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15화 (15/189)

< 협상 (2) >

“서울시 땅을 담보로 이참에 크게 한몫 잡아보고 싶지 않으세요?”

내 나이보다 이런 게 중요한 거지.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흐음.”

과연. 돈 냄새를 맡았는지, 스승님이 혀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 양반, 이럴 때마저 덥썩 물지 않고 간을 본다.

“요즘 서울시에 값 안 오르는 땅이 어디 있던가? 꼬마야, 네가 걱정할 것 없다. 웬만한 땅은 내가 알아서 쓸어 담고 있으니.”

“그러시겠죠. 하지만 태성건설과 우광건설이 달려들어 키우는 판이라면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꿀꺽!

스승님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강남 아파트 분양 붐? 그래 봐야 몇 배나 더 뛸까요? 반면 이건 그런 푼돈이 걸린 부동산 투기와는 차원이 다르죠. 서울시 땅 자체가 판돈으로 올랐거든요.”

스승님의 눈이 번뜩였다.

그건 김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 2호선 공사!”

“지하철 2호선 입찰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남 개발에 따라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 필요해졌고, 지하철 1호선이 경유하지 못하는 서울 대도심의 대순환선을 구축하기 위해서. 노선 거리 총 48.8km, 예상 입찰가 약 1,800억짜리 대공사가 계획되었죠.”

“······.”

“지하철은 철도가 발생시키는 소음과 분진에서 자유롭고, 도시의 지상 기능 및 미관을 살리며, 북한의 포격이나 폭격 등으로부터 대피하는 방공호로도 사용되는 국가 중요 시설이에요.”

“······.”

“또한 서울 도심의 집중된 도로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이동 시간을 축소시키는 등 신속성, 정확성, 안전성, 대량수송성, 쾌적성, 저공해성, 저렴성 등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기에 정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는 국책사업이고요.”

“······.”

“거기에 식수와 화장실과 같은 편의시설은 물론 식량과 비상용 의복을 공급받을 수 있는 지하상가까지 들어갈 예정이죠. 즉, 근처 상권이 살아나고, 유동 인구가 폭증한다는 뜻이에요.”

“······.”

스승님은 또 저런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며 김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 비서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일곱 살 맞다니까요.”

이 양반들이 진짜 아까부터!

지금 내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래도?

“그러한 이유로 대도심에서도 지하철이 개통되는 곳, 지하철역 인근 땅값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폭등하리라 예상돼요.”

나는 씩 웃었다.

“당연히 이 시점에서 지하철 공사를 맡는 시공사의 내부 정보만 있다면? 지하철역이 어디 들어가는지 남들보다 먼저 알고, 싼값에 땅을 선점할 수 있겠죠?”

목 좋은 땅을 미리 선점하며 재산을 불리는 스승님이라면 눈 돌아갈 정도로 탐날 정보일 것이다.

정부 고위직 관료들과 정치계 인사들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이유였다.

‘과거 강남 개발 때 청와대 경호실 등 고위직 관료들이 이런 방법으로 시세 차익을 올려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제집 금고를 채웠었지.’

그걸 나도 알고, 스승님도 알고, 우광도 알고, 태성도 안다.

하지만 스승님은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내 솔직히 말하면 지하철역 인근 땅이 탐나긴 한다. 하지만 그걸 이유로 내 생돈 800만 원을 뜯어가려면 네가 아니라 우광에서 왔어야지! 안 그런가?”

우광이 지하철 공사를 맡으면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지하철역 근처 땅을 쓸어담겠다는 뜻.

김 비서는 코웃음을 쳤다.

“어르신께서는 우리 태성보다 우광이 더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고 보시는군요?”

“물론이지. 그게 사실 아닌가?”

“그럴 리가요. 이번 지하철 2호선 공사는 우리 태성이 따낼 겁니다.”

“힘들지 않을까? 이번엔 우광이 한발 빨라. 고위직 관계자들을 제대로 구워삶았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지하철 공사 수주를 누가 줄까?

바로 직접 도시 개발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고위직 관계자들이 준다.

