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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17화 (17/189)

< 차 회장의 뜻(1) >

화염 불도저라 불리는 태성의 주인, 차태성.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건장하고 기골이 장대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떡 벌어진 어깨,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까지.

눈빛과 말에 힘이 실리는 사람이었다.

차 회장은 손을 들었다.

“여기 커피! 아니지. 쌍화차에 계란 2개 동동 띄워서 내와 봐.”

나는 단내를 풍기는 코코아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역시 코코아는 돈 주고 사먹을 게 아니다.

이왕이면 몸에 좋고 속에도 좋은 쌍화차가 낫지.

“아이고, 내 새끼! 어쩜 이렇게 성준이를 꼭 빼닮았나!”

차 회장은 날 번쩍 안아 들어서 무릎 위에 앉혔다.

“얼굴만 봐도 알겠구나. 이것저것 더 따질 것도 없다. 할아버지라고 한번 해 봐라. 내가 네 할애비다.”

솔직히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뭐지? 차 회장이라면 초면에 이렇게 반길 사람이 아닌데? 역정을 내면서 얼씬도 못 하도록 쫓아내면 또 모를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김 비서 아저씨는 몹시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어머니는 조금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호의를 보이며 반기는 사람과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방긋 웃으면서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고. 착하다. 우리 애기 이름은 뭘까?”

“차정혁이요.”

“그래그래, 차정혁이로구나. 짜잔, 할아버지가 우리 정혁이 주려고 이렇게 선물을 사 왔지.”

차 회장이 손짓하자 2미터쯤 되어 보이는 근육질 거한이 다가왔다.

양복 차림의 그는 크고 작은 선물 상자를 한가득 들고 있었다.

“내 새끼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할애비가 종류별로 준비해 봤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네 아비는 지금 외국에 나가 있어서 같이 못 왔다. 하지만 조만간 볼 수 있을 거다. 당장 가서 끌고 오라고 내가 사람을 보내놨거든.”

“정말요?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나는 신이 나서 냉큼 배꼽 인사를 했다.

‘잘됐네. 안 그래도 틈만 나면 저승사자를 족쳐서 아버지의 꿈을 들쑤시고 있었는데.’

꿈이란 게 그렇다.

그저 악몽이라 치부하고 무시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다.

하지만 차 회장이 사람을 보내 강제력을 행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는 아빠랑 함께 보낼 수 있는 거예요?”

너무 빠듯한가?

“한번 노력해 보마!”

“와! 할아버지 최고!”

나는 엄지를 척 들었다.

아버지가 새해 첫날에 비행기 추락사하는 일만큼은 확실하게 막고 싶었으니까.

차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장난감을 너무 많이 사 왔나? 고 실장, 그거 저쪽 테이블 위에 올려두게.”

“예, 회장님.”

“정혁아, 저기서 선물 뜯어보고 있으련? 나는 네 엄마와 잠깐 대화를 나눠야겠구나. 김 비서는 선물 개봉하는 것 좀 도와주고.”

“예, 회장님.”

나는 옆 테이블로 옮겼다.

물론 단내 폴폴 풍기는 코코아는 이때다 하고 두고 왔다.

스윽.

나는 선물 상자를 김 비서 앞으로 밀어 넣었다.

“할아버지 말씀 들었죠? 이거나 까고 있으세요.”

“······.”

내 온 눈길과 신경은 전부 저쪽 테이블에 쏠려 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저승사자가 스르륵 연기처럼 나타났다.

‘도청 시간이다.’

[굳이?]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

[······.]

저승사자는 이제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당연한 듯 소리를 높였다.

어째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었다.

* * *

차 회장은 손목시계를 슬쩍 봤다.

“미리 보고를 받았으니 자세한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5분이면 되겠지.”

어머니에게 내어줄 시간이 고작 5분이라는 소리였다.

“그간에 있었던 구질구질한 사정 따윈 관심 없다. 저 애가 내 손자라는 게 중요하고, 앞으로 내 새끼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차 회장은 뜨거운 쌍화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바르르 떨다가 옆에 놓인 얼음물을 또 벌컥벌컥 마신다.

아그작아그작 얼음을 씹으며 차 회장이 물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다 살아났다면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네. 말씀드렸다시피 아이의 존재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정혁이도 곧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아직 호적에 오르지 못했어요.”

“그러고 보니 친정과 인연을 끊었다지.”

차 회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차씨 집안 호적에 올려주지. 자질구레한 일은 전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건 그렇고.”

차 회장은 말했다.

“아이를 앞세워서 차씨 집안에 발을 들이려는 셈인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성준 씨가 우광그룹의 따님과 약혼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사업상 얽혀 있는 것이 많아. 재벌 간의 혼약은 사업상의 이유로 깨어지면 깨어졌지, 감정상의 이유로는 깨어지지 않아. 설사 혼외자식이 생기더라도 말이지.”

“······.”

“300억짜리 사업이 얽힌 일이야. 자네도 이해했으니 곱게 물러났던 것이겠지. 아이는 아이고, 결혼은 결혼이야.”

이 시대에 300억이라면 21세기엔 1조5천억 원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차 회장은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때 돈 봉투를 받지 그랬나. 그랬다면 이렇게 빈손으로 나가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차 회장은 선물을 들고 왔던 거한에게 손짓했다.

“내가 알게 된 이상 내 손자를 낳아준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순 없지. 고 실장.”

“예, 회장님.”

“이 아이 앞으로 강남의 아파트 두어 채랑 세 받아 먹고살 만한 목 좋은 상가 건물 한 채를 내어 주게.”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7년간 내 새끼를 낳아 키워준 값으로는 넉넉할 게야. 그간 고생했네.”

