그래요?”

철구 아저씨는 뜬금없이 웬 간첩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눈을 반짝거리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

“만일 병원에서 간첩 신고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일단 간첩 새끼부터 잡아 족친 다음에 뒤를 탈탈 털어야지.”

“그러다 보면 괜히 죄 없는 병원까지 발칵 뒤집히겠네요.”

“간첩 혐의가 없으면 금방 풀려나.”

일단 간첩이랑 엮이기만 하면 더러운 꼴 본다는 소리였다.

70년대는 정부에서 반공을 부르짖으며 간첩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때려잡던 시대였다.

'힘없는 자의 항의는 가소로울지 몰라도 권력자의 협박은 껄끄러울걸? 중정 요원이 나서서 들쑤시면 제일 먼저 병원 장부부터 숨겨야 할 테니까. 그걸 누가 좋아하겠어.'

어차피 가동한 고압 챔버.

누구 때문에 이런 짜증나는 일이 발생했는지 되짚다가 받게 될 내리갈굼과 그깟 고농도 산소를 좀 더 투여하는 수고로움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저울이었다.

나는 탁 소리가 나도록 지갑을 접었다.

“······.”

의사가 즉시 자세를 고치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여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고압 산소 치료 시간을 조금 더 늘려야 할 것 같군요. 치료에 만전을 기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아까 받은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도로 아저씨 주머니에 푹 찔러넣었다.

“나랏일 하시는 분에게 이런 일까지 신경 쓰게 만들면 안 되죠. 약은 약사에게, 환자는 의사에게. 태성병원 의료진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의사는 중환자실 문을 열고 큰소리로 몇 가지를 더 지시했다.

“혈중 산소 농도 수치 제대로 확인하고, 링거에 영양제 하나 더 추가하고.”

“예.”

“환자분이 춥다고 몸 떠시잖아. 빨리 담요 몇 장 둘러드려. 감기라도 들면 곤란해진다.”

“예.”

즉각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이 달라졌다.

주인집 아저씨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날 내려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효과 확실하잖아요.”

협박으로 어머니의 후유증 없는 치료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데 어쩝니까.

뇌물이 안 통하면 협박이라도 해야죠.

* * *

우리는 같은 자세로 나란히 앉아 어머니의 고압 산소 치료가 끝나길 기다렸다.

철구 아저씨는 팔짱을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나는 아까 챙겨뒀던 통장을 슬쩍 꺼냈다.

‘참 알뜰하게도 모아놓으셨네.’

죽은 강우 엄마가 남긴 통장과 몹시 비슷했다.

어떤 날은 120원, 어떤 날은 90원, 또 어떤 날은 440원.

어머니는 그렇게 푼돈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었다.

통장 표지엔 정갈한 글씨체로 적어 놓았다.

<우리 정혁이 대학 등록금>

정작 나는 대학은커녕 국민학교조차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날 위해 대학 보낼 돈을 모아놓고 계셨다니.

‘강우도 제 엄마 통장을 볼 때 이런 마음이 들었던 걸까?’

어렴풋이 남의 속을 짐작하는 것과 내가 직접 몸소 겪는다는 것은 몹시 다른 일이다.

왠지 가슴 한쪽 구석이 욱신거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 통장도, 수첩도, 손목시계도 없었어. 중간에 누군가가 보석함째 빼돌렸다는 뜻이다.’

씁쓸했다.

최고급 명품 시계가 탐나서 훔쳐갔다면 이해를 하는데.

이것도 돈이라고 통장까지 털어갔다니.

‘수첩에는 이름도, 주소도, 뭣도 없는 전화번호가 딱 한 개 적혀 있고.’

어디서 많이 보던 전화번호다.

‘분명 재벌 회장님댁 집 전화번호였지?’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다.

< 빽을 쓰다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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