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웬 횡재냐? (2) >
‘자고로 뇌물이란 청탁을 수반하는 법. 차 회장님이 내가 잘라낸 페이지를 발견했나 보군.’
나는 호주머니를 매만졌다.
곱게 접힌 종이가 잡혔다.
‘우리집 금고에서 보물을 잔뜩 찾았으니 난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굳이 챙겨주겠다는 성의를 마다할 이유도 없지. 이건 기선 제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니까.’
김 비서가 말했다.
“도련님께선 제가 무엇을 청탁하러 왔는지 아마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물론이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비서 앞에서는 내숭 떨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군.
“내가 궁금한 건 청탁의 내용이 아니라, 뇌물의 내용이에요.”
딸깍.
나는 대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세요. 뇌물이라고 해 봤자 우광에게 뜯긴 20억과는 비교하기 힘들겠지만요.”
몇 시간 전에 태성호텔 커피숍에서 차 회장과 얼굴을 붉힌 후였다.
그러니 절로 퉁명스럽게 대꾸할 수밖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김 비서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을 많이도 데려왔군.’
경호팀 사람들은 물론, 각기 다른 작업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십여 명이나 되었다.
“잡일을 거들 사람들입니다.”
김 비서는 정원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며 말했다.
“이쪽은 우리 태성호텔 출신 청소 메이드들입니다. 솜씨가 제법 뛰어난 편이죠.”
안 그래도 엄마 혼자 청소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잘됐다.
“이쪽은 태성건설 소속의 리모델링 담당자인데, 배관부터 전기까지 웬만한 하자는 깔끔하게 고치는 실력자입니다.”
“태성건설 김 부장이라고 합니다.”
그는 공구함을 실은 카트를 돌돌돌 밀며 들어왔다.
“이쪽은 태성호텔 레스토랑의 일식 전문 수석 셰프와 보조 셰프입니다. 도련님과 이수진 씨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할 겁니다.”
“그럼 태성호텔 레스토랑은 어쩌고요?”
“괜찮습니다. 양식 전문, 중식 전문, 한식 전문 셰프 군단이 남아 있으니, 하루쯤은 일식이 빠져도 충분히 커버 가능할 겁니다.”
빵빵!
대문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주유차도 불렀습니다. 아까 보니까 여긴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집이더군요. 평수가 넓으니 아무래도 기름이 부족할까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김 비서 일 잘하네!
눈썰미가 제법이다.
마침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집안일을 거들 사람이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난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로 내 환심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이건 그저 대화를 나눌 시간을 얻기 위해 부린 꼼수일 뿐입니다.”
김 비서는 정중하게 현관문을 열며 허리를 숙었다.
“도련님, 먼저 안으로 드시죠.”
나는 김 비서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 * *
“회장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김 비서의 눈짓에 복덕방 아저씨가 급히 뛰어나왔다.
“꼬마 도련님을 오늘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나 뵙게 되네요.”
명동에 복부인이 바글바글하던, 이 집의 계약을 주선했던 바로 그 복덕방 아저씨였다.
“이번엔 강남 아파트를 찾으신다고요? 역시 그냥 지나치기엔 많이 아쉬우셨죠? 그래서 제가 다시 왔습니다!”
복덕방 아저씨가 최고급 아파트 서류를 착착착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매물들만 골라 가지고 왔지요. 현무 아파트, 천마 아파트, 금조 아파트를 추천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가 건물도 있습니다. 이건 종로, 요건 을지로, 저건 남대문, 그건 동대문!”
복덕방 아저씨가 착착 늘어놓는 서류마다 죄다 황금빛이 번쩍번쩍했다.
“이것으로는 영 눈에 차지 않으십니까?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전국팔도를 뒤져서라도 딱 맞는 매물을 찾아서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복덕방 아저씨는 손바닥을 비비며 웃었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법무사와 함께 법원 등기까지 책임지고 원스톱으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흐흐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설마 이게 뇌물인가요?”
“그럴 리가요. 이건 이수진 씨에게 보내는 회장님의 선물입니다.”
잠자코 듣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아파트와 상가 건물을 전부 우리 정혁이 이름으로 해 줄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그렇게 진행하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대답하기 전에 내가 막았다.
“그럴 필요 없어요. 엄마, 이건 차 회장님이 챙겨준 엄마의 몫이에요. 제 몫은 제가 알아서 챙겨갈 테니 걱정하실 것 없어요.”
나는 김 비서를 돌아보았다.
“엄마 이름으로 해 주세요. 다른 제안은 받지 않겠어요.”
“그러시죠.”
김 비서는 검은색 카드를 꺼냈다.
“태성의 회원권입니다. 태성호텔과 리조트, 골프장, 백화점을 이용할 때 이걸 사용해 주십시오. 귀빈으로 극진히 모실 겁니다.”
그러더니 몽블랑 만년필을 어머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드님께 증여하고 말고는 건물주 마음입니다. 그러니 부동산은 이수진 씨가 직접 신중히 고르십시오. 심사숙고하셔야 할 테니 그동안 도련님은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김 비서의 눈짓에 복덕방 아저씨가 주섬주섬 부동산 서류를 챙겼다.
“이것 외에도 우리 복덕방이 보유한 알짜매물들이 제법 많습니다. 천천히 깐깐하게 마음껏 골라보시죠, 사모님!”
복덕방 아저씨는 어머니의 등을 떠밀며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김 비서는 은테 안경을 추켜 올렸다.
“이제야 도련님과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겠군요.”
지금부터 뇌물 수수의 시간이란 소리였다.
김 비서는 두툼한 종이봉투를 꺼냈다.
“현금 3,000만 원입니다.”
“차 회장님께선 생각보다 통이 작으시네요.”
나는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았다.
“새는 물독을 막는 것에도 딱히 관심이 없나 봅니다. 지하철 공사 입찰이 코앞이라 가뜩이나 바쁠 텐데, 고급 인력을 총동원해서 전 계열사의 장부를 뒤지려고요?
“으음.”
“배신자가 있다는 걸 알고도 눈 감을 만큼 차 회장님의 성질머리가 차분하신가요?”
그럴 리가 있나.
그랬다면 김 비서가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들이닥치지 않았겠지.
“태성의 경호원을 잔뜩 끌고 오셨던데. 혹시 일곱 살짜리 어린애를 잡아다가 힘으로 빼앗아 갈 생각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귀한 도련님께 어찌 감히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하겠습니까? 다른 놈이라면 또 모를까.”
김 비서가 손짓하자 경호원 아저씨가 한 사람을 데려왔다.
“철구 아저씨!”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철구 아저씨는 온몸이 울긋불긋 멍들었고, 곳곳에 피가 흐른 상처가 가득했다.
고문의 흔적이었다.
불곰 같던 철구 아저씨는 태성그룹 경호원들의 부축이 아니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기진맥진, 몹시도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나는 당장 달려갔다.
“많이 다쳤어요? 병원에 안 가봐도 괜찮겠어요?”
“이게 누구야? 꼬맹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토끼굴을 많이 파두라고 했잖아요! 과녁 정중앙을 노리려면 그보다 높이 쏴야 하니까 라인을 잘 보랬잖아요!”
“꼬맹아, 네가 왜 여기에······.”
“복사본을 만들어두는 게 좋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동안 뭐 했어요? 장부에 적힌 놈들 일일이 찾아가서 협박부터 했어야지, 뭔 헛짓거리를 하다가 서빙고 지하실로 끌려갔대요?”
“아니, 그러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철구 아저씨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김 비서를 번갈아 봤다.
“설마 너도 여기 잡혀 왔냐?”
“······.”
이 양반은 정녕 뇌가 없는 건가.
촉은 좋다면서 왜 눈치는 꽝이냐.
철구 아저씨는 깊이 탄식했다.
“나랑 얽힌 지인들 중 여럿이 끌려가서 몹쓸 꼴을 봤다더니······!”
철구 아저씨는 고개를 푹 숙였다.
“꼬맹아, 그러니까 넌 못 본 거랬잖냐. 깨끗하게 잊으라니까. 괜히 나랑 더럽게 얽혀서······, 미안하게 됐다.”
철구 아저씨는 김 비서를 향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일곱 살짜리 꼬마앱니다! 어린애가 뭘 압니까? 쟤는 그냥 돌려보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비서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게 묻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철구 아저씨가 대신 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진짜 모릅니다! 하지만 저 애만 돌려보내 주신다면 어떻게 해서든······!”
“됐어요, 아저씨. 그만해도 돼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 서류를 내놓지 않으면 철구 아저씨가 험한 꼴을 당한다, 이 말인가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회장님께서 꼭 그 세 페이지를 보아야겠다고 하셨거든요.”
김 비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광건설의 뇌물 장부를 작성한 사람을 당장 데려와라. 이게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차 회장이 억지로 철구 아저씨의 입을 열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철구 아저씨는 몸 성히 돌아오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전 박철구 씨를 회장님 앞으로 끌고 가기 전에 먼저 도련님께 데려왔지요.”
그래서 뇌물이란 말이지?
“배짱 좋게 일곱 살짜리 아이를 협박하고, 뻔뻔하게 서비스로 약속했던 일을 뇌물이라고 들이밀다니.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게 역시 마음에 듭니다.”
“······.”
김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철구 아저씨가 우리 아빠도 아닌데, 나한테 그딴 협박이 통할 것 같아요?”
인생은 원래 당근과 채찍!
협박이 안 통하면 뇌물이라도 달달하게 얹어 줘야 하는 법이다.
나는 혀를 찼다.
“내가 준 뇌물이랑 너무 수준 차이 나잖아요. 내가 드린 장부는 최소 1,800억짜리였어요.”
“······.”
“우광 때문에 새는 돈이 얼마였더라? 한 20억쯤 되던가요?”
“······.”
“그럼 앞으로 계속 줄줄 샐 돈은 얼마나 될까요? 뒤통수를 친 배신자 색출은요? 장부를 조사하는 동안 개처럼 굴러다닐 태성그룹 인력들은요?”
“······.”
“그런데 뇌물이랍시고 철구 아저씨를 데려와 놓고 입을 씻겠다고요? 솔직히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니에요?”
“······.”
나는 팔짱을 꼈다.
“뇌물이라길래 난 또 혹시나 했잖아요. 우리 엄마를 모욕한 걸 사과하고,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
“중동에서 잡아온다는 우리 아빠를 데려왔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
“아니면 태성의 주식이라도 잔뜩 안겨줬어야죠. 한 1억 원어치 정도?”
나는 마룻바닥을 탕탕 쳤다.
“그 정도는 되어야 뇌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역시 화끈하시군요. 적극적인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 비서는 빙그레 웃었다.
“도련님의 요구에 맞춰 뇌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3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도 씩 웃었다.
‘역시 김 비서와는 말이 잘 통하는군. 그래, 이게 바로 짜고 치는 고스톱, 맞춤형 서비스란 거지!’
김 비서라면 내가 요구한 것들을 깔끔하게 챙겨올 것이다.
그래서 아까 내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를 만들어 오는 게 마음에 든다니까?
'그럼 이제 명함을 써야 할 때인가?'
뇌물로 요구하기엔 조금 곤란한 일이다.
하지만 김 비서가 협조만 잘 해주면 나도, 차 회장도, 김 비서도, 철구 아저씨도 서로 윈윈윈윈을 얻을 수 있는 일!
'나는 조만간 태성의 어느 계열사에서 무슨 일이 터지는지 잘 알지.'
하지만 이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네?
그래서 필요한 사람이 누구?
바로 철구 아저씨란 거지.
< 이게 웬 횡재냐?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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