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탈 털다(1) >
고 실장은 쇠파이프를 풀 스윙으로 휘둘렀다.
살벌하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자 다들 움찔했다.
고 실장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엉켜있는 사람들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멈출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맞으면 골로 갈 게 분명한데, 고 실장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척. 척. 척. 척!
어느새 태성호텔 경비원은 물론이고, 고 실장의 휘하 경호팀까지 두 줄로 따라붙었다.
“다, 당신들은 뭐야! 건달이야?”
“한낮에 왜 쇠파이프를 휘둘러! 사람이 다치면 어쩔 거야!”
“오지 마! 저리 가라고!”
고 실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어어? 어엇!”
그러니 고 실장의 쇠파이프를 피해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장내의 소란은 간단하게 진압되었다.
뚜벅, 뚜벅, 뚜벅.
고 실장은 바닥에 주저앉은 일본인에게 다가갔다.
“요시모토 상.”
고 실장은 쇠파이프를 내리고, 대신 손수건을 내밀었다.
요시모토는 손수건을 낚아채서 땀을 닦았다.
“빌어먹을!”
“손 빌려드립니까?”
“됐습니다!”
요시모토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구겨진 양복을 탁탁 털었다.
차 회장이 눈짓하자 태성호텔 직원들이 달려와 바닥에 내팽개쳐진 일본인들의 짐을 수습해 주었다.
태성호텔 지배인이 즉시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태성호텔 서비스가 미흡했던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태성호텔에서 왜 사과합니까? 무례하게 들이닥쳐서 깽판을 친 건 우광인데.”
요시모토는 바닥에 가래침을 퉤 뱉었다.
“내 이 새끼들, 다시는 상종을 하나 봐라!”
“우광이라······.”
인제 보니 우광건설 부사장이 끼어 있었다.
자연히 차 회장의 눈썹은 위로 올라갔다.
“우광이 왜 남의 영업장에서 행패를 부려?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것이······.”
차 회장은 고개를 돌렸다.
“요시모토 상, 공항으로 가는 길입니까?”
“예. 이 새끼들 때문에 지금 출국 시간이 빠듯합니다. 눈도 내리는데 택시는 저 모양이고.”
“고 실장, 경호팀 애들 붙여서 요시모토 상과 일행분들을 공항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고 실장의 손짓에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즉시 차문을 열었다.
요시모토와 일본인은 차에 오르기 전에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차 회장님. 이 빚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더니 우광건설 부사장과 그쪽 사람들을 향해 매섭게 노려보았다.
“우광건설, 내 이 빚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요시모토와 일본인들은 차 회장이 내어준 차를 타고 미련 없이 떠났다.
부와아아앙!
일본인들이 탄 차가 태성호텔을 완전히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검은 차 한 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왔다.
끼이이익!
차가 멈추자마자 벌컥 문이 열렸다.
우광건설 사장이 용수철처럼 밖으로 튀어나왔다.
“부사장, 일본인들은 어디 있나! 자넨 왜 거기서 멍하니 있어?”
“아니, 이게 누구야?”
차 회장은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자네 요즘 태성호텔에서 자주 보여? 인제 보니 우리 호텔 단골 고객이셨구만?”
“차 회장님이 왜 여기······.”
우광건설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지난 번 호텔 커피숍에서 똑같은 물음에 어떤 대답을 받았는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우광건설 사장은 직감했다.
‘일이 완전히 어그러졌구나!’
일본인들은 보이지 않고, 태성 쪽 사람들은 적의를 드러내고, 우광건설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쩔쩔 매고 있다.
한눈에 봐도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결국 놓쳤나?”
“면목 없습니다, 사장님.”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고 늘어지라고 했는데, 그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남의 영업은 그만 망치고 다들 이만 썩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차 회장이었다.
“부하 직원을 훈계하고 싶거든 자네 회사로 돌아가서 따지든가. 왜 여기서 지랄이야?”
우광건설 사장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일본인을 놓쳤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지하 시설 토목 공사 기술이 없는데, 무슨 수로 지하철 공사를 맡을까.