차 회장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 이제 아이 걱정은 하지 말고, 자네도 자네 살길을 찾아가는 게 좋겠군.”

“네?”

“재혼 말이야. 아, 혼인신고도 안 했으니 서류상으로는 깨끗하겠어. 이 정도 부동산을 싸들고 가면 제법 괜찮은 집안에 이쁨받으며 살 수 있을 게야.”

“그건······!”

“이쯤에서 물러서지 않고 기어이 300억짜리 혼약을 물려야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네. 연을 끊었다는 자네 친정까지 휘말리게 될 걸세. 이건 경고야.”

도저히 못 들어주겠군.

나는 벌떡 일어났다.

“엄마, 나 졸려요!”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어머니 옆에 서서 배꼽 인사를 올렸다.

“차 회장님, 오늘 만나 봬서 반가웠어요. 그리고 장난감은 됐으니 도로 가져가세요.”

“차 회장님?”

차 회장이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 본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드느냐?”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주는 선물인 줄 알았더니,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동냥밥이었잖아요. 내가 거지인 줄 아세요?”

나는 김 비서를 돌아봤다.

“아저씨, 그 뇌물 말이에요.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드린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요. 그냥 동냥밥인 셈 치세요.”

이거나 먹고 떨어지란 소리였다.

“아이는 아이고, 결혼은 결혼이라면 사업도 그냥 사업이었어야죠. 자식 팔아서 벌이는 사업이라니, 그 정도로 능력이 없을 줄은 몰랐네요. 엄마, 가요.”

“태성호텔에 방 잡아뒀다. 여인숙에 있던 짐도 빼서 옮겼으니, 위로 올라가자.”

차 회장은 빙그레 웃었다.

“내 새끼를 그런 후진 곳에서 재울 수 없지. 구로동 판잣집에서도 쫓겨나서 당장 돌아갈 집도 없을 텐데.”

“집이 없긴 왜 없어요? 우리 오늘 집 샀는데요?”

차 회장은 김 비서를 돌아보았다.

보고에 없는 일일 터였다.

“고작 천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이라면 보나 마나 또 판잣집이겠지.”

뒷조사를 한 티를 숨기지도 않는다.

대꾸할 가치도 없어서 난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들려주신 이야기는 새겨듣겠습니다. 아버지한테는 장가 잘 가시라고 전해주세요.”

귀지를 튕기며 씩 웃었다.

차 회장은 조금 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혁아, 잘 생각해 봐야 할 게다. 정말로 이대로 네 어미를 따라가겠느냐?”

“물론이죠.”

“네가 어려서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부모 중 누구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서 네 미래가 아주 달라질 것이다. 네 아비를 택한다면 일평생 돈 걱정 없이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겠지만, 네 어미를 따라간다면 고생길이 훤할 게다.”

“그게 뭐 어때서요?”

나는 엄마와 잡고 있는 손을 쑥 들어 올렸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낳아주고 키워주신 어머니를 버려요? 그런 후레자식을 좋다고 주워다가 키우고 싶으세요?”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난 그런 상종 못 할 인간은 내다볼 생각도 없는데, 회장님은 비위도 좋으시네요.”

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제대로 작별 인사드리겠습니다. 사업상 동지랑 300억짜리 사돈 맺고 천년만년 잘 먹고 잘살면서 만수무강하십시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갔다.

어머니는 몹시 난처한 표정을 하고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 봐야 시집살이만 고될 거예요. 돈 봉투를 안 받은 거요? 잘했어요! 그런 게 다 나중에 약점이 된다니까요?”

내가 빼돌린 우광건설 뇌물 장부만 봐도 그렇다.

지하철 공사 입찰에 힘 좀 쓰고, 눈 좀 감아주면 주머니 두둑하게 떨어지겠지.

하지만 그게 제 목줄을 조르는 약점이 됐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는 내가 호강시켜드릴 거예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 믿죠?”

내가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

이쪽이 빈손이라 못마땅한 것이라면 문제는 쉬워진다.

'이쪽은 1,800억짜리, 아니, 거기에 플러스 20억 추가니까!'

이 정도면 저 뻣뻣한 차 회장님도 부드럽게 풀어질 것이다.

뇌물만큼 관계에 부드럽게 기름칠을 해 주는 게 또 없거든.

‘그럼 내가 순진하게 장부를 그대로 내줬을 것 같아요? 초면에 뭘 믿고?’

뇌물로 줄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다.

미리 빼돌려뒀던 장부의 페이지를 주머니 위로 만지며 나는 씨익 웃었다.

'쥐고 있는 패까지 다 내어주는 건 호구나 할 짓이거든.'

내가 어머니 손을 잡고 태성호텔을 나갈 때였다.

우광건설 사장이 한 무리를 이끌고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보이는 얼굴들이 낯익었다.

‘지하철 2호선과 관련된 사람들을 이끌고 보란 듯이 태성호텔을 찾아와? 이건 거의 선전포고인데? 이 꼴을 보면 차 회장님께서도 제법 속이 뒤집히시겠어.’

운이 좋다.

내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 보여줄 계획이었는데.

굳이 손 쓰지 않아도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리다니!

'원래 고래 싸움에 새우가 떼돈 버는 법이지.'

분노한 고래들은 상대를 죽일 무기라면 호구처럼 달려들거든.

한마디로 평소보다 훨씬 비싸게 팔아먹을 기회란 소리!

그러니 콧노래가 절로 나올 수밖에.

< 차 회장의 뜻(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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