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성충성! >
나는 김 비서의 명함을 내밀었다.
“딱 일주일 동안. 태성은 철구 아저씨를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철저하게 보호해 주길 바라요.”
내기에서 이긴 승자의 요구였다.
‘철구 아저씨를 중정에서 꺼내준 것은 김 비서의 서비스로 해결했지만, 보호는 또 다른 문제거든.’
아직도 철구 아저씨의 머리 위에는 황천길 카운터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승사자의 솜씨였다.
[4일]
서빙고 고문실에서 빼내 왔는데도 저렇다.
아직도 죽음의 위협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 때문에 철구 아저씨가 제명에 못 죽겠군.’
이 양반을 모른 체할 수도 없고!
처음엔 어머니의 목숨 빚을 갚는답시고 목숨 구할 조언을 건네는 것에 그치려 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아저씨의 장부를 이용해서 협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걸린 돈도 크고, 걸린 문제도 커. 이 일엔 철구 아저씨의 적극적인 협조가 반드시 필요해.’
무려 20억짜리 태성 그룹 내부 비리가 얽힌 문제였다.
내가 명함까지 써 가면서 아저씨를 돕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공을 세울 작정이다.
“명함은 넣어두십시오. 이렇게 헛되이 쓰기엔 아깝군요.”
김 비서는 명함을 돌려받지 않았다.
“처음부터 뇌물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러니 이건 협상이 파투 난 후에 쓰셔도 늦지 않습니다.”
대신 명함을 도로 내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차 회장님의 인내심이 닳아서 철구 아저씨를 당장 데려오라고 하시면요?”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더 서둘러 뇌물을 들고 와야겠군요.”
“철구 아저씨의 가족을 잡아서 인질극을 벌이면요?”
“원천 봉쇄해야죠. 현재 박철구 씨 모친인 강옥분 씨가 중정 앞에서 아들을 만나야겠다며 버티고 있다던데. 그분도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음에 든다.
“할머니가 놀라지 않도록 정중하게 모셔와 주세요. 납치하듯 험하게 끌고 오면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김 비서의 눈짓에 태성그룹 경호원 중 두 명이 즉시 빠져나갔다.
철구 아저씨는 퍽 고마운 눈치였다.
“박철구 씨의 치료도 필요하겠군요. 태성병원에 연락해서 왕진 올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물론 이것도 서비스.”
“명함값을 치른 것도 아닌데, 서비스가 너무 후하신데요? 밑지는 장사라고 속 쓰린 건 아니죠?”
“도련님께서도 먼저 장부를 건네셨잖습니까. 이왕에 물꼬를 튼 신용 거래, 이번엔 제가 도련님을 믿어보겠습니다.”
오가는 신용 거래 속에 싹트는 호감!
이 정도면 김 비서는 내게 의리를 다한 것이고, 내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사실 김 비서가 저렇게 순순히 물러서는 덴 다 이유가 있지.’
비단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철구 아저씨를 죽여서 입을 막으려던 우광과 달리 태성은 반드시 철구 아저씨의 입을 열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철구 아저씨는 중정에 끌려가고서도 입을 열지 않은 독한 사내다.
만일 철구 아저씨가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중요한 정보까지 전부 날아가고 만다.
“제가 박철구 씨에게 직접 칼을 대는 건 도련님과의 협상이 틀어진 후로 미뤄도 늦지 않습니다.”
저러니까 철구 아저씨의 황천행 카운트다운이 아직도 계속되는 거겠지.
우광은 죽이려 들고, 태성은 입을 열려 들고.
우광과 태성이란 고래 싸움에 끼어든 새우의 운명이란 이렇다.
“약속드릴게요. 지금의 이 선택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김 비서가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악수했다.
“박철구 씨, 똑바로 알아두십시오.”
김 비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당신이 누구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합니까? 평생 우리 정혁 도련님께 감사하며 사십시오.”
목숨값을 똑바로 갚으라는 경고였다.
“그건 그쪽이 염려할 거 없어. 애한테 삥 뜯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하지만 철구 아저씨는 깡다구 좋게 코웃음을 쳤다.
“다른 건 몰라도 목숨 빚은 떼먹으려 들면 안 되지. 난 그렇게까지 막돼먹은 작자는 아닌지라.”
“부디 그래야 할 겁니다.”
김 비서는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도련님, 그럼 뇌물이 준비되는 대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김 비서는 돌아갔다.
그 뒤를 태성그룹 경호원 사람들이 뒤따랐다.
* * *
철구 아저씨가 앓는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구구, 삭신이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기름보일러를 팡팡 틀어댄 덕분에 등이 아주 뜨끈뜨끈할 터였다.
