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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16화 (16/189)

< 협상 (3) >

나는 서류철 끝을 잡았다.

“난 이 장부를 판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응?”

“벌써 세 번째예요. 팔백만 원짜리 볼일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이걸 팔백만 원에 팔겠다고 했어요?”

서류철의 한쪽 끝은 스승님이, 다른 쪽 끝은 내가 잡고 있는 형국이다.

그 누구도 손을 떼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담보 물건은 두 개랬어요. 시계와 명함. 그새 또 까먹으셨어요?”

“그, 그건······!”

“이건 담보 잡힐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스승님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하지만 돈이 필요해서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이걸 못 팔 이유도 없겠죠.”

나는 장부를 옆구리에 끼웠다.

엄지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참고로 저쪽 아저씨는 1천만 원을 불렀거든요.”

“······.”

스승님은 이번에도 내가 아닌 김 비서를 돌아보았다.

김 비서는 몹시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애한테 무슨 수작질을 건 게야?”

“수작질이라뇨. 그저 합당한 가격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김 비서는 씩 웃었다.

“전당포에 물건을 팔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주인의 몫이고, 저 장부는 태성이 사들일 생각입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

스승님이 입을 떡 벌렸다.

나는 손뼉을 짝짝 쳤다.

“자,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할게요.”

“경매?”

“경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건은 하나인데 원하는 사람은 둘이니,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물건 주인을 결정하는 게 제일 깔끔하지 않겠어요?”

“······.”

“어차피 이거 사서 원본은 고이 모시고, 복사본으로는 지하철 공사 입찰 경쟁사를 돌며 비싸게 되팔 작정이었잖아요.”

“아이고, 뒷골이야. 내 전당포에서 손님이 날 상대로 경매를 붙이다니, 이게 말이 되냔 말이야!”

“태성은 1천만 원인데, 송골매 전당포는요? 포기하실래요?”

“누가 포기한댔어? 천오십!”

스승님은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장부는 스승님 입장에서도 놓치기 아까운 물건일 터였다.

‘지하철 공사에 침 흘리는 건설사가 대체 몇이야? 복사본만 돌려도 본전의 몇 배는 벌어먹겠구만. 그놈이랑 쿵짝쿵짝해서 지하철역 들어설 곳을 알아내는 건 덤이고.’

눈썰미 좋고, 기회를 잘 잡는 스승님이라면 절대로 놓치기 싫은 횡재의 기회일 터.

하지만 김 비서 아저씨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천오백!”

수많은 건설사가 지하철 2호선 공사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지만, 태성과 우광은 독보적이다.

‘우광만 밀어내면 태성과 견줄 건설사가 없는데, 김 비서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 할까?’

그럴 리 없지.

차 회장님의 최측근으로 이십 년 넘게 곁을 지킨 것으로 아는데.

설마하니 총알이 없어서 쉽게 나가떨어질까.

“이익! 천오백오십!”

“천팔백!”

나는 거기서 손을 들었다.

“그럼 여기까지 할게요.”

“왜! 난 더 부를 의향이 있다만? 천팔백오십!”

“팔고 말고는 물건 주인 마음인데요?”

“······.”

스승님은 입을 뻐끔댔다.

잠시 후, 기가 차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전당포에 담보 잡히고 돈 융통하러 온 놈이 돈을 더 주겠다는데도 마다해?”

“아, 그래서 말인데요. 아까 담보 잡히려고 했던 물건, 도로 내어 주시겠어요?”

“······.”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부족한 잔금 1,800만 원을 충당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돈을 다 마련했네요? 이런 상황에서 담보를 잡혀야 할까요? 굳이?”

“허허허.”

스승님이 못 말리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가져가라.”

스승님은 아까 담보 잡히려 했던 두 가지 물건도 순순히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당포의 룰에 따르면, 담보 물건과 돈을 서로 주고받은 후에야 물건은 전당포 주인의 것이 된다.

하지만 난 아직 전당포의 돈을 받지 않았으니, 우리의 거래는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니 전당포 주인은 내 물건을 돌려줘야만 한다.

‘다행이다.’

나는 가져왔던 그대로 아버지의 시계와 김 비서의 명함을 챙겼다.

‘어머니의 추억을 팔지 않아도 돼.’

이 시계는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물건이다.

구로동 판자촌 쪽방에 세 들어 살면서도, 시장에서 야채를 내다 팔면서도, 어머니는 이 시계를 팔지 않았다.

보석함에 넣어 소중하게 간직했다.

한눈에 봐도 제법 값나갈 것 같은 시계를 팔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는 이유야 뻔하지.

‘내가 아버지의 핏줄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간직했다고 해도, 이게 어머니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물건이라는 건 변치 않아.’

집을 사기 위해서 아버지 물건까지 전부 팔아치워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여인숙에서 이걸 챙겨오면서도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팔지 않고 돈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후련할 수가 없다.

‘김 비서가 따라오지 않았다면 돈 문제를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없었겠지.’

운이 좋다.

‘김 비서는 차 회장의 용건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지만, 회장을 보필하는 최측근 비서실장이 몇 시간이나 자리를 비울 만한 일이라면 뻔해.’

바로 나 때문일 것이다.

‘차 회장에게 날 관찰하고 내린 결론을 보고하기 위해서겠지. 싹수가 어떤지.’

그러거나 말거나.

덕분에 김 비서의 덕을 톡톡히 보았으니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스윽.

나는 오는 길에 사 온 제과점 양과자를 전당포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스승님은 이건 또 뭐냐는 듯 외눈 안경을 추켜 올렸다.

