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손의 쿵짝짝 >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자 어머니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선 차 회장이 손짓으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고 실장, 거기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우리 정혁이 선물을 쌓아두게.”
“예, 회장님.”
지난번 태성호텔 커피숍에서도 산더미 같은 선물을 들고 있더니.
이번엔 그때보다 더 높은 선물 탑을 쌓고 있었다.
“김 비서, 애 엄마한테 줄 선물은 따로 빼두는 게 낫겠지?”
“이것 역시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같이 트리 밑에 놓아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김 비서는 태성백화점 종이봉투를 잔뜩 들고 있었다.
“도련님 선물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싸뒀고, 이쪽은 종이봉투에 담았으니 한눈에 봐도 구별이 되잖습니까. 도련님도 어머니와 함께 앉아 선물 포장을 뜯는 걸 더 좋아하실 겁니다.”
“좋아! 그럼 애 엄마 선물도 이쪽으로 놓아둬.”
차 회장은 고 실장을 돌아보았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자네가 챙겨.”
“예, 그래야죠.”
“내 새끼를 지킨다고 고생이 많으니 소고기로 사 먹이게.”
소고기란 말이 나오자,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크게 박수 쳤다.
원래 연말 회식은 돼지고기까지다.
그러니 소고기는 확실한 포상이라고 봐야 했다.
“어젯밤에는 무장 강도가 들어서 큰일 날 뻔했다지?”
“예, 듣자 하니 불법 총기까지 소지하고 담을 넘으려 했다더군요.”
“그럼 소고기로는 부족하지. 고 실장, 여기 있는 경호원들 전원 연말 보너스 팍팍 넣어줘! 성과급 200%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 실장은 자신이 공을 세운 것처럼 활짝 웃었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뒤따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인생은 당근과 채찍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못 속인다고.
차 회장도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원래 성의는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법. 그중에서도 역시 현금이 최고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차 회장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성준아, 오랜만이구나.”
“아버지.”
“중동 뙤약볕이 독하긴 한가 보구나. 얼굴이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게, 영 못생겨졌다.”
······우리 아버지에게 못생김이란 단어가 붙을 수 있긴 합니까?
이 도자깃빛 피부가 숯덩이로 보인다면, 그건 차 회장님의 시력 문제가 아닐까요?
“아버지는 여전하시군요.”
“세상 어느 천지에 아들의 생사를 대사관 전보로 확인한단 말이냐? 아들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쯧.”
차 회장은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쩔쩔매지 않았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바빴습니다.”
“애비 앞에서 생색은! 그래, 해외 공사 수주는 많이도 따왔더라.”
“덕분에 태성건설 보유 자금이 넉넉해졌잖습니까. 기쁘시죠?”
“크흠! 태성건설 보유 자금이 늘어나서 기쁘기야 하지!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그건 네 몫으로 물려준 회사가 아니더냐?”
차 회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본인 회사, 본인 일, 본인이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거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생색이야?”
“아버지 회사잖습니까.”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김 비서가 슬쩍 가르쳐 주었다.
“태성건설 지분은 성준 도련님께서 12%, 회장님께서 41% 갖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 아버지 말이 맞네!
원래 회사는 대주주가 주인인 법이다.
“불효막심하게 7년이나 밖으로 나돌면서 전화 한 통을 제대로 안 해?”
“옆에 붙어서 효도하며 사는 자식보다 밖에 나가서 실적을 올리는 자식이 되라 하셨잖습니까.”
“크흠!”
“제 나름대로 효도한 겁니다.”
“······.”
차 회장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집구석에서 밥 얻어먹는 개새끼보다 밖에서 사냥하는 늑대 새끼가 돼라!
평소 차 회장이 누누이 하던 말이었다.
“크흠, 잔소리는 이만하면 됐고. 성준이 너는 이만 집에 들어가 봐라. 네 엄마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어.”
“전 여기에 있을 겁니다. 대신 어머니께는 따로 전화드리겠습니다.”
