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30화 (30/189)

< 할아버지의 통 큰 약속 >

할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뭐? 우광에게서 태성화학을 뺏어 와? 이게 무슨 친구 장난감 뺏어 오는 일인 줄 아느냐?”

“할 수 있다면요?”

“사업이란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말이에요. 그 300억짜리 족쇄만 없다면, 우리 엄마 아빠의 결혼을 허락해 주실 거예요?”

“흠, 그럼 내가 굳이 이 결혼을 반대할 까닭도 없긴 하군.”

좋아!

“하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야. 사업에 걸린 돈과 사람과 이해관계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어린 너는 아직 모르겠지.”

300억짜리 사업.

21세기 시세로는 약 1조5천억 원짜리 회사이니, 그 족쇄란 게 얼마나 무거운가.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조금 더 크게 되면 너도 알게 되는 날이 올 게야. 그때는 이 할애비를 조금쯤 이해해 주려나?”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 거잖아요.”

내 머리를 쓰다듬던 할아버지의 손이 멈칫했다.

“그걸 풀어내겠다는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죠. ”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의 손등을 작게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내가 건네는 작은 응원이었다.

“한번 믿어 봐요. 나도, 우리 아빠도.”

이건 내가 건네는 작은 위로였다.

‘난 이미 태성화학을 꿀꺽할 계획을 다 세워뒀거든!’

할아버지는 묘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름진 커다란 손과 고사리 같이 포동포동한 작은 손.

크기도, 혈색도, 두께도 전부 달랐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딘가 닮아있었다.

“믿지. 내가 왜 내 아들을 못 믿겠어. 믿었으니까 여태 밖으로만 나돌아도······.”

할아버지는 작게 혼잣말을 하다 말고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내 손 위에 당신의 다른 손을 마저 얹었다.

따뜻했다.

“할애비는 이만 가 보마.”

“여기까지 왔으니, 저랑 놀아주신다면서요?”

이번에도 어린애의 특권을 쓰기로 했다.

우리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으니, 아들인 나라도 풀어줘야 응어리가 덜 남지.

아무리 가족이라도, 아니, 가족이기에 더 섬세한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한 법.

“저랑 같이 눈사람 만들어요. 전 눈사람 한 번도 안 만들어봤단 말이에요. 네?”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우리 강우가 어릴 때부터 곧잘 눈사람을 만들어주곤 했거든.

“그건 네 아빠랑 해. 할애비한테 첫 눈사람을 양보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느냐?”

“아까울 게 뭐 있어요? 할아버지랑 만들고, 아빠랑 또 만들면 돼요.”

“크흠!”

“바쁘세요? 그럼 딱 하나만 같이 만들어요. 네? 그래도 안 돼요?”

“크흠! 그럼··· 딱 하나만이다.”

할아버지는 눈밭을 힐끔 보았다.

“이 할애비가 다른 건 몰라도 굴리는 건 제법 잘하는 편이다. 눈도 잘 굴리고, 돈도 잘 굴리고, 사업도 잘 굴리고, 부하 직원들도 제법 잘 굴리지.”

할아버지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자 김 비서가 정색하며 달려와서 할아버지의 소매를 내렸다.

“감기 드십니다.”

“나 아직 이딴 일로 감기 들 만큼 골골한 몸뚱이 아니야.”

김 비서는 가죽장갑을 꺼냈다

“장갑은 끼시죠.”

“장갑 같은 거 없어도 끄떡없다니까?

나도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장갑을 안 끼면 저도 안 낄 거예요. 할아버지가 소매를 걷으면 저도 걷을 거고요. 저는 할아버지 손자니까요.”

“크흠! 나는 끄떡없지만, 우리 금쪽같은 손자는 감기 걸리면 안 되지. 김 비서, 장갑!”

“여기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나는 나란히 장갑을 끼고 눈밭으로 들어갔다.

* * *

조손이 사이좋게 눈사람을 만드는 동안.

김 비서와 고 실장은 처마 밑에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근육질의 거한인 고 실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회장님이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군.”

김 비서도 동의했다.

“예,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아이들이 주는 생기와 활력이란 참 대단한 거야.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난다니까?”

“글쎄요.”

김 비서는 이번엔 동의하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건 아마도 상대가 정혁 도련님이시기 때문일 겁니다.”