“고맙다, 꼬맹아. 목숨 빚을 갚겠단 맹세도 진심이야.”
“됐어요. 나도 우리 엄마 목숨 빚을 갚은 거예요.”
아저씨가 먼저 우리 엄마를 살려줬잖아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리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그게 뭐 별거라고. 하지만 내가 네 덕분에 진짜 죽다 살아났다는 건 확실해. 이러다 진짜 뒈지겠구나 싶었거든.”
철구 아저씨는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어쩌다 사나이 박철구가 일곱 살짜리 꼬맹이에게 목숨 빚을 지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 박철구! 한번 한 맹세는 죽어도 지키는 사람이야!”
그러더니 이내 껄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와, 암만 생각해 봐도 진짜 모르겠다. 꼬맹아, 너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어떻게 중정에서 날 빼냈지? 너 같은 꼬맹이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그새 까먹었어요? 힘없는 자의 용기는 만용일 뿐이니, 힘이 없으면 힘 있는 자를 끌어들이라고 했잖아요.”
“······.”
철구 아저씨는 눈을 껌뻑였다.
“과녁 정중앙을 맞히려면 어딜 노려야 한다고 했어요?”
“과녁의 위쪽?”
“우광이 중정 윗선을 움직여서 아저씨를 끌고 갔으니, 아저씨를 꺼내려면 이쪽은 태성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어요.”
“······.”
철구 아저씨는 헛웃음을 지었다.
“말은 쉽지. 그게 되겠냐?”
“되던데요?
“······.”
“그게 아저씨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 아니에요?”
“허······.”
철구 아저씨는 입을 떡 벌렸다.
잠시 금붕어처럼 뻐끔대면서 날 가리킨 손가락만 몇 번 떨더니,
“진짜 그렇게 날 빼냈다고?”
“네.”
“태성이 네 어딜 믿고?”
“설마하니 일곱 살짜리 꼬맹이를 믿었겠어요? 아저씨가 만들어 둔 서류를 믿은 거지.”
“······!”
철구 아저씨는 눈을 부릅떴다.
“서, 서, 설마······!”
“그럼 지금까지 내가 그걸 빼돌린 줄도 몰랐던 거예요?”
철구 아저씨는 제 이마를 탁 쳤다.
“환장하겠네. 그게 왜 너한테 있냐?”
“내가 이걸 빼돌린 덕에 아저씨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만 알아둬요.”
“······.”
철구 아저씨는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가 끌려갔을 때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왔어 봐요. 태성도 아저씨를 쉽게 못 빼냈어요.”
“크흠!”
“진짜 큰일 날 뻔했다고요. 살인멸구란 말이 왜 있겠어요?”
이 꼴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체 그동안 뭘 어떻게 하고 다닌 거예요? 복사본도 안 만들어두고, 정치인들 찾아다니면서 협박도 안 하고, 언론에 뒤를 부탁해 놓은 것도 아니고, 우광에 제대로 한 칼을 먹인 것도 아니고.”
“크흠!”
“아저씨에게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두랬잖아요. 설마 이사도 안 간 건 아니죠? 우광은 구로동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면서 아예 불까지 질렀다던데.”
“크흐흠! 우광을 막기 위해 나 역시 최선을 다했긴 한데······.”
철구 아저씨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태성이 우광의 라이벌 기업이잖냐. 그래서 나도 제일 먼저 태성에 찾아가보려고 했지!”
“그런데요?”
“하지만 난 태성과 끈이 없잖냐. 내 말을 쉽게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작정하고 아예 확실한······.”
그때 어머니와 복덕방 아저씨가 들어갔던 작은방 문이 달칵 열렸다.
‘아오! 지금 제일 중요한 대목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방해꾼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사모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좋은 매물들로만 쏙쏙 골라가셨습니다! 탁월하신 선택입··· 헉!”
복덕방 아저씨는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오다가 아저씨와 날 보고 흠칫했다.
나는 째려보고 있고, 불곰 같은 덩치의 철구 아저씨는 피떡이 된 살벌하게 눈을 뜨고 있었으니까.
복덕방 아저씨는 대뜸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도 종종 우리 명동의 최고 복덕방을 애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충성충성!”
복덕방 아저씨가 뒤도 안 보고 돌아가 버렸다.
철구 아저씨도 내게 경례를 붙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도 충성충성!”
“뜬금없이 웬 충성 소리가···, 어머, 철구 씨!”
어머니는 방에서 나오다 말고 깜짝 놀랐다.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요?”
“······.”
중정 요원이 중정에 끌려가서 고문받다가 나왔다고 할 수도 없고.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저기, 그, 그러니까 직장 선임에게 처맞았습니다.”
