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회장의 뜻 (2) >
멀어지는 손자를 보면서 차 회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애는 똘똘하게 잘 키웠군. 배짱도 좋고, 기세도 좋고, 줏대도 있고.”
김 비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고 실장이 방치된 선물 더미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말거나.
차 회장은 보고서에 첨부됐던 차정혁의 사진을 톡톡 두들기며 싱글벙글 웃었다.
“다들 나를 보면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고 쩔쩔매는데, 이놈은 나를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아. 그냥 동네 할아버지 보듯이 해.”
“그래서 섭섭하십니까?”
“그럴 리가. 저놈이 눈치가 없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제 엄마가 쩔쩔매는 것을 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가늠한 것 같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짱도 좋게 내질렀단 말이지.”
차 회장이 기분 좋게 웃는 이유였다.
“배포가 커. 눈빛도 범상치 않고. 말본새도 제법 맵고. 성준이가 괜찮은 자식을 얻게 되었군. 이게 다 성준이의 복이다. 하하하!”
차 회장은 김 비서가 제출했던 보고서를 떠올렸다.
“구로동 판잣집에 세 들어 살았다지? 입고 있는 옷도 후줄근하고, 머리 잘라 놓은 것도 영 촌스럽다. 귀티 나게 잘생긴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아. 백화점에 연락해서 회원 카드부터 발급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손자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에서 가난뱅이 냄새가 진동했다.
“연탄가스에 죽을 뻔했다는데, 그간의 고생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지. 그런데도 우는소리, 죽는소리 한 번을 내질 않아. 나만 보면 손 벌리기 바쁜 놈들과 다르게 돈소리를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단 말이야?”
김 비서는 몇 마디 더 보태고 싶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차 회장이 손을 들어 막았기 때문이었다.
“재벌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지도 않아. 그런데도 제 엄마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떠나는 걸 봐. 하하하!”
차 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사내가 됐으면 이 정도 깡다구는 있어야지!”
그래서 다행이긴 한데.
“하지만 아직 어려. 제 미래를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차 회장은 혀를 찼다.
“똑똑한 놈이었다면 어떻게든 이 집안에 들어온 후에 기회를 봐서 제 어미도 받아달라며 눈치껏 매달렸어야 했다.”
“그 정도로 상황 판단 안 되는 분이 아닙니다.”
“응?”
차 회장은 고개를 들어 김 비서를 보았다.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할 때가 다 있군. 그 정도야?”
“그 이상입니다.”
“흐음.”
김 비서는 종이봉투에서 검은 서류철을 꺼냈다.
“우광이 뿌린 뇌물 장부입니다. 중정 내부에서 나온 극비물건이죠.”
“뭐?”
“어제 보고드린 대로 우광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대는 물건이 바로 이겁니다.”
차 회장도 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다.
우광이 발칵 뒤집혀서 언론과 정치인들을 구워삶고 있다는 것을.
중정 윗선까지 개입해서 무언가를 샅샅이 색출하고 있다는 것을.
‘대체 이게 뭐기에 우광이 그렇게 미친년처럼 날뛰는··· 으음!’
파라락.
장부를 넘길수록 차 회장의 안색이 점점 더 굳어졌다.
‘우광이 미쳐 날뛸 만했군. 어떤 대가리에 총 맞은 새끼가 우광을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졌지? 제법 한가락 하는 솜씨야.’
깔끔하게 정리된 장부였다.
어떤 놈이 이런 걸 만들어냈는지 몰라도, 이 장부에 이름 올린 놈들은 식은땀깨나 쏟게 될 터였다.
차 회장은 이 장부를 어떻게 써먹을지 머릿속이 바쁘게 팽팽 돌아갔다.
“김 비서, 어디서 이런 귀한 물건을 얻어 왔나?”
김 비서가 저런 물건을 거저 얻었을 리 없다.
이건 분명 누군가가 보내온 선물이자 호의였다.
태성과 함께 손을 잡고 싶다는 은밀한 제안이기도 했다.
