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 같은 일 >
왜 우리 아버지는 서 있기만 해도 멋있는 거지?
진짜 뉘 집 아버진지 몰라도 잘나긴 정말 잘났다.
화보가 따로 없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봤다.
“어이, 꼬맹아. 우리 같이 선물 뜯······ 읍!”
철구 아저씨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눈치 빠른 경호원, 자칭 넘버 투, 내 수하를 자처하는 유종태 경호팀장이었다.
유종태가 태성그룹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얘들아, 이 눈치 없는 곰탱이 좀 치우자.”
“넵!”
“읍읍읍!”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일곱이나 달라붙었지만, 철구 아저씨는 근육으로 버티고 섰다.
경호원들이 질린 눈빛으로 철구 아저씨를 볼 때, 유종태는 눈을 부라렸다.
“오늘 처음 만난 부자(父子)라고요. 어딜 끼어들려고?”
“읍? 으으읍······.”
철구 아저씨가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그렇게 철구 아저씨는 질질질 끌려 나갔다.
나는 쪼로로 달려가 아버지의 옆에 섰다.
“무슨 생각 해요?”
“실망했겠구나, 하는 생각.”
“······?”
아버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빠가 빈손으로 와서.”
빈손이라.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가 잔뜩 사온 화려한 선물 상자를 향해서.
고 실장이 산더미처럼 들고 와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잔뜩 쌓아 놓은 것들 말이다.
“에이, 괜찮아요. 난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아빠가 선물인걸요.”
진심이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가방을 뒤졌다.
“대신 이거라도 줄까 한다.”
궁금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날 번쩍 들어 어깨에 태웠다.
목마였다.
“우와!”
순식간에 눈높이가 달라졌다.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손에 닿을 듯이 반짝였다.
너무 신난 나머지 나는 활짝 웃었다.
아버지는 다른 팔을 길게 뻗었다.
찰칵!
위이잉.
즉석 사진기였다.
흔히들 폴라로이드 사진기라고 하는 거 말이다.
이 시절이라면 아직 한국에는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을 텐데.
“잠시만 기다려라. 곧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테니.”
아버지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팔랑팔랑 부쳤다.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얼굴.
“아아······!”
아버지와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누가 아버지와 아들 아니랄까 봐.
아주 똑같은 표정이었다.
“진짜 마법 같아요.”
“그렇지?”
아버지와 이렇게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것.
아버지, 내겐 그게 기적이자 마법 그 자체입니다.
당신은 아마 모르겠지만.
* * *
우광건설 사장실.
우광건설 사장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출근하기가 무섭게 줄줄이 걸려오는 항의 전화 때문이었다.
“김 의원님, 일단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제가 먼저 사실 확인부터······ 김 의원님? 여보세요?”
전화는 이미 끊긴 후였다.
“이게 대체 몇 통째야!”
쾅!
우광건설 사장은 전화기를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게 내려놓았다.
“왜 아침 댓바람부터 의원들 입에서 뇌물 먹고 탈 났다는 소리가 나와!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뱃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돈 준다니까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굽실대더니! 인제 와서 언제 봤냐는 듯 입 싹 닦고 날 추궁해?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들!”
따르릉. 따르릉!
“그 빌어먹을 전화선부터 당장 뽑아!”
“예.”
이제야 사장실이 좀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미 우광건설 사장의 속은 뒤틀릴 대로 뒤틀린 후였다.
“이 새끼들이 한날한시에 쥐약을 먹고 돌아버린 게 아니라면 단체로 이 지랄이 날 리가 없는데.”
뇌물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먹은 놈은 입 닥치고 돈값을 해야 한다는 것.
돈값도 하기 전에 물주에게 게거품을 문 채 달려드는 건 명백히 룰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정치하는 놈들은 죄다 한가락 하던 놈들이야. 룰을 몰라서 저리 미쳐 날뛰는 것은 아닐 테고.’
똑똑똑. 벌컥!