“7년이야! 네 엄마가 그동안 널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차 회장은 혀를 찼다.
“그놈의 무당집! 아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네 무사안일만 빌었다더라!”
딱 봐도 차 회장은 무신론자였다.
무당집이란 단어에 치를 떨었거든.
“네 엄마를 생각하면 너도 이렇게 모질게 굴면 안 되지. 이게 무슨 불효야?”
차 회장은 어머니를 힐끔 보았다.
“알고 보니 네 엄마가 돈 봉투 때문에 단단히 밉보였던 모양인데. 7년이나 마음고생했으면 됐어. 이만 집으로 들어가!”
“이곳에도 절 7년이나 기다린 사람이 둘이나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제 아들은 평생 절 기다렸습니다. 그런 아이를 두고 이대로 돌아가라 하십니까?”
“······.”
차 회장은 이번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다가, 마침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봐서 딱 하루만 모른 척해 주마. 더는 나도 양보 못 한다!”
“전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놈이 어딜? 가출이라도 하겠다는 뜻이야?”
“필요하다면 해야죠. 이왕이면 가출이 아니라 결혼 후 독립이 더 낫겠군요.”
“결혼?”
“예.”
아버지는 불안한 듯 바라보는 어머니의 어깨를 보란 듯이 끌어안았다.
“전 이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뭐야? 우광과의 혼사는 어쩌고? 300억짜리 사업이 걸린 일이야!”
“우광과의 혼사도 아버지께서 결정하셨고, 300억짜리 사업도 아버지께서 추진하신 일입니다. 본인이 벌인 일은 본인이 책임지셔야죠.”
“이노무 자식이!”
“제가 벌인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제 처자식은 제가 챙길 겁니다.”
“차성준!”
마침내 차 회장이 폭발하고 말았다.
“기어이 내가 칼을 휘둘러야 네가 정신을 차릴······!”
거기까지!
나는 차 회장에게 우다다다 달려갔다.
“할아버지!”
나는 차 회장에게 답싹 매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날 보고 차 회장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의 어린애 공격에 어른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날 돌아봤다.
“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무서워요.”
“방으로 들어가거라.”
“그만 화내면 안 돼요?”
“이건 어른들의 일이다. 애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
“우리 아빠한테 화내지 마세요. 네?”
나는 차 회장에게 매달려 칭얼거렸다.
차 회장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이었지만, 필사적으로 매달린 나를 억지로 밀쳐 떼어내지는 못했다.
“할아버지, 나 안아줘요! 네?”
이게 바로 어른들의 사정을 무시할 수 있다는 어린애의 특권!
차 회장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마지못해서 날 안아 들었다.
대뜸 날 김 비서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말이다.
“정혁아, 너는 잠시 김 비서랑 함께 밖에서 눈사람이나······.”
“할아버지, 하나만 골라보세요.”
나는 차 회장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성질대로 하시겠다면 잘라낸 세 페이지는 못 드려요.”
“······!”
차 회장은 모든 동작을 우뚝 멈췄다.
“줄줄 새는 물독을 막으셔야죠. 왜 우리 엄마의 눈에서 눈물을 뽑으려 하세요.”
“······.”
차 회장은 화염 불도저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 성질머리가 대단하다.
하지만 성질부릴 때와 안 부릴 때를 구별하지 못하고 날뛰기만 했다면 절대로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차 회장의 자리는 산전수전 다 겪고, 웃으면서 마음에 칼을 숨겨야 하는 자리였다.
차 회장은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는 누구보다 차가운 사람이었다.
“20억짜리 뇌물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셨던 거 아니었어요?”
나는 차 회장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차 회장은 아버지와 싸우거나, 어머니와의 결혼을 담판 짓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전 오늘 아빠랑 처음 만났어요. 그러니 오늘 하루만 할아버지가 참아주시면 안 돼요? 네?”
