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탈 털다(2)(무료 끝) >
차 회장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지금 나더러 아들을 비싸게 팔아먹었다고 돌려까는 거냐?”
“돌려까기는요. 진심인데요. 우광의 딸이랑 태성화학이라면 난 사이 나쁜 큰아들 부부를 이혼시키고 재혼시킬 용의도 있다니까요?”
“시끄럽다.”
“축하한단 소리예요. 아시면서. 허허허. 이건 동생이 드리는 축하줍니다.”
“축하주라······. 그럼 마셔야지.”
두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을 한입에 털어 마셨다.
형은 더덕주, 동생은 깡소주였다.
쪼로록.
이제 두 잔 남았다.
“윤성아, 우리 형제 둘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그 작던 회사를 여기까지 키워왔다.”
“예, 일본인들이 놓고 간 시멘트 공장 하나를 불하받고, 내친김에 건설사까지 세워서 여기까지 올라왔지요.”
“진짜 고생 많았지.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어. 전쟁통에 다 무너진 서울을 우리가 다시 만들었어.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고, 학교를 세우고, 집을 만들어 팔았다. 너는 벽돌 지어 나르고, 나는 시멘트 나르고.”
“우리 형제 진짜 매일같이 공사판 먼지 속에서 굴러다니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어요. 부자가 되자고. 누구보다 멋지게, 폼나게 살자고.”
“그간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구나. 정치 자금 세탁하랴, 더러운 놈들 뒤 봐주랴, 건달패며 사채업자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어.”
“덕분에 저도 감방을 두 번이나 다녀오지 않았겠습니까. 허허허.”
입맛이 썼다.
그래서 술이 술술술 들어갔다.
차 회장은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탁. 쪼로록.
“이제 마지막 잔이다, 윤성아.”
“그럼 저도 이 잔을 막잔으로 하겠습니다.”
동생은 단번에 제 술잔을 비웠다.
그러더니 아까 다 끝내지 못한 말을 다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공사만 따면 태성건설은 그날로 대박이 나는 겁니다! 서울시를 관통하는 지하철이에요! 출퇴근하는 서울 시민이 날마다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될 거고요! 다들 우리 태성건설 하면 제일 먼저 지하철 2호선을 떠올릴걸요? 그럼 태성건설 주가는 하늘 꼭대기까지 오르는 거죠!”
형은 받은 술을 차마 비우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윤성아, 내가 분명 마지막 잔이라고 하는데도, 넌 끝까지 딴소리만 하는구나.”
“우광건설 사장이 호텔 앞에 왔더라고요. 이번에 우광과 태성이 사돈끼리 손을 잡고 공동 입찰을 해보자던데, 어떠세요?”
“하······!”
“우리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좋은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죠. 말마따나 우광이 작정하고 막아서면 우리는 지하철 공사 못 땁니다. 아시죠?”
차 회장은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방금 그 발언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차 회장은 빈 술잔을 집어던졌다.
태성건설 사장의 머리를 스치고 날아간 도자기잔은 벽에 부딪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태성건설 사장은 깜짝 놀라서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혀, 형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런 눈치도 없는 새끼. 윤성아, 왜 그랬냐?”
“예?”
“왜 날 배신했냐고.”
태성건설 사장의 안색이 변했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것이다.
“혀, 형님?”
“마침 좋은 기회가 와서 안 잡을 수 없었냐? 태성건설이 그리 탐나더냐?”
“······!”
“이 멍청한 녀석.”
차 회장의 눈이 차갑게 번쯕였다.
“너는 끝까지 쓸데없이 태성의 미래만 논하고, 아직 손에 쥐어지지도 않는 지하철 공사만 떠들다가, 정작 네가 저지른 잘못을 반성할 기회는 전부 날려버렸구나.”
“그 자, 잘못이라는 것은······.”
“김 비서, 그거 가져와!”
“예, 회장님.”
김 비서가 즉시 준비한 것을 대령했다.
차 회장은 태성건설 사장 앞으로 서류를 한 부씩 던졌다.
“이건 네가 작성한 이중장부, 이건 태성건설이 막아야 할 어음, 이건 네놈이 팔아치우려고 했던 태성건설 아파트 건설 부지 땅문서.”
“그건 전부 태성건설 사장실 금고 안에 있던 거잖습니까?”