우광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다.
“차 회장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오늘 태성호텔에 온 것은 다 회장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개소리도 자네 회사에 돌아가서 하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차 회장은 콧방귀를 끼며 등을 돌렸다.
김 비서와 고 실장이 그 뒤를 따랐다.
우광건설 사장은 헐레벌떡 뛰어왔다.
“차 회장님께 우광과의 공동 입찰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일없네.”
“절대로 손해볼 일은 없으실 겁니다. 섭섭하지 않게 조건을 따져 양보하겠습니다. 태성의 입장에서도 그게 이득이 아닙니까?”
“흥!”
“우리와 입찰가 경쟁을 하다가 마진을 깎아가며 손해를 보느니, 차라리 우리와 손을 잡고 대역사(大役事)를 보란 듯이 성공시켜 봅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공사가 아닙니까?”
“웃기는군.”
차 회장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왜? 자신이 없나 보지? 요즘 일이 영 잘 안 풀리나 봐?”
“그······!”
“공사는 원래 능력껏 따내는 거라며? 왜 이제 와서 지랄이야?”
우광건설 사장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감췄다.
하지만 차 회장은 등을 돌렸다.
“끝까지 열심히 해 봐. 그래 봤자 지하철 2호선 공사는 우리 태성이 따낼 테지만!”
“차 회장님! 우광과의 공동 입찰을 다시 한번만······!”
“됐어! 그놈의 공동 사업! 내가 요즘 그것만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리는 사람이야!”
우광과 함께 공동 설립한 태성화학만 해도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것이 아니다.
“우광은 4년 전 철강 사업에 뛰어든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적자를 태성화학을 팔아 메꾸려고 했지? 자꾸 어깃장을 놓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이젠 건설까지 도와달라고? 허!”
그놈의 태성화학 때문에 아까 아들이랑 대판 싸우고 왔거늘!
차 회장은 김 비서를 돌아보았다.
“김 비서, 소금 뿌려! 왕소금으로 한 바가지쯤! 팍팍팍!”
“예, 회장님.”
“이거야 원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고 실장, 뭐하나? 내가 아까 소란은 자네더러 정리하라 했다!”
“예, 제가 맡겠습니다.”
고 실장과 경호팀이 우광건설 사장의 앞을 막아섰다.
“김 사장님, 이만 돌아가시죠.”
“고 실장!”
“경고는 한 번뿐입니다. 아무리 우광건설 사장님이라고 해도 우리 호텔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봐드릴 수 없습니다.”
고 실장이 들고 있는 쇠파이프가 번뜩 빛났다.
우광건설 사장은 멀어지는 차 회장을 향해 크게 외쳤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최고의 조건으로······!”
“일 없다니까!”
차 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하지만 그 입꼬리에는 뿌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금쪽 같은 내 새끼 덕분에 이렇게 큰소리를 다 치네.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군.’
우광건설 사장의 얄미운 낯짝이 저토록 구겨지는 광경을 보게 되다니.
저놈이 어제 지하철 공사 관계자를 데리고 뻔뻔하게 태성호텔 커피숍으로 쳐들어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치욕에 떨며 먼저 돌아섰던 건 다름 아닌 차 회장이었다.
그러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멀었다! 태성의 돈으로 남들 환심을 사려했던 것까지 전부 되갚아주마!’
이제 머지 않았다.
지하철 2호선 공사 입찰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고, 신년맞이 청와대 오찬이 보름 후에 있을 예정이며, 당장 사흘 후에는 정재계 인사들이 모여 후원하는 송년의 밤 행사가 있다.
‘송년의 밤 행사에서부터 식은땀깨나 흘리게 될 거다! 독기 품은 하이에나 떼에 둘러싸여 실컷 물어뜯겨 보라지! 흥!’
송년의 밤이라면 연말연시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 바자회 및 후원 행사였다.
거기엔 정관계 인사들은 물론 재계를 비롯해 각계 각층 주요 인물들이 대거 모인다.