고 실장은 김 비서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김영걸답지 않은 말인데?”

“지켜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은테 안경 너머로 차갑게 번뜩여야 할 눈빛이 오늘따라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런 김 비서를 보면서 고 실장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야?”

“아주 특별하신 분입니다.”

“흐음.”

* * *

할아버지는 손을 탁탁 털었다.

“할애비는 이제 그만해야겠다.”

“고작 눈사람 일곱 개밖에 안 만들었는데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나, 그리고 큰아빠, 작은 아빠예요. 고모도 있다면서요?”

“나머지는 네 아빠랑 마저 만들어. 이거야 원, 이 할애비가 눈덩이를 몇 개나 굴린 줄 아느냐?”

“몸통이 일곱 개에 머리통이 일곱 개니까 총 열네 개밖에 안 굴렸는데요?”

“그것참, 두 개만 굴린다는 게 열네 개나 굴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내 옷자락도 탁탁 털어주었다.

어느새 장갑도 젖고, 옷도 젖고, 운동화도 젖고, 머리카락도 젖었다.

덕분에 한겨울 찬 바람이 들 때마다 부르르 떨렸다.

“안 되겠다. 우리 금쪽같은 내 새끼가 감기 들면 안 되지. 이만 들어가거라.”

“좀 젖어도 상관없어요.”

“눈사람이야 다음에 또 만들면 돼. 할애비는 이만 가봐야겠다.”

“그럼 약속!”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원래 난 새끼손가락 대신 엄지 지장만 취급하고, 말보다 문서를 더 믿지만.

이것도 어린애의 특권이라 치지 뭐.

“다음에도 우리 가족 눈사람을 만들면서 우리 아빠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시는 거예요?”

“그것도 네 아빠한테 들어. 하도 떠들었더니 목까지 마르다!”

할아버지는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땀 흘리고 기분 좋게 웃는 얼굴.

그제야 나도 방긋 웃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정말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럼 얼른 들어가서 선물 까 봐야지. 김 비서!”

“예, 회장님.”

할아버지는 날 덥석 안아 들고 눈밭에서 걸어 나왔다.

김 비서는 이미 준비해 둔 커다란 목욕수건으로 나를 닦아주었다.

고 실장은 할아버지를 맡았다.

“안에 들어가서 뜨거운 꿀물부터 마셔라. 속이 따뜻해져야 배탈이 안 난다.”

“이대로 그냥 가시게요? 이건 필요 없으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 지갑을 꺼냈다.

매번 호주머니에 중요한 물건을 쑤셔 넣는다면서 요런 걸 주더라고.

눈치 빠른 경호원, 자칭 넘버 투, 내 수족을 자처하는 유종태 경호팀장이 내게 바친 뇌물이었다.

나는 곱게 접어두었던 갱지를 꺼냈다.

물기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상태였다.

“아차차! 손자 재롱에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군. 김 비서!”

“예, 회장님.”

할아버지는 내가 건넨 서류를 김 비서에게 넘겼다.

“우리도 가져온 뇌물을 줘야지.”

“여기 있습니다, 도련님.”

김 비서가 내게 서류봉투를 넘겼다.

“태성건설 지분 1%입니다.”

“할아버지, 너무 후려치시는 거 아니에요?”

태성건설은 무능한 사장과 임원진들의 방만한 경영으로 최근 주식값이 똥값이었다.

“지금은 적어 보여도 지하철 2호선 공사를 성공적으로 따내면 곧 크게 오를 게다.”

“1,000만 원짜리 1등 주택복권도 당첨되기 전에는 100원이에요.”

나중이야 어떻든, 현 시세라면 태성건설 주식 1%는 1억 원의 가치가 없다는 소리였다.

“결국 떼어먹겠다는 소리네요?”

“태성건설은 네 아비의 몫이야. 그러니 다른 계열사 주식보다 훨씬 값질 텐데?”

그러니까 한정 가격이란 소리군?

“우리 아빠한테 줄 걸 나한테 주면서 생색내시겠다고요?”

“원래 회사는 대주주가 왕인 법이다. 할애비에게 받은 주식이라면 네 아빠도 너한테 꼼짝 못 할걸?”

할아버지는 뻔뻔하게 말했다.