‘우광은 군사정권 시절에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건설 실적이나 최저 공사 입찰가가 아니라 정부 고위 관료들을 뇌물로 매수해 공사를 따내려 했지.’

어차피 입찰가도, 입찰 과정도 비공개로 치러지는 일.

지금은 정보 공개 투명성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정경유착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우광이 뇌물로 공사를 따내는 것을 막으려면 그에 필적하는 무기가 있어야죠. 바로 이거요.”

나는 서류철을 좌우로 흔들었다.

우광이 살포한 뇌물의 액수와 부정청탁을 받은 고위 공직자들의 명단이 상세히 기록된 장부였다.

“지금 정부는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고자 부정척결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죠?”

정부에 보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안 그래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틀어쥔 정부인지라.

국민들에게 밉보일까 우려해 겉으로는 몹시 깨끗한 척을 했다.

일 잘하고 청렴한 정부, 경제를 살리고 국민을 위하는 정부.

부정척결은 그러한 이미지 포장의 일환이었다.

“이 일을 대통령 각하께서 아시면요? 정부가 금한 뇌물 청탁을 공공연하게 저지른 고위 공직자와 우광을 곱게 놔둘까요?”

무조건 처형이다.

국민들 앞에 보란 듯이 숙청하여 본보기 삼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외칠 것이다.

일 잘하고 청렴한 정부, 경제를 살리고 국민을 위하는 정부는 부정부패를 용납지 않으며 비리척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정작 뇌물을 뿌린 건 우광인데, 청탁을 들어줘야 하는 쪽은 이 장부를 가진 사람이겠군요.”

이를테면 고위 공직자를 협박할 무기이자, 고위 공작자를 포섭할 목줄이라는 소리.

거물들의 판에서 이보다 더 탐나는 칼은 또 없을 것이다.

여차하면 거슬리는 고위 관료들의 목을 날려버릴 칼 말이다.

“고위 관료들의 살생부. 이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공사 입찰 결과가 달라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끼가 눈앞에서 흔들리자, 스승님의 눈동자도 서류철을 따라 왔다 갔다 흔들렸다.

“아까 김 비서님께 부탁 한 가지를 할 수 있는 명함까지 챙기셨으면서. 뭘 망설이세요?”

“크흠!”

“고작 팔백만 원. 강남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는데요?”

“흥, 어림없다! 아직 가장 큰 문제가 남았거든!”

스승님은 딱 잘라 말했다.

“그 치부책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것부터가 확실하지 않은데, 내가 뭘 믿고 돈을 내줘?”

“그럼 직접 확인해 보시든가요.”

나는 여유롭게 전당포 안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할 거예요.”

“으음!”

“이 치부책을 만든 사람, 중정 요원 박철구라고 해요. 알란가 모르겠네요?”

“좋다. 잠깐 실례하마.”

스승님은 전당포 철창살을 쾅 닫았다.

그러더니 전당포 안쪽 통로로 빠져나갔다.

김 비서가 턱을 쓸면서 웃었다.

“도련님, 이건 어떻습니까?”

“······?”

“그 장부, 태성에 파시죠. 넉넉하게 1천만 원 드리겠습니다.”

김 비서의 눈은 서류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직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물건을 왜 이리 탐내나 생각했더니.

스승님과의 차이점을 깨달았다.

‘내 뒷조사를 하다가 철구 아저씨가 얻어걸린 거로군.’

아마도 김 비서는 내가 모르는 정보까지 가지고 있던 모양.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이 장부를 탐내는 것이겠지.

“도련님께서 전당포에 팔아도 결국 우리에게 들어올 물건입니다. 전 무슨 수를 써도 저걸 얻어낼 생각이니까요.”

아마 머릿속으로는 저 뇌물 장부로 우광과 끈을 대고 있는 인사들을 어떻게 흔들어댈까 그림을 그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씩 웃었다.

“그거야 아저씨 하기 나름이겠죠.”

원래 경쟁자가 많아지면 매도인이 유리해지는 법!

난 느긋한 마음으로 이 경쟁의 승리자를 기다리면 되었다.