당연히 우광그룹 총수와 우광건설 사장도 참석할 터였다.
‘우광이 한 선전포고, 우리라고 못하겠어? 우리도 하자고! 이번 송년의 밤 행사에서!’
그때 우광건설 사장 뒤로 키 작고 뚱뚱한 중년 남자가 뒤뚱뒤뚱 뛰어왔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남자였다.
“헉, 헉, 헉, 우광건설 김 사장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태성건설 차 사장은 여기에 또 어떻게······?”
고 실장은 태성건설 차 사장을 위해 길을 열었다.
“차 사장님께선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 실장의 눈빛은 싸늘하고도 차가웠다.
우광건설 사장은 이번에도 직감했다.
‘차 사장, 오늘 제대로 털리겠구나!’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을 잘못 잡은 듯 싶다.
‘일이 돌아가는 꼴이 영 범상치가 않군.’
왠지 목이 졸리는 것 같아서.
우광건설 사장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 * *
태성호텔 바(Bar)는 무척이나 썰렁하고 어두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가게 문을 연 건 오직 차 회장과 태성건설 사장의 독대 때문이었다.
탁.
차 회장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윤성아, 앞으로 딱 세 잔 남았다.”
“오늘따라 술이 잘 받으시는가 봅니다. 혼자 더덕주 한 병을 다 비우시네요. 허허허!”
태성건설 사장은 차 회장의 속도 모르고 평소처럼 너털웃음을 지었다.
“형님, 그런데 왜 아까부터 자꾸 남은 잔 수를 세십니까?”
“이 더덕주가 끝나면 내 의리도 끝날 테니까.”
진심이었다.
하지만 태성건설 사장은 그 말을 그리 새겨 듣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말만 저렇지, 화를 내거나 따지지도 않고 묵묵히 술만 마셨기 때문이다.
“형님, 요즘 태성건설 사람들을 진두지휘하여 지하철 공사 입찰을 준비하시느라 많이 바쁘시지요?”
동생이 직접 차 회장의 잔에 더덕주를 따랐다.
황금 빛깔 술이 쪼로록 담겼다.
“원래는 제가 했어야 하는 일인데, 못난 동생 때문에 형님께서 노고가 참 많으십니다.”
“네가 그걸 알긴 하는구나.”
“제가 그걸 왜 모릅니까? 태성목재를 맡았을 때도 그렇고, 태성의 계열사 중에 거쳐가는 곳마다 매번 적자만 났는데, 늘 형님께서 커버해 주셨잖아요.”
“그걸 아니 다행이다.”
차 회장과는 달리 동생은 경영에 영 소질이 없었다.
“역시 형님밖에 없습니다. 못난 동생도 동생이라고, 내 자식들 결혼한다니까 사돈댁 보기 부끄럽지 말라고 건설사 사장 자리에 떡하니 앉혀주시고.”
태성건설 사장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제가 더 열심히 뛰어서 형님의 마음에 보답해야 할 텐데. 이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
“그래도 이번 지하철 2호선 공사는 형님이 직접 앞에 나서주셔서 이 동생은 아주 든든~ 합니다! 1,800억짜리나 되는 대공사! 이것만 따내면··· 허허허!”
“그래, 천팔백억짜리 대공사. 네가 이 더덕주가 바닥이 보이도록 계속 나불대던 일이지.”
차 회장은 동생이 따라준 술잔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윤성아,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그러니 지하철 공사 얘기는 그만하고, 허심탄회하게 속말이나 해 봐라. 내 들어주마.”
“형님도 참.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 분이 오늘따라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시네요. 왜요? 요즘 고민 있으세요? 혹시 막내 혼사 때문에 그러십니까?”
태성건설 사장도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우광의 딸을 낚아채면서 태성화학까지 얻어왔죠. 난 기껏해야 정치인 아버지, 판사 아버지를 둔 며느리들밖에 못 얻었는데 말입니다. 역시 돈 버는 수완이 남다르십니다.”
< 탈탈 털다(1)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