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증은 없어도 돼 >
철구 아저씨가 식사하는 동안 먼저 식사를 끝낸 나는 어머니랑 정원 산책에 나섰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대문과 정원 근처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나는 경호원들을 향해 배꼽 인사를 했다.
“아저씨들, 우리를 지켜주시느라 추운데 고생이 많으세요. 안에 들어가서 식사하고, 몸도 좀 녹이세요.”
경호원 아저씨들은 빙그레 웃었다.
“창고에 가 보니까 쌓아놓았던 장작이 꽤 많던데. 따뜻하게 화톳불을 피워드릴까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덕분에 어머니와 나는 정원 벤치에 앉아 모닥불을 쬘 수 있었다.
“역시 모닥불을 피우면 이런 걸 구워 먹어야 해.”
어머니는 감자와 고구마를 불에 넣으며 방긋 웃었다.
“꼭 놀러온 것 같다. 별이 반짝반짝 많이도 떴네.”
어머니는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야채 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매일 이렇게 별이 떴을 텐데. 어떻게 그동안은 하늘 한 번 쳐다볼 생각을 못 했을까?”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
먹고살기에도 벅찼을 테니까.
가진 것 없는 젊은 여자의 몸으로 홀로 날 낳아서 키워내기까지.
고생이 참 많았을 것이다.
“우리 집 정말 좋다. 그치?”
“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까 운치가 있어. 여기 정원은 신경 많이 써서 꾸며놓은 것 같아.”
물론이죠. 여기 처바른 돈이 얼만데요.
금잔디와 화단도 그렇지만, 정원수에 관상용 분재까지 전부 돈지랄의 결과다.
정원석은 물론이고 곳곳에서 위용을 부리는 거대한 축돌과 바닥에 깔린 판석까지.
아낌없이 비싼 것들로만, 일류 정원사가 심혈을 기울여 솜씨를 부린 것일 터다.
“정혁아, 아까 할아버지 만났잖아. 어땠어?”
“어떻긴 뭘 어때요? 엄마를 괄시하니까 심통 났죠.”
“그러면 안 돼. 엄마는 세상에서 정혁이를 사랑해줄 사람이 여럿 생긴 것 같아서 기뻤는걸.”
“아빠 팔아서 사업하고, 그 사업 때문에 엄마를 내치려고 했어요. 전 그딴 할아버지는 필요 없어요.”
“하지만 할아버지 말씀도 맞는걸. 아빠에 비하면 엄마는······.”
어머니를 따라가면 고생길이 훤할 것이란 말이로군.
그놈의 영감탱이가 진짜 말을 참 고약하게 했다니까.
“그래서 아빠를 따라가라고요? 엄마는 나 없이 살 수 있어요?”
“······.”
“그것 봐요. 대답 못 하잖아요. 나도 엄마 없이는 못 살아요.”
나는 어머니를 꽉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아빠 따라가면 호강할 수 있을 거야. 좋은 옷에, 좋은 차에, 좋은 선생님 만나서 대학교도 가고. 떵떵거리며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걸? 지금까지는 엄마 때문에 고생이 많았잖아.”
“재벌 집이 뭐 별건가요? 돈 좀 많고 힘 좀 있으면 저절로 행복해질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돈은 내가 벌면 되고, 힘도 내가 기르면 돼요. 난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면 돈이고 힘이고 다 필요 없어요.”
난 내 가족, 내 식구를 지키려고 돈과 힘을 키웠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딱 하나뿐이에요. 엄마는 아직도 아빠를 사랑해요?”
“응.”
“조금?”
“아니, 많이.”
“그러면 아빠랑 결혼하고 싶겠네요?”
씁쓸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엄마가 많이 부족해서 그래.”
어머니한테 부족한 거라면 돈과 집안이겠지.
재벌가 사람들이 언제부터 인성과 능력을 보면서 집안에 사람을 들였다고.
‘어머니의 집안까지는 내가 어쩔 도리가 없지만, 돈이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어머니의 목도리를 여며주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꽃가마 태워서 시집보내 드려야겠다.’
평생 한 번 본 적 없던 아버지가 내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땐 나도 아버지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마지막까지 가능성은 열어둬야지.
‘감히 우리 어머니를 두고 시집살이 따윈 시킬 엄두도 못 내게. 금쪽같은 우리 며느리라며 이쁨만 받도록 만든다.’