“삼청? 금산? 사채나 건달패? 아니면 야당 의원? 우광에 심은 끄나풀?”
예상과 다르게, 김 비서는 전혀 다른 이름을 꺼냈다.
“정혁 도련님입니다. 도련님께서 회장님께 드리는 뇌물이라며 제게 이걸 넘기셨습니다.”
“뭐라?”
아니, 아까 뇌물이 아니라 동냥밥이라고 정정했던가.
김 비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정혁 도련님께서는······.”
김 비서는 정혁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간략하게 간추려 보고했다.
어떻게 집을 사들였는지, 송골매 전당포의 어르신을 어떻게 쥐락펴락했는지.
사실 크게 축소해서 보고한 감이 있건만, 그것만으로도 차 회장은 입을 떡 벌렸다.
“우리 정혁이 나이가 올해 몇이라고?”
“······일곱 살 되십니다.”
송골매 전당포의 어르신과 비슷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어르신은 똥 씹은 표정으로 연신 헛웃음만 흘렸는데, 차 회장은 몹시 들뜬 표정으로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내 새끼, 역시 내 핏줄이로구나! 아무렴!”
그래서 말입니다만.
“회장님, 정혁 도련님을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실 겁니다.”
차 회장은 잠시 침묵했다.
원래 미신 따위는 고사하고 꿈 같은 소리조차 안중에도 없던 사람이건만.
어째서인지 한날한시에 온 가족의 꿈에서 본 광경이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어른거리곤 했다.
‘정혁이 그놈은 꿈에서 남산만 한 황룡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녀석이다. 손짓 한 번에 땅이 뒤집히고, 강이 석유로 바뀌고, 돈벼락이 떨어졌지. 태몽도 그 정도면 보통 비범한 인물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던데.’
미신 따윈 믿지 않지만, 제 눈썰미는 믿었다.
아까 직접 대면한 손자는 몹시도 탐이 나는 재목이었다.
“김 비서, 자네가 직접 나서 줘야겠어. 내 손자를 데려와.”
“회장님, 설마 억지로 어미에게서 떼어놓으시려는 건 아니겠죠?”
“필요하다면.”
“회장님!”
“어떻게 얻은 금쪽같은 내 새낀데, 저걸 저대로 그냥 둔단 말이야? 난 내 핏줄이 그렇게 밖으로 내도는 꼴은 못 봐!”
김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은 추천드리지 않겠습니다.”
“왜?”
“억지로 데려왔다가는 장차 험한 꼴을 보게 되실 겁니다. 천륜을 함부로 끊으려다간 악연만 만들 뿐입니다. 정혁 도련님은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차 회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천륜을 끊으려다가 만든 악연의 말로를 직접 겪어보지 않았던가.
차 회장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덩달아 목소리도 낮게 깔렸다.
“자네는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이수진 씨를 데려오면 정혁 도련님도 함께 따라 들어오실 겁니다.”
딱. 딱. 딱.
차 회장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첩 자리는 어떻겠나?”
“이수진 씨는 첩 자리를 승낙할 여자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진즉에 돈 봉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악착같이 성준 도련님을 따라다녔을 겁니다.”
“알아. 아까 대화를 해 보니 알겠더군. 그 아이는 우리 성준이의 돈을 노리고 들러붙은 꽃뱀 따위가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광과의 혼약을 무를 수도 없고.
무려 300억짜리 사업이 걸린 일이었다.
“이수진, 그 아이의 친정은 뭐 하는 집안이라고?”
“딱히 별거 없습니다. 세도가 출신 독립운동가 집안인데, 군자금을 대느라 재산을 많이 말아먹었고, 이제는 분당과 판교, 수서동 쪽에 각각 약 6만 평 정도, 총 19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거기라면 지금 죄다 그린벨트로 묶여서 똥값이나 다름없지?”
“예.”
“그래서 아버지는 뭐 하시는데?”
“농사를 지으십니다.”
“농지는 좀 있으나, 큰돈은 못 만지고 사는 집이로군.”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부국강병의 기틀로 제조업을 꼽았다.
