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27화 (27/189)

< 결혼하자! >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솔직히 조금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어머니의 마음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계만 봐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몰랐으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게 사람인데.

어쩌면 아버지는 그동안 마음이 식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나 보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 그 둘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그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느라 넋이 나갔는데, 오가는 눈빛은 깊고도 뜨거웠다.

사랑, 원망, 그리움, 반가움, 걱정, 분노, 기쁨과 슬픔까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달칵.

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던 철구 아저씨가 껄껄 웃었다.

“밖에 많이 춥냐? 역시 목도리랑 털모자가 간절했지?”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만들던 트리 장식을 내려놓고 태성백화점 종이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도련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기 어디에 목도리와 털모자가 있을 겁니다.”

“잘 찾아보면 털장갑도 있고, 귀도리도 있을걸요?”

“털신도 사왔다고 했었는데. 아, 여기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요. 지금은 말고.”

부산을 떨던 어른들이 깜짝 놀라 하던 일을 일제히 멈췄다.

“혹시 어머니와 싸우셨습니까?”

“왜 혼자만 돌아오셨어요?”

“어머니는 어디 계시고요?”

상냥한 걱정이었다.

“아버지가 오셨어요.”

“뭐?”

철구 아저씨는 눈이 동그래져서 유리창 너머를 기웃거렸다.

“처자식을 나 몰라라 한 그 뻔뻔한 양반! 내 오늘 그 낯짝을 좀 구경해야······ 컥!”

어느새 달려온 주인집 할머니가 국자로 철구 아저씨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이노무 새끼가 어디 애 앞에서 애 아빠를 욕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치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한마디만 더 해 봐! 넌 오늘 아침밥도 없어!”

“크흠, 꼬맹아. 미안했다. 이번 한 번만 봐주라.”

철구 아저씨가 쩔쩔매며 뒷머리를 긁었다.

집주인 할머니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정혁이 아빠가 왔다면 식탁에 힘을 더 빡 줘야겠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돼!”

잠시 후 부엌에서는 요란한 칼질과 화려한 불쑈가 시작되었다.

태성그룹 경호원 중 한 명이 내게 트리 장식을 건넸다.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금구슬 장식이었다.

눈썰미가 제법 좋은 경호원이었다.

‘그래, 너 당첨!’

나는 쪼르르 달려가서 트리에 금구슬을 매달며 작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에요?”

“과묵하고, 똑똑하고, 멋진 분입니다.”

내가 궁금한 건 사생활이라고 이 양반아.

“아버지는 약혼하셨다던데요.”

“크흠, 그 부분은 제가 뭐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나는 경호원의 주머니에 슬쩍 성의를 찔러넣었다.

그러니까 만 원짜리 지폐로 한 열 장쯤?

반응은 즉시 왔다.

눈치 빠른 경호원이 쪼그려 앉아서 트리 장식을 고르는 척하며 작게 속삭였으니까.

“아버님께서는 일을 엄청 잘하시고, 또 일을 무척 좋아하신다더군요.”

그러니까 아빠가 일을 잘하고, 일을 좋아하니까 우광과의 혼약은 깨질 리 없단 소리인가?

“아버님께서는 약혼하시자마자 바로 입대하셨고, 전역하자마자 전국팔도를 돌아다니면서 호텔과 리조트, 도로 공사 수주 등 일거리를 따오느라 엄청 바쁘셨대요.”

호오.

“결혼 소리가 나오자마자 중동으로 튀셨다던데요? 활발하게 해외 건설 공사를 따오니까 당장 귀국하란 소리도 못 하고. 그러니까 일을 엄청 잘하고, 또 일을 무척 좋아하시는 거지요.”

아하.

그런 뜻이었군?

“듣자 하니 회장님께서 성준 도련님 몫으로 태성화학을 준비하셨다는데, 굳이 건설을 맡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나 봐요.”

우광과 태성이 공동 설립한 합작회사가 바로 태성화학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나 뭐라나? 덕분에 태성호텔과 리조트가 전국팔도의 가장 목 좋은 곳에 위치하게 됐다니까요?”