처음부터 내 목표는 집 계약에 부족한 돈 1,800만 원을 확보하는 것이니까.

‘어이, 수호신.’

딱.

[왜? 또? 뭐? 무슨 일인가?]

‘아까 네가 했던 거 말이야. 복부인들의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도록 했던 거. 그거 한번 해봐.’

[아아, 이거 말인가?]

전당포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 * *

전당포 안쪽에 마련된 밀실.

그곳에는 비밀 서류를 정리하던 남자가 있었다.

스승님이 인상을 찌푸리며 명령했다.

“중정에 전화 넣어라. 거기 요원 중에 박철구라는 놈이 있으면 전화 바꾸라고 해.”

“예, 어르신.”

잠시 후,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어르신, 박철구라는 중정 요원은 지금 서빙고 지하실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물고문실로 끌려가? 무슨 일로?”

“우광건설의 뒤를 캐다가 걸렸다는군요.”

“으음!”

“확실한 정황이 포착되어서 끌고 갔는데, 막상 뒤져봤더니 그 기밀서류가 안 나오더랍니다. 감쪽같이 숨겨놓은 모양인데요.”

남자는 정리하던 서류 몇 장을 스승님께 내밀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지금 우광이 눈에 불을 켜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비서실 인력을 총동원해서 신문과 방송국 사람들을 만났다는군요.”

“행여 언론에 유포될까 미리 막고 있다?”

“거기에 중정 윗선도 움직였습니다. 중정 요원들이 대거 차출되어 박철구의 지인들을 잡아들이고 있다네요.”

스승님은 남자가 건넨 서류를 넘기며 뒷말을 들었다.

“용역을 시켜 박철구의 집을 뒤집어엎고, 강제철거를 시작했습니다. 아예 판자촌에 불까지 질렀답니다.”

“거슬리니까 아예 싹 다 태워 없애버리려는 수작이로구만.”

“아무래도 그렇겠죠. 집에 숨겨두거나, 옆집에 숨겨두거나. 찾아내는 것보다 없애버리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화재로 사상자가 꽤 많이 발생했는데도, 언론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것참 여기저기 잘도 구워삶았구나.”

그게 우광의 특기였다.

전방위 뇌물 살포와 더불어 여기저기 끈끈한 인맥을 형성했다.

대한민국 고질병이라는 학연, 지연, 혈연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참, 우광이 찾고 있다는 서류 말입니다. 중간에 찢어진 부분이 있다는군요.”

“찢어진 부분?”

“박철구의 책상을 뒤졌을 때 나온 게 그것뿐이랍니다. 우광이 최일태 의원에게 건넨 비자금 내역 중 일부라던데요?”

“확인해 보면 알겠지. 저게 그 중정 요원이 작성한 원본인지 아닌지.”

스승님은 남자에게서 받은 서류를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금고를 열어라.”

“예, 얼마나 내어드릴까요?”

“현금 1,800만 원.”

그간의 경험과 안목이 말한다.

저게 바로 우광과 중정이 눈 뒤집혀서 찾고 있는 원본 장부일 것이라고.

* * *

스승님이 전당포 안쪽 통로에서 나왔다.

닫았던 철창살을 도로 열었다.

물건을 넣는 틈새로 스승님의 손이 쑥 나왔다.

“8백만 원짜리 거래다. 먼저 물건부터 확인해야지.”

“원하신다면.”

나는 순순히 장부를 내놓았다.

스승님은 촤라락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멈췄다.

종이가 크게 찢어져 있었다.

그 페이지 제일 위, ‘최일태 의원’이란 글자가 눈에 밟혔다.

탁.

스승님은 장부를 덮었다.

“수완이 대단한 꼬마로구나. 좋다, 이건 팔백만 원에 사겠다. 시계, 명함, 이 장부까지, 총 천팔백만 원이다.”

두툼해 보이는 종이봉투를 내 쪽으로 슥 밀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 종이봉투를 도로 스승님 쪽으로 슥 밀어넣긴 마찬가지였다.

“성급하시긴. 아직 협상 안 끝났는데요?”

< 협상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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