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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35화 (35/189)

< 판을 더 키워볼까?(유료 시작) >

나는 기쁜 마음으로 김 비서를 맞았다.

“김 비서님, 어서 오세요!”

나는 두 손을 모아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김 비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네. 김 비서님은 드셨어요?”

“아쉽게도 아직입니다.”

무척 바빴다는 뜻이었다.

김 비서가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달려오게 된 까닭은 바로 그 선물이란 것 때문이겠지.

“여기까지 온 김에 우리 집에서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이건 심부름에 대한 내 호의.

“다행히 오늘 저녁도 옥분 할머니께서 요리하셨어요. 옥분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구로동 판자촌에서 으뜸이었단 말이죠?”

나는 김 비서에게 바짝 붙어서 작게 속삭였다.

“한번 맛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마성의 맛! 후회 없는 한 끼가 될 거예요.”

“호오, 그렇습니까?”

김 비서가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크고 묵직해 보이는 여행 가방이 두 개나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한가롭게 저녁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군요. 전해드릴 게 조금 많다 보니.”

“이건 다 뭐예요?”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쪽은 정혁 도련님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김 비서가 왼손으로 들던 여행 가방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선물이라면 청탁도, 대가도 없다는 뜻이죠?”

“예. 사실 대가란 것도 이미 도련님께서 치르셨습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포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선물과 포상은 엄연히 다르다.

선물은 진심과 호의를, 포상은 공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준다.

“사실 회장님께서는 아직 뇌물값도 다 치르지 않았잖습니까.”

할아버지가 빠뜨린 내용은 두 개였다.

엄마에게 사과하는 것, 그리고 결혼을 허락하는 것.

나는 할아버지의 화를 달래기 위해, 그리고 원하는 각서, 아니, 차용증을 얻어내기 위해.

뇌물 정산을 다 끝내기 전에 잘라낸 세 페이지를 내어드렸다.

“할아버지와도 신용 거래를 튼 셈으로 치죠 뭐.”

“그건 떼어먹힐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겁니다. 회장님께서는 상도덕을 아시는 분이시거든요.”

“가족끼리잖아요. 좀 손해 봐도 상관없어요.”

나는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김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일방적인 손해가 쌓이면 은연중에 섭섭함이 쌓입니다. 켜켜이 쌓인 