까짓것 못 할 것도 없다.
‘이거 갑자기 의욕이 마구 솟는데?’
마침 딱 좋은 기회가 왔다.
그런 의미로, 빨리 철구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 * *
태성그룹 경호원에게 부축받고서도 비틀댔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철구 아저씨는 금세 쌩쌩해졌다.
“으하하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배고파 뒈지는 줄 알았네.”
그렇게 초췌하고, 맥없던 모습이 다 굶었기 때문이었다니.
중정의 고문도 너끈히 버텨내는 질릴 만큼 튼튼한 몸뚱이와 죽어도 꺾이지 않는 기백!
마음에 든다.
“꺼-억-! 잘 먹었다! 역시 태성호텔의 초일류 일식 셰프들! 솜씨 진짜 죽이네!”
죽어가는 거지를 소생시킨 듯, 뿌듯한 표정을 짓는 태성호텔 셰프들.
셰프 군단을 향해 연신 엄지와 하트를 날리기 바쁜 철구 아저씨.
한마음 한뜻으로 입 모아 철구 아저씨의 직장을 욕하며 응원하는 청소 도우미분들.
종이봉투에 튀긴 건빵을 담아 철구 아저씨에게 건네는 어머니까지.
몹시도 훈훈하게 돌아가는 집안 꼴을 보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양반아, 지금 여기서 한가하게 시시덕거릴 때가 아니잖수!
“아저씨.”
“알았다. 간다, 가!”
나는 철구 아저씨를 끌고 또 밖으로 나왔다.
소화도 시킬 겸 정원 산책도 할 겸.
쌀쌀한 겨울바람이 휭휭 불어댔고, 모닥불은 타닥타닥 예쁘게도 타올랐다.
“으, 춥다! 꼬맹아, 배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등 지지면서 들으면 안 될까?”
“집 고치고 청소한다고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릴 텐데, 괜찮겠어요?”
“어우, 밤공기가 쌀쌀한 게 딱 좋네! 정신도 번쩍 들고.”
철구 아저씨는 종이봉투에서 갓 튀긴 건빵을 꺼내 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방금 전까지 접시를 쌓아가며 처먹은 인간 같지 않은 먹성이었다.
심지어 부지깽이를 들고서 모닥불 속에 넣었던 감자와 고구마를 뒤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아저씨, 난 여기에 기록하지 않은 정보가 더 필요해요.”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차 회장과 김 비서가 원하는 물건.
우광건설의 뇌물 장부에서 잘라낸 페이지였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네?>
나는 그 대목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심증으로도 충분해요. 물증까진 없어도 상관없어요.”
이번엔 철구 아저씨가 비워둔 공란을 톡톡 두들겼다.
“증거가 없어서 여기에 못 써낸 정보. 아저씨가 심증을 굳히게 되기까지의 정황과 근거들. 내가 원하는 건 그거예요.”
“꼬맹아, 어른의 세계에선 말이야. 심증보다 더 중요한 게 물증이란 거야.”
철구 아저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태성과는 끈이 없어. 그러니 적어도 확실한 증거는 가지고 가야 태성의 높으신 양반들이 듣는 척이라도 할 거고,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거 아냐.”
아저씨는 미간도 팍 찡그렸다.
“우광이 어찌나 잘 틀어막았는지 아주 철벽이 따로 없더라. 언론은 외면했고, 중정은 움직였고, 우광건설 내부 제보자는 죽어버렸고, 태성의 배신자는 숨어버렸지.”
주머니를 여기저기 더듬는 게 담배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조사한 덕분에 두 곳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내가 꼽는 곳도 두 곳인데. 아저씨도?
“젠장, 뇌물 장부를 빼돌린 우광건설 김광필만 안 죽었어도! 자세한 사정은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신변 보호를 요청하더니, 그날 밤 김광필은 자택에서 숨진 채······.”
술술 말 잘하다 말고 왜 끊어?
“됐다. 못 들은 거로 해라. 내가 꼬맹이를 데리고 별소리를 다 하네. 어쨌든 꼬맹이 넌 그만 손 떼.”
“늦었어요. 나도 이미 휘말렸거든요. 아까 봤죠? 태성그룹 회장님을 수행하는 비서실장이 날 찾아와서 이걸 요구하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심지어 뇌물까지 받았어요. 그런데 이걸 이대로 내놔 봐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꼬맹이 너 진짜 뒈지겠구나.”