나는 혀를 찼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

“난 우리 아빠 밥그릇을 뺏어 먹고 싶은 생각 전혀 없어요. 그러니 이것 말고 다른 회사의 것으로 받을래요.”

나는 태성건설 주식이 든 서류봉투를 도로 밀어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그건 안 되지. 아무리 손자가 예뻐도 내 자식의 밥그릇까지 빼앗아 줄 수는 없다.”

다른 계열사는 다른 자식들의 몫이라는 소리였다.

“차명이건 아니건, 태성그룹의 다른 계열사 지분을 1억 원어치나 한 사람에게 물려주면 그룹 전체가 발칵 뒤집혀. 그러니 애초에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내가 그걸 모를까.

“할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들면 안 되죠. 그럼 아예 태성 대신 다른 회사의 것으로 받을게요.”

“다른 회사? 혹시 태성화학이라도 네 몫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그러하냐?”

그렇게 떠보셔도 소용없습니다.

태성화학은 내가 우리 어머니 혼수로 챙겨 보낼 회사고요.

내 몫은 내가 알아서 챙겨 가야죠.

‘내 몫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클 겁니다. 곧 오일 쇼크 때문에 이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힐 만한 공룡 매물이 나올 예정이거든요.’

할아버지가 은근슬쩍 엄포를 놓았다.

“만약에 태성화학을 네게 빼앗아 준다고 치자. 그러면 네 큰아빠와 작은아빠는 물론 고모도 가만히 있지 않아. 네 엄마 아빠가 무척 곤란해질 게야.”

“그럼 태성화학도 말고요.”

나도 은근슬쩍 할아버지를 부추기기로 했다.

“새 회사나 망한 회사 같은 거요. 그건 안 비싸잖아요.”

“오호, 비상장 회사나 인수 합병할 만한 회사를 사 달라? 많이들 쓰는 증여 방법이지.”

내가 일부러 개떡같이 말했는데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는구만!

할아버지는 그제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거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다. 태성건설 주식 대신 다른 회사를 사 주기로 하자!”

좋았어!

바로 지금 이 말을 기다렸다고!

처음부터 협상이 필요한 뇌물 조건을 내세운 까닭은 할아버지와 담판 지어서 이 약속을 꼭 받아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약속하는 거죠?”

“물론이지. 할애비가 그 정도 능력은 있어.”

좋았어! 바로 이거지!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방긋 웃으며 동전 지갑에서 곱게 접었던 새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그 약속, 여기 적어주세요.”

“······.”

“난 말보다는 문서를, 새끼손가락 약속보다는 서명날인한 지장을 더 믿거든요.”

“······.”

할아버지는 김 비서를 돌아봤다.

“역시 내 손자로군. 봤지? 피는 못 속인다니까?”

왠지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김 비서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고 실장은 사색이 되어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회사는 완전, 전부, 몽땅, 내 몫으로 넘겨주셔야 해요?”

“그러니까 지분 100%가 네 몫이니 건들지 말라는 말이렷다? 까짓것, 비상장 회사나 말아먹은 회사가 뭐 얼마나 한다고. 그 정도야 내가 오늘 당장 하나 만들어 줘도 그만이지.”

“필요하다면 진심으로, 모두 다 함께, 무조건 날 도와주시는 거죠?”

“전심전력으로 협조해 달라고? 물론이지. 난 회사 일에는 절대 허투루 굴지 않아. 하나라도 제대로 키우려면 공들여야지.”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 할아버지 손에 쥐여 주었다.

“그것도 적으세요.”

“······.”

할아버지가 김 비서를 돌아봤다.

“역시 내 새끼야. 이뻐 죽겠네. 그래, 일곱 살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

고 실장은 급기야 들고 있던 목욕수건을 툭 떨어뜨렸다.

“회장님, 정말 이래도 괜찮으십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비상장 회사 증여? 인수 합병 추진? 내가 그 정도 선물도 못 챙겨줄까 봐?”

할아버지는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서명날인까지 확실하게 마치고 각서, 아니, 차용증을 내게 내밀었다.

‘와!’

물론 이 저택의 서류보다 백 배쯤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열전구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 같은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서류였다.

< 할아버지의 통 큰 약속 > 끝

ⓒ 오소록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