솔깃했다.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만다.

“약혼녀란 여자는 약혼식을 올릴 때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성년이 된 후에는 대학에 다니느라 좀처럼 성준 도련님과 동선이 겹치질 않아서. 저희도 그 약혼하셨단 여자분 얼굴을 몇 번 못 봤습니다.”

그러더니 아예 내 귀에 입술을 바짝 붙여서 속삭였다.

“참고로 어머님께서 훨씬 아름답습니다. 훨씬, 훨씬, 훨씬! 한 백만 배 정도?”

경호원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제 비싼 와인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그러니 이건 도로 넣어두세요.”

내가 찔러줬던 돈을 도로 내 바지 주머니 속에 쏙 넣어주는 게 아닌가.

‘역시 세상사 미리 칠하는 기름칠이 최고라니까?’

총수 일가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입장인 걸 뻔히 아는데.

이렇게 우회적으로 알려주다니.

내 그 호의를 잊지 않겠다!

나도 경호원에게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소곤댔다.

“오늘 밤엔 위스키예요.”

“아이고, 그렇게 챙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1926 맥캘란 파인 앤 레어인데도요?”

21세기에 경매가 약 23억 원에 낙찰된 술이다.

한 잔당 약 5,100만 원꼴!

꿀꺽!

태성그룹 경호원은 상기된 얼굴로 모른 척 트리 장식을 달았다.

하지만 뒷짐을 진 손으로 엄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오가는 성의 속에 싹트는 신뢰!

이 훈훈한 공기는 비단 보일러를 팡팡 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련님, 충성충성!”

경례를 올려붙였던 태성의 경호원이 씩 웃으며 손가락 두 개로 브이를 그렸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충성 넘버 투. 맞죠?”

“이름이 뭐예요?”

“유종태입니다. 김영걸 비서실장님 직속 제5경호팀 팀장이죠.”

더러운 일도 도맡아 처리할 능력까지 있다는 소리였다.

“눈치로 여기 이 자리까지 온 몸입니다. 제가 뼈를 묻을 사람은 오직 한 분, 바로 도련님이 아닐까 합니다. 키워주십시오!”

이런. 역시 난 야망 있는 놈이 좋더라!

트리 꼭대기에 순금별을 매달던 철구 아저씨가 엄지를 척 들었다.

“오, 방금 내 꼬봉이 생긴 거냐?”

이 양반은 이럴 때만 촉이 좋지!

나는 모른 체 고개를 돌렸다.

트리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저승사자를 소환했다.

딱.

하지만 평소와 달리 저승사자는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노려보았다.

[차라리 서낭목에 서낭기를 걸어놓든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쯧.]

서낭기는 원래 서낭당이나 그 나무에 걸어놓았던 천을 말한다.

적, 녹, 청, 황, 백의 알록달록한 오색천을 주로 썼다.

[산신제(山神祭)도 아니고, 칠성(七星)굿도 아니고, 석가탄신도 아닌데, 서양 코쟁이 놈들을 따라 이리 오색연등만큼이나 화려한······.]

‘이봐, 수호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아버지랑 우광의 약혼녀 사이가 데면데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이번엔 우리 부모님 사이가 어떤지 알아야지.

그래야 내가 우리 부모님 결혼을 서포트할지 말지를 정할 것 아닌가.

‘닥치고 시야 공유!’

[알았다.]

* * *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제 화톳불을 피웠던 정원 벤치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둘 사이로 퍼석하게 마르고 찬 바람이 불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잘 지냈어?”

“네. 선배도 잘 지냈죠?”

“아니, 난 잘 못 지냈어.”

쓴웃음이었다.

“네가 말 한마디도 없이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는데, 내가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선배, 나는······.”

“오랫동안 찾았어. 미친놈처럼.”

아버지는 마른세수를 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못 찾겠더라. 눈앞이 캄캄했었다.”

“······.”