“사장님, 부사장님께서 지금 급히 전화 연결을 요청하십니다. 큰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따라 부사장까지 왜 이리 야단법석이야?”
“부사장님께서는 일본인 관료들과 기술 협약을 체결하러 태성호텔에 가셨습니다. 저렇게 다급하게 전화 요청을 하신다는 건 아무래도······.”
“설마 기술 협약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우광건설 사장은 안색이 변했다.
태성이라면 또 모를까.
우광은 건축, 특히 토목 기술이 태성에 비해 몇 수 뒤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공들이지 않았던가.
“일본의 지하시설 토목공법을 얻지 못하면 우린 지하철 2호선 공사를 시작도 못 하고 손 떼야 해!”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문제였을까.
분명 일본 측과도 순조롭게 협상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서로 웃으면서 앞날을 약속했었는데.
“최 비서, 지금 당장 전화선 꼽아!”
“방금 전화선 연결을 막 끝냈······!”
따르릉!
“부사장인가?”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일본 교통국의 요시모토를 비롯해 일본 제도고속도교통영단 사장까지 전원 일본으로 돌아가겠답니다!
“뭐야?”
어제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얼마나 화기애애하게 좋았는데.
-세 시간 뒤 출국 예정이랍니다! 지금 택시 못 타게 뜯어말린다고 몸싸움까지 났습니다!
우광건설 사장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든 잡아! 공항에 못 가도록 물고 늘어지라고! 비행기표를 찢어! 여권부터 빼앗아!”
외교상의 큰 결례가 될 수도 있다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일단 잡아놓고 나서 대화로 천천히 해결하면 된다.
무례란 건 두둑한 성의로 무마할 수 있는 문제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갈 때까지 버텨!”
전화기를 내던지며 우광건설 사장이 뛰쳐나갔다.
그 뒤를 최 비서가 따라 달렸다.
우광건설 사장은 자동차에 오르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태성호텔로 간다! 전속력으로! 악셀 밟아! 있는 대로 팍팍!”
* * *
아버지는 작은 나무집게를 가져와서 사진을 트리에 달아두려 했다.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눈높이에 딱 맞게.
아버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희한하군. 어째 금구슬이 트리 아래에만 잔뜩 매달려서······.”
“아, 그건 내 취향이에요.”
나는 방긋 웃었다.
“난 커다란 금덩이를 좋아하거든요.”
“아주 획기적이고 예술적인 트리다. 잘했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살며시 쓸어주었다.
내 눈높이에 딱 맞게 우리 부자의 첫 사진이 걸렸다.
사진 속 우리는 행복해 보였다.
"정혁아, 그동안 아빠가 없을 때 엄마를 지켜줘서 고맙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작게 두드려 주었다.
"앞으로는 아빠가 우리 정혁이와 엄마를 지켜주마."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고, 눈을 감아도 기분이 좋았다.
스윽.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아빠.”
나는 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엄마와 나를 택해줘서.”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거실 통유리창이 보였다.
아직도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펄펄 내렸다.
눈사람 가족 위에도 솜사탕처럼 사르르 내려앉았을 터였다.
“정말 기뻤어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 작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처럼 단단하게.
아버지는 그렇게 내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아까는 미안했다. 많이 무서웠지?”
“아니에요.”
나는 씩 웃었다.
“멋졌어요. 진짜로!”
“멋지긴 네가 더 멋졌지.”
아버지도 씩 웃었다.
“엄마 울지 않게 할아버지를 막아서던 모습, 정말 용감했다. 많이 무서웠을 텐데.”
왜 가슴이 간질거리는 걸까.
“가만히 보니까 나보다 네가 낫구나. 고맙다. 할아버지 마음도 달래줘서.”
왠지 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눈을 돌렸다.
크리스마스트 트리에 걸려 있는 아버지와 내 사진이 눈에 밟혔다.
아차!
“아빠, 잠깐만요!”
나는 아버지를 두고 우다다다 달려갔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벌컥!
“엄마!”
“응?”
“아빠가 정말 신기한 걸 가져왔어요! 처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요!”