태성건설 사장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차명으로 몰래 모으던 태성건설 주식, 이건 무기명 채권, 이건 골드바, 이건 해외 부동산, 이건 달러 뭉치.”
“우리 집 비밀 금고까지 터셨어요?”
급기야 태성건설 사장은 소리를 꽥 질렀다.
차 회장이 던져놓은 물건들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다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 이건 도둑질이잖습니까! 어떻게 형님이 저한테······!”
“도둑질?”
차 회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 내가 네 금고 뜯었다. 억울하면 경찰에 신고해.”
“아니, 형님!”
“너도 내 회사 금고를 뜯었으니, 난 널 검찰에 넘기마.”
“거, 검찰이요?”
“배임과 횡령. 이 정도면 최소 15년형감이다.”
“형님!”
“왜? 내가 못 할 것 같으냐?”
“······!”
태성건설 사장은 사색이 되었다.
차 회장의 별명은 화염 불도저.
안 되는 일마저 되게 만들 정도로 강하게 밀어버리는 게 주특기였다.
“안타깝구나, 윤성아. 넌 환갑 잔치와 칠순 잔치는 감옥에서 치러야 할 거야.”
“형님, 안 됩니다! 검찰이라니요!”
“검찰이 싫다면 중정으로 보내주랴?”
“······!”
중정에 끌려가면 몸 성히 나올 수 없다.
태성건설 사장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혀, 형님······!”
“네놈이 태성건설 사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건 네가 잘해서가 아니었어. 네가 내 동생이기 때문이었지.”
차 회장은 싸늘했다.
“적당히 빼돌리면 좋았을 것을. 넌 선을 넘었어. 감히 내 자식의 밥그릇까지 홀랑 빼앗으려 들어? 그럼 나는 네 처자식의 밥그릇을 못 빼앗을 것 같으냐?”
털썩!
태성건설 사장이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한 번만 봐주세요!”
“내가 준 마지막 기회를,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넌 변명과 푸념, 헛된 망상으로 날려버린 거야.”
차 회장은 고개를 돌렸다.
“더덕주가 끝나면 의리도 끝날 거랬다. 우리 형제간의 의리는 딱 거기까지였어.”
“형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진짜예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이게 미안하단 말로 끝날 일이냐?”
말뿐인 사과로 털어내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다.
반대편으로 달려갔던 건 저놈이었다.
“내가 챙겨준 거, 네가 빼돌린 거, 내 아들이 벌어온 거, 전부 다 토해내야 할 거다.”
“그, 그건······!”
“아니면 네 처자식의 것까지 죄다 토해내도록 만들어 주랴? 가족끼리 사이좋게 손잡고 감옥 갈래?”
“형님! 제 처자식이라면 형님의 제수이고 조카잖습니까. 처자식은 봐 주세요!”
태성건설 사장은 더듬더듬 말했다.
“가, 가족 간에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 필요는 없잖습니까. 일곱이나 되던 우리 형제가 전쟁통에 다 죽고,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형님이랑 저랑 딸랑 둘만 남았어요.”
태성건설 사장이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형의 다리에 매달렸다.
“형님, 제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차라리 저한테 화를 내세요! 입 닥치고 때리는 대로 맞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이거 안 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차 회장은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 중에서 아무거나 잡아 들었다.
소주병이었다.
겁에 질린 태성건설 사장은 차 회장의 다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빌었다.
“저 감옥에도 두 번이나 다녀왔어요! 세무 조사 들어오고, 검찰 조사 들어왔을 때, 제가 형님 대신 감옥에 갔어요!”
태성건설 사장이 울먹거렸다.
“형님, 막내딸이 올봄에 결혼합니다. 우리 딸 시집가는 길, 제가 손잡아 줘야죠. 그러니 형님, 제발 이번 한 번만······!”
소주병을 잡은 차 회장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새끼의 대가리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후우우······.”
차 회장은 폐부가 짜부라지고,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한참이나 씩씩대던 차 회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태성에서 나가.”
“예.”
“네놈이 빼돌린 돈도 토해내. 그건 내 아들이 벌어온 거야.”
“그래야죠.”
“네가 몰래 사들인 주식도, 내가 챙겨준 주식도, 태성의 주식이라면 단 한 주도 남기지 말고 전부 내놔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김 비서가 가져온 이것들도 전부 놔두고.”