“선물이에요.”

“흥, 차라리 뇌물을 찔러 줘라. 옆구리에 끼고 있는 그 장부 같은 거 말이다. 흠흠!”

“뇌물은 청탁을 위해 주는 거고요. 내가 전당포 사장님께 청탁할 일이 뭐 있겠어요? 담보 잡히고 돈을 융통한다면 모를까.”

“······.”

“대가 없이 마음으로 전하는 게 선물이랬어요. 그러니까 이건 꿍꿍이 생각하지 않고 받으셔도 돼요.”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배꼽 인사를 했다.

“건강하세요. 다음에는 양과자보다 더 좋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뵐게요.”

딸랑.

나는 등을 돌려 전당포를 나섰다.

김 비서가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나는 건물을 나선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 장부는 뇌물이에요.”

김 비서는 내가 건넨 장부를 챙기면서 묘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글쎄요. 도련님 단어 사전에 따르면 뇌물은 청탁을 위해 주는 거라는데, 전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경매가를 더 올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도 마다하고 딱 천팔백만 원만 받았잖아요. 그래서 뇌물인 거예요.”

“······.”

김 비서는 걷다 말고 걸음을 뚝 멈췄다.

“게다가 난 지금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직 돈도 안 받았는데, 장부부터 내주다니. 이보다 더 확실한 신용 거래가 또 있겠어요?”

“······.”

“그건 내 호의예요.”

이 사람은 태성그룹 차 회장이 믿고 아끼는 최측근 중 한 명이다.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때 찍어놓으면 좋다.

그의 말마따나 인생을 살다 보면 더러운 꼴을 볼 때가 있고, 그때 꺼내 들 수 있는 조커 하나쯤은 필요한 법이니까.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따내면 태성의 주가는 얼마나 치솟을까요? 사람들의 뇌리에 박아넣게 될 태성의 이름값은요?”

“······.”

“지하철 2호선 공사 예상 입찰가만 약 1,800억. 그에 비하면 뇌물 장부값 천팔백만 원은 정말 싸다, 싸! 이거 우광이 살포한 뇌물값도 안 나오겠네요.”

“······.”

“그 장부, 차 회장님께 바치세요. 나한테 뜯긴 것 이상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이건 서비스.”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래서 뇌물이라니까요.”

“하하하!”

김 비서는 처음으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이 챙겨주신 뇌물, 사양치 않고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아무렴.

이게 다 세상일을 매끄럽게 돌아가게 만드는 기름칠이란 것이지.

이보다 효과 좋은 윤활유가 또 어디 있겠어?

“그래서 말인데요. 서빙고 지하실에 끌려갔다는 박철구 중정 요원이요. 이 장부를 작성한 사람.”

“네.”

“아저씨가 꺼내줄 수 있죠?”

김 비서는 씩 웃었다.

“물론입니다. 우광건설 뒤를 캐냈다는 명백한 증거조차 없는 상황인데, 어려울 거 있겠습니까?”

이게 다 내가 원본을 빼돌린 덕분이다.

저승사자가 옆에서 엄지를 척 들었다.

‘철구 아저씨가 장부에 적힌 정치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협박부터 해 뒀으면 이런 일은 안 당했을 텐데. 쯧쯧, 거기까진 생각 못 했던 모양이지? 아니, 지금까지 복사본도 안 만들어 놓고 뭐 했대?’

촉도 좋은 양반이 손은 느려터져 가지곤.

목숨 걸린 일인데, 그동안 뭐 하다가 끌려간 거야?

“부탁드려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광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태성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이것 참 든든하구만.

역시 김 비서! 태성그룹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뒤처리하는 해결사!

“이건 도련님의 성의에 보답하는 제 호의라 치겠습니다. 받은 게 있으니 저도 서비스 드려야죠.”

오가는 성의 속에 싹트는 신뢰!

김 비서 명함을 안 써도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미리 치는 기름칠이 최고라니까.

“회장님과의 약속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김 비서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집 계약부터 서둘러 마무리 짓고 태성호텔로 이동하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 *

태성호텔 2층 커피숍은 고급스럽게 유럽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탈리아 유학파 출신인 바리스타가 주문 즉시 로스팅한 커피를 내리고, 일본에서 다도를 배우고 돌아온 다도의 장인이 도기 세트에 티를 직접 우려내었다.

“전 밀크 커피로 주시고요, 정혁이는 코코아가 좋겠지?”

“······.”

코코아라니!

이렇게 커피 향이 좋은 곳에서 코코아라니!

영국식 밀크티도 아니고, 계란 두 개 띄운 쌍화차도 아니고, 코코아?

“그나저나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마련한 거니? 전당포에 맡긴다던 시계까지 도로 가져왔는데, 무슨 수로?”

“······코코아 마실래요.”

나는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역시 이럴 땐 입 닥치고 마셔야지.

설사 구정물이나 양잿물이라도 닥치고 처먹어야 할 때란 소리다.

“설마 김 비서님께 억지를 써서 돈을 뜯어낸 건 아니겠지?”

“내가 거지예요? 강도예요? 진짜 안 그랬어요.”

맞은편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김 비서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해 주었다.

김 비서의 테이블 위에는 종이봉투로 감춘 장부가 한 부 있을 뿐이다.

갑자기 김 비서가 찻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회장님?

김 비서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아이고, 금쪽같은 내 새끼!”

헤벌쭉 웃으면서 두 팔 벌려 달려오던 남자가 날 와락 끌어안았다.

< 협상 (3)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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