21세기를 살다 온 내게는 하등 신기할 것 없는 물건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다를 터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어머!”
찰칵!
위이잉.
어느새 방문 앞까지 따라왔던 아버지의 솜씨였다.
어머니는 불시의 공격에 눈이 동그래졌다.
“방금 그거 뭐였어요? 사진기?”
“비슷해.”
아버지는 이번에도 폴라로이드 사진을 팔랑팔랑 부쳤다.
조금씩 점점 선명해지는 얼굴.
사진 속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역시나 천사처럼 예뻤다.
“예쁘다.”
아버지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정말 예뻐요!”
어머니는 순간 얼굴이 화르륵 빨개졌다.
두 손을 뺨에 대면서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폴라로이드 사진이 신기하긴 한지, 두 눈은 사진에 고정된 채였다.
“어쩜 이렇게 사진이 바로바로 나오죠? 사진관에 인화하러 가도 꽤 오래 걸리잖아요.”
어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정말 마법 같아요.”
“그렇죠? 진짜 신기하죠? 아빠가 내 선물이랬어요!”
나는 활짝 웃었다.
아버지도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엄마까지 챙기다니. 착하구나.”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꿈처럼 몽롱했다.
내겐 지금 이 순간이 정말 마법 같아서.
제발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사진 찍어요! 거기에 우리 가족 사진을 걸어둘 거예요!”
“어어? 알았어, 정혁아. 조금만 천천히.”
“빨리요! 얼른요!”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내려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섰다.
어느새 튀어나온 눈치 빠른 경호원, 자칭 넘버 투, 내 수하를 자처하는 유종태 경호팀장이 손을 들었다.
“오늘은 제가 사진사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순순히 유종태에게 즉석 사진기를 넘겼다.
사진기를 넘겨받은 유종태는 전문 사진기사라도 된 것처럼 구체적인 포즈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어머님과 아버님, 더 바짝 붙어서! 더 다정하게! 어깨에 손 올리고! 어머님, 아버님 어깨에 푹 기대세요! 완전히 몸이 파묻힌다 싶을 정도로! 오케이!”
역시.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이란.
찰칵! 위이잉.
“아버님, 우리 꼬마 도련님을 더 꽉 안아주세요! 어머님, 아버님 품에 쏙 안겨야죠! 으스러지도록 허리를 껴안습니다! 오케이!”
찰칵! 위이잉.
크리스마스 트리가 우리 가족의 웃음으로 풍성해질 것 같다.
* * *
차 회장이 탄 차는 태성호텔로 부드럽게 진입했다.
운전대를 잡은 고 실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싸움이로군요.”
태성호텔 정문 앞에서 여러 사람이 서로 엉켜 있었다.
화가 잔뜩 난 일본인은 고래고래 일본어로 욕하고,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물고 늘어졌다.
심지어 어떤 놈은 택시 앞 도로에 대(大)자로 드러누운 채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차 회장은 창문을 내렸다.
“태성호텔 경비들은 대체 뭣들 하고 있어! 정문 앞에서 이렇게 큰 소란이 벌어졌었는데, 수수방관 나 몰라라 하고 있다니!”
“회장님, 오셨습니까?”
태성호텔 지배인이 낭패한 모습으로 뛰어왔다.
늘 단정했던 머리는 쑥대머리가 되었고, 칼각을 세워가며 빳빳하게 다렸던 옷도 잔뜩 구겨지고 찢겨 있었다.
이들을 뜯어말리느라고 제 딴엔 이만저만 고생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 실장, 이 소란은 자네가 정리해!”
“예, 알겠습니다.”
고 실장은 차에서 내렸다.
2미터 근육질의 거한이 성큼성큼 걸어와 크게 외쳤다.
“전원 지금 즉시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십시오!”
말투는 제법 정중했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쇠파이프를 들고 정승처럼 떡 버티고 서자 위압감이 대단했다.
“경고를 무시한다면 다쳐도 책임 안 집니다!”
< 마법 같은 일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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