“예.”
차 회장은 손짓했다.
“돌아가 봐.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보내야지.”
“감사합니다, 형님.”
“명심해라. 네놈은 성준이에게 빚을 진 거야.”
“예, 제가 언제고 이 빚은 꼭 갚겠습니다. 행여 훗날 성준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제가 나서서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태성건설 사장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긴 탄식과 함께 힘없는 발걸음으로 비틀비틀 물러갔다.
그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던 차 회장은 등을 돌렸다.
“김 비서, 저놈한테서 자백 받아내. 우광과 짜고 돈 빼돌린 정황부터 배후까지 낱낱이.”
“예.”
“빌어먹을.”
차 회장은 속에서 천불이 끓는 것 같았다.
들고 있던 소주를 까서 숨도 안 쉬고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이것은 비단 술이 독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음을 독하게 썼기 때문이다.
“회장님, 과음하셨습니다. 그만 드시지요.”
김 비서가 만류했다.
“놔라. 저놈 감옥에만 안 갔지, 가진 거 내가 전부 긁어낸 참이다.”
김 비서가 말없이 쪽지를 내밀었다.
삐뚤삐뚤한 어린애 글씨였다.
<할아버지, 속상하다고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겠죠? 꼭 술을 마셔야 한다면 속이 덜 상하는 약주로 드세요. -정혁이 올림->
차 회장은 긴 한숨과 함께 소주병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손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김 비서. 약속대로 이건 전부 정혁이한테 가져다줘라. 태성건설 임원진 뒤도 탈탈 털어서 뒤로 빼돌린 것까지 전부 회수하고.”
이게 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공을 세웠으니 그에 맞는 포상을 내려야 하는 법.
이건 우리 정혁이 몫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 어린 것이 벌써부터 효도하는구나. 제 아비 밥그릇에 붙은 똥파리까지 깨끗하게 치워주고.’
생각할수록 예뻐 죽겠고, 다시 봐도 기특해 죽겠다.
“정혁이한테 선물을 가져가는 김에 성준이 녀석에게도 전해. 태성건설 사장 바뀌었다고.”
차 회장은 팔짱을 꼈다.
“일본의 선진 토목 기술은 물론 우광건설 뇌물 장부까지 가져왔으니, 이 공은 내 아들의 이름으로 남아야지!”
똥파리들도 치워버렸으니, 이제 전심전력으로 지하철 공사를 따낼 것이다!
“내 뒤통수를 친 건 우광이 먼저였으니, 나를 매정하다 원망해도 소용없다!”
차 회장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내 친동생이라면 몰라도 나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네놈들까지 봐줄 수는 없지!”
우광이 끼어들어 수작을 부린 탓에, 달랑 하나 남은 형제 사이까지 이렇게 망가지고 말았다.
무능해도 핏줄이었고, 모자라도 동생이었는데.
“난 상도덕 없는 놈들이랑은 같이 사업 못한다! 가정윤리조차 없는 집구석이랑은 사돈 못 맺고!”
결론은 이미 났다.
“김 비서, 성준이더러 제 처자식이랑 함께 송년의 밤 행사에 참석하라고 전해!”
송년의 밤은 정재계는 물론 각계각층 중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 연말 자선행사였다.
차 회장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태성건설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깟 화학 하나 없다고 태성이 무너지냐?”
태성과 우광의 차이를!
“협박 편지는 제대로 보냈지?”
“물론입니다.”
“우광한테 뇌물 받아먹은 놈들은 물론 안 받아 먹은 놈들에게도 빠짐없이 전부 다?”
“예.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말입니다.”
“좋아! 그럼 준비는 끝났다. 그날 가서 거하게 깽판 한번 치고 오자!”
차 회장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태성호텔 룸을 떠났다.
동생이 남긴 소주병과 술잔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더덕주를 담았던 병만 챙겼다.
물론 손자가 적어준 쪽지도 함께였다.
이것만큼은 외면할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
띵동! 띵동띵동!
눈치 빠른 경호원, 자칭 넘버 투, 유종태 경호팀장이 달려와서 보고했다.
“도련님, 김 비서님이 선물 가져 오셨답니다!”
오호!
뇌물도 아니고 선물이란다!
그럼 두 손 들고 달려가야지!
< 탈탈 털다(2)(무료 끝)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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