천만에. 아니거든요?
난 이대로 빈 종이를 김 비서에게 줘도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김 비서가 내게 요구한 건 잘라낸 세 페이지였다.
그게 빈 종이든 아니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게다가 난 뇌물 장부를 작성한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철구 아저씨는 다르다.
‘김 비서의 손에 뒈지는 건 내가 아니라 댁입니다요.’
철구 아저씨는 비장하게 말했다.
“꼬맹아, 걱정할 것 없다. 이 아저씨가 내일모레까지 증거를 찾아오마. 그럼 돼.”
이 양반이 지금 크게 착각하고 있는데.
“아저씨, 잠깐만요.”
“응?”
“따지고 보면 이 문제의 사실 확인과 해결은 아저씨의 몫이 아니거든요?”
“뭐?”
“그건 김 비서님과 차 회장님의 몫이고, 태성그룹의 숙제죠. 그럼 증거는 태성이 찾아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라?”
“아저씨는 차 회장과 김 비서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확실하게 움직일 명분을 만들어 주면 돼요. 그걸로 충분하다고요.”
“그런가?”
“그럼요. 아까 보셨죠? 어쩌다 보니 태성그룹과 끈이 이렇게 닿았네요? 게다가 태성에서 먼저 뇌물까지 갖다 바치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잖아요?”
“그러네?”
“됐죠?”
“됐네? 으하하하! 이거 진짜 됐잖아? 이젠 증거가 없어도 상관없네?”
그렇지.
‘오히려 철구 아저씨가 나서서 태성그룹을 들쑤셔서 확실한 증거를 잡겠다고 나오면 곤란해진다.’
중정이 대놓고 사업체를 들쑤시겠다는데 누가 좋아할까.
떨어지는 주가는 어쩌고? 남들의 이목은 어떻고?
‘청와대가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어. 우광이 태성의 돈을 빼돌려서 전방위로 뇌물 살포를 했으니, 태성과 중정이 협력하여 자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을 기치로 삼아 고위 공직자의 뇌물 수수를 엄금하고 있다.
뇌물은 받은 놈도, 뿌린 놈도, 엮인 놈도 전부 가차 없이 처형할 것이다.
태성 역시 돈을 제대로 간수 못 했으니 그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차 회장의 분노는 치부를 들키게 만든 원흉에게 향할 것이다.
그 끔찍한 사태를 미연에 막고자 내가 나섰다.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아저씨는 여길 제대로 채워줘야 해요.”
아저씨가 대충 적어내면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넣을 생각이다.
전당포 일 하면서 필적 위조하는 기술도 익혀뒀거든.
난 김 비서가 남긴 몽블랑 만년필을 철구 아저씨의 손에 쥐여 줬다.
“직접. 친필로. 심증을 굳히게 된 근거와 정황은 물론 추론과 예상까지. 알고 있는 건 전부 다. 서명 날인도 확실하게.”
“좋다!”
철구 아저씨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충성충성! 네 말이 맞다! 까짓것 뭐 어떻게든 되겠지. 뒷일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하지 뭐!”
그러더니 순순히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또 왜 번쩍거려?’
왜 갑자기 푸석푸석한 갱지에서 황금빛이 번쩍이기 시작하냐?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비밀을 적길래.
‘어? 이건 나도 몰랐던 정보잖아? 이게 이렇게 엮였던 거였어?’
내가 알고 있는 건 태성그룹의 발자취.
즉, 과정은 전부 건너 뛴, 결과로서의 정보다.
하지만 철구 아저씨가 적고 있는 건 원인과 사건 진행 과정이었다.
‘아니, 이 양반은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았지?’
인제 보니 이건 단순히 우광이 끌어다 쓴 뇌물 20억짜리 일이 아니었다.
장차 태성의 계열사 두 곳이 날아가느냐 마느냐,
속수무책으로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놓치느냐 마느냐,
사재 30억을 뜯기느냐 마느냐의 문제까지 한꺼번에 엮인 일이었다.
‘난 그냥 태성건설에 득실대는 구더기들이나 해치우자고 몰아갈 생각이었는데, 이거 판이 더 커지겠어? 돈 냄새가 나!’
어쩐지 황금빛이 요란하게 번쩍대더라니!
이번 건은 정말 제대로 물었다.
역시 철구 아저씨! 믿고 있었다구!
< 물증은 없어도 돼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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