그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농수산물값도 제한했다.
지금 시대에 돈을 벌려면 농사가 아니라 공장을 돌려야 했다.
“고작 평당 몇백 원, 몇천 원짜리 땅! 그 땅을 다 팔아 봤자 우광과는 비교할 수 없지.”
차 회장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차라리 저 수진이란 아이가 조금만 더 말랑말랑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냥 얌전히 첩실 노릇이나 하면 오죽 좋아?”
그때 태성호텔 커피숍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아니, 차 회장님이 아니십니까?”
우광건설 사장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 뒤로 보이는 얼굴들이 낯익었다.
서울시 개발 계획 담당자, 지하철 공사 자문 위원회, 일본 교통국 고위 관료와 일본 제도고속도교통영단 사장까지 다 모였다.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이 호텔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내 호텔에 내가 오는 데 꼭 중요한 용건이 있어야만 하나?”
우광건설 사장은 차 회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힐끗 봤다.
커피잔이 도합 네 잔이다.
쌍화차, 밀크 커피, 에스프레소에 코코아까지.
차 회장이 말은 저렇게 해도 방금까지 누군가를 만났던 게 분명했다.
‘지금쯤 지하철 공사 계획을 짜느라 총력으로 밀어붙이고 있을 양반이 시간을 쪼개가며 만나는 인물이라.’
차 회장은 일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요시모토 상.”
“예. 오랜만입니다, 차 회장님.”
“도쿄도 교통국에서 일하시는 분이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미리 연락이라도 한번 하시지. 그랬으면 태성호텔 스위트룸을 비워뒀을 텐데요.”
“별일 아닙니다.”
“우리 태성이 일본에 찾아갔을 때는 바쁘다고 딱 잘라 거절하시더니. 이거 아주 섭섭합니다. 안 그래도 지하철 공사와 관련해서······.”
“으흠! 보시다시피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일본인은 일부러 차 회장과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자 우광건설 사장과 고위 관료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갔다.
차 회장은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털썩 앉았다.
‘역시 지하철 2호선 공사 때문이로군. 우광이 이번에 단단히 작심했나본데? 로비에 이렇게까지 열을 올릴 줄이야.’
차 회장은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우리 태성이 우광보다 한 수 위다. 태성은 기술력도, 토목공사 경험도, 건설 실적에서도 한 끗발이 높아.’
그뿐만이 아니다.
‘성준이가 해외 건설 수주를 많이 따온 덕에 우리는 보유 자금까지 넉넉하지. 입찰가 경쟁에서도 절대 밀릴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막상 저 꼴을 두 눈으로 직접 봤더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공정한 경쟁으로 지하철 공사 입찰을 딸 수 있었다면 우광이 저렇게 뒤에서 공들여서 로비전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젠장!’
차 회장은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쌍화차 한 컵 더! 얼음 가득 채워서 냉수도 내오고!”
이놈들이 무슨 작당을 하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겠다!
“회장님.”
김 기사가 검은색 파일철을 차 회장의 앞으로 슥 밀었다.
우광건설의 뇌물 장부였다.
촤라락!
빠르게 대충 페이지를 넘기던 차 회장의 손이 뚝 멎었다.
<우광건설의 보유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바, 로비에 필요한 자금 충당은 우광이 아니라 태성의······.>
보고서는 그 대목에서 뚝 잘렸다.
자를 대고 칼로 자른 것처럼 깨끗하게 잘린 흔적만 남아 있다.
그렇게 대놓고 잘린 페이지가 딱 3쪽!
‘우광이 뿌린 뇌물 자금을 뭐로 충당해? 태성의 뭐?’
안 그래도 부글부글 끓던 속에 휘발유를 들이부은 것 같았다.
“김 비서!”
잘린 페이지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꼭 좀 봐야겠다!
돈이 좀 들더라도, 손해를 좀 보더라도!
난 당장 돈이 줄줄 새고 있는 내 집안 문제부터 확인해야겠어!
< 차 회장의 뜻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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