“자존심 다 버리고 김 비서 앞에 무릎 꿇고 사정했어. 하지만 그 남자조차 네 종적을 놓쳤대.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설마 살해당했나?”

“선배······.”

“돌아버리겠더라. 누가 널 건드렸을까. 왜 건드렸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어.”

어머니는 코트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선배는 다른 여자와 약혼했잖아요.”

“그럼 내가 약혼식 치르기 사흘 전에 입대한 것도 알고 있겠네?”

“네?”

“그럼 제대하자마자 지방으로 튄 건? 결혼 소리 나오니까 중동으로 튄 건? 그동안 사람을 풀어서 널 계속 찾고 있었던 건?”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칠 뿐이었다.

“너 참 독하더라. 어떻게 부모님 댁에 한 번을 안 들러.”

“그건······.”

“네 부모님 옆집을 샀어. 사람까지 고용해 가며. 네가 부모님 댁에 들르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게 벌써 칠 년째야.”

아버지는 어머니의 목에 제가 걸치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둘러주며 말했다.

“아까 그 아이, 내 아이 맞지?”

“······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아버지는 웃었다.

“그럼 나랑 결혼해. 아직도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난 다 버릴 수 있어. 진심이야.”

* * *

‘좋아!’

저승사자와 시야 공유를 끊었다.

‘이 결혼, 내가 서포트한다!’

나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조막만 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문제가 있더라도 내가 다 처리하면 그만이지!’

하여간에 재벌집.

결혼을 아주 우습게 안다니까?

하늘도 끊어내지 못하는 부모, 부부, 자식이란 천륜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부부의 연뿐이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데.

아무리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지만,

사랑해서 한 결혼도 파투 나기 십상이라지만.

그래도 난 결혼은 인륜지대사이고, 살 맞대고 사는 사람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는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처럼 매 순간 날카롭게 찔러댄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강우가 쓰레기 같은 집구석의 여자를 데려왔을 때도.

난 강우에게 여자만 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할 여자인지만 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모든 걸 다 버리고 어머니를 택할 용기만 있다면, 일이 아주 쉬워지는 거지.’

아버지에게 사랑을 강요할 순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어머니를 외면하고 재벌의 삶을 살고자 했다면 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다.

상황은 입장을 만들고, 감정은 세월에 따라 사그라드는 법이니까.

이미 사그라든 감정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까지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되, 만일의 경우 차씨 일가와 연을 끊고 어머니만 모시고 살 각오까지 끝냈던 터였다.

‘그럼 아버지 발목을 잡고 있는 300억짜리 혼약은 내 선에서 정리해 볼까?’

우광과 태성은 혼약을 전제로 공동 출자하여 태성화학을 공동 설립했다.

21세기 물가로 따지면 약 1조 5천억이 넘는 회사였다.

그게 차 회장이 선뜻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을 허락하지 못하는 이유이고, 아버지의 사랑이 축복받지 못하는 원인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파혼을 요구하면 아마 우광에게 태성화학을 넘겨야 하겠지. 차 회장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아. 그러니 그 반대가 되도록 만들면 돼.’

머리가 빠르기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먼저 나서서 파혼하더라도 우광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태성화학을 뜯어낼 수 있도록 그림 한 번 만들어 보자고! 그러려면 이 일엔 철구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하겠는데?’

나는 철구 아저씨를 돌아봤다.

아저씨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지? 혹시 꼬맹이 너도 느꼈냐? 뒷덜미를 타고 오르는 이 기분 나쁜 섬뜩함! 순간 공기까지 음습하게 서늘해졌는데, 방금 또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하여간에 이 양반, 촉은 좋다니까!

나는 철구 아저씨의 머리 위를 힐끔 봤다.

이미 저승사자의 카운트다운도 사라진 상태.

이젠 조심하며 몸 사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철구 아저씨는 두 눈을 껌벅거리다가 순박하게 웃었다.

“아하, 역시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순금별을 달고 싶었던 거지?”

촉은 좋은데, 눈치는 영 꽝인 것으로.

< 결혼하자!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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