차 회장은 여전히 아버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입술이 달싹이던 것도 잠깐.
“대신 앞으로 차 회장님이란 말은 쓰지 말아라.”
“절대로 안 쓸게요! 약속!”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거렸다.
“우리 정혁이 앞에서 화를 낼 수야 없지. 자칫 애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일 뻔했구나.”
“고마워요,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볼에 쪽, 뽀뽀했다.
무섭게 구겨졌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치솟았던 눈썹도 제자리를 되찾았고, 파르르 떨던 입꼬리는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보면서 혀를 찼다.
“네가 아들은 정말 잘 얻었구나. 이게 다 금쪽같은 내 새끼 덕분인 줄이나 알아라.”
할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정혁이랑 잠깐 놀다 가지 않을 수 없지. 김 비서!”
“예, 회장님.”
“내 새끼 감기 들지 않게 외투, 장갑, 목도리, 귀도리, 털모자에 털신까지 잘 챙겨서 따라오게.”
“예.”
나는 얌전히 할아버지의 목을 껴안은 채 몸을 맡겼다.
할아버지는 내 등을 쓰다듬으면서 걸어나갔다.
“착한 것. 처음 보는 애비도 애비라고 편을 들다니.”
이쯤에서 마무리 지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처자식을 버릴 수 없어요.”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으나, 이내 모른 척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게 고마워서 할아버지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끝까지 허락 못 한다 하시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나갈 생각입니다.”
할아버지는 묵묵히 걸어갔다.
구두를 구겨 신고,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한겨울 찬 바람이 휭 불어오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펄펄 내렸다.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수증기가 길게 퍼져나갔다.
토닥토닥.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아버지의 등을 두드렸다.
“힘들게 키워놨더니 아버지의 마음도 몰라주고. 이건 우리 아빠가 나빴어요.”
아버지가 나와 어머니를 택했기에 할 수 있는 위로였다.
할아버지는 작게 웃었다.
“아들은 몰라줘도 손자가 알아주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구나.”
“역시 우리 할아버지가 대인배예요. 멋져요.”
나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정혁아.”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많이 밉지? 엄마 아빠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죠?”
“밉기는. 너희 엄마 예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할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춰 새하얗게 변한 정원을 바라봤다.
가지마다 눈이 쌓였고, 너른 잔디밭은 흰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네 엄마가 좋은 여자란 거 안다. 널 지키고 책임지느라 홀로 고생 많이 했다는 것도 잘 알고.”
“······.”
“하지만 할애비에게도 지키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어. 태성화학 직원이 2천 명이야.”
혼사에 걸렸다는 그 300억짜리 사업체.
21세기 시세로 약 1조 5천억 원이 넘는 회사.
그게 문제였다.
“2천 명의 일자리가, 그들의 가족까지 족히 8천 명의 입이 이 할애비에게 달렸다. 우광이 구조조정을 하겠다며, 당장 팔아버리자며 날뛰는 것을 이 할애비가 막고 있어.”
우광은 4년 전에 철강 사업에 뛰어들어 적자를 보고 있다.
돈이 궁해지니, 만만한 협력 사업체를 정리해 현금을 뜯어낼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자금 사정이 안 좋다면 우광의 알짜 계열사나 내다 팔면 될 것을.
일부러 태성을 흔들면서 물고 늘어지다니.
“시작은 혼사를 조건으로 한 동업이었으나, 지금은 내 식구, 내 직원, 내 회사가 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할아버지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를까.
“미안하구나, 정혁아. 할애비가 못나고 무능해서. 아들을 팔아서 사업을 시작했으니, 아들에게 경멸받아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다 자업자득이다.”
“아직이에요. 그렇게 체념하시긴 일러요.”
나는 씩 웃었다.
“우광에게서 태성화학을 빼앗아 오면, 이 결혼 허락해 주실래요?”
할아버지는 두 눈을 껌뻑였다.
< 조손의 쿵짝짝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