“세상에, 직장 내 괴롭힘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정의 윗기수 선배가 살벌하게 패더라고.
“그나저나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꼬맹이의 초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김 비서에게 철구 아저씨를 꺼내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 건 나였으니까.
어머니는 날 돌아보았다.
“초대? 갑자기? 어떻게? 무슨 일로?”
“······집들이?”
“······.”
왜? 뭐? 왜!
이사했고 손님이 왔으니까 집들이 맞지!
대답이 궁색할 땐 역시 화제 돌리기가 최고다.
꼬르륵! 꾸르룩!
마침 기차 화통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철구 아저씨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딱 좋은 타이밍! 운이 좋군!
철구 아저씨는 곰 같은 덩치로 어색하게 웃으며 제 배를 쓸어내렸다.
“실은 다섯 끼를 내리 굶는 바람에······.”
“세상에, 다섯 끼나 굶었다고요?”
어머니는 입가를 두 손으로 가렸다.
“아주머니가 밥도 안 주고 쫓아낸 거예요? 또 맞선에서 간첩 얘기하다가 딱지 맞은 거죠?”
“크흠, 그게 아니라 직장에 붙잡혀서 지금까지 밤새도록······.”
“세상에, 강제 야근까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사람을 안 재우고 안 먹여서 괴롭히는 건 중정의 주특기였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극대노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대답이었다.
“뭐 그런 X 같은 직장이 다 있대요? 아무리 연말이라도 그렇지! 사람을 개처럼 부려먹더라도 밥은 먹이면서 일을 시켜야죠! 염전 노예도 그런 식으로는 안 부려요!”
그것참 희한하다니까.
월급도 짜고, 휴가도 없고, 주말도 없고, 칼퇴도 없이 막 부려먹어도 ‘원래 직장 일이 다 그렇지.’로 넘어가던데.
밥 안 먹이고 일 시켰다는 대목에서는 다들 한결같이 분노를 금치 못하더라고.
“잘 왔어요, 철구 씨! 못 먹은 끼니까지 더해서 여섯 그릇씩 드세요!”
사명감에 휩싸인 어머니는 철구 아저씨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부엌으로 들어갔다.
태성호텔 레스토랑 일식팀은 저녁을 준비하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어머니는 몹시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직장에서 밥도 안 주고 밤새 부려먹는 바람에 지금까지 다섯 끼나 내리 굶었대요!”
“······!”
셰프 군단은 하나같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철구 아저씨를 돌아봤다.
온몸에 울긋불긋한 멍 자국을 달고 있는 불곰 같은 양반이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거나 좋으니 당장 먹을 만한 거 뭐 없을까요? 쉰 밥이라도 한 덩이만······.”
“······!”
태성호텔 레스토랑 일식팀 수석 셰프가 불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비장하게 말했다.
“저흰 쉰 밥 따윈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밥이라면 얼마든지!”
“오오!”
“일단 연어초밥부터?”
“오오오오!”
철구 아저씨는 괴성을 내며 달려들어서 연어초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딱 알래스카 지류에 사냥 나온 회색곰 같았다.
엄청나게 빠르게 비워지는 접시!
그 모습을 어머니는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직장 선임이라는 사람도 정말 너무하네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패면서 부려먹는대요?”
“······!”
여유롭게 식사를 준비하던 베테랑 일식팀이 비장한 분위기를 풍겨댔다.
초밥 위에 올리는 횟감도 더 큼직해지고, 튀김과 우동 고명도 더 풍성해졌다.
“태성호텔 주방에선 힘 좋고 체력 좋은 주방 보조를 상시 모집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저흰 안 굶기고, 안 때리고, 잘 재웁니다!”
나는 철구 아저씨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따 밥 다 먹고 나 좀 봐요.”
나는 식탁 밑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반쯤 꺼내 보였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 중에서 잘라낸 페이지였다.
“커헉! 컥! 켁!”
이게 뭔지 단번에 알아본 철구 아저씨.
나는 물잔을 슬쩍 아저씨 쪽으로 밀어주며 속삭였다.
“태성그룹 회장님이 아저씨를 죽이겠다고 칼 들고 달려오기 전에 이것부터 제대로 처리해 놓자고요.”
철구 아저씨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우광건설의 보유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바, 로비에 필요한 자금 충당은 우광이 아니라 태성의······.>
그 뒷부분에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누가 댔냐는가 문제다. 누굴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네?>
<증거를 얻는 대로 기록하기 위해 뒤의 페이지는 일단 공란으로 남겨둔다.>
내가 일부러 세 페이지를 잘라내어 빼돌린 이유였다.
‘하지만 난 이 빈 페이지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단 말씀!’
그러니 문제 있어? 당연히 없지!
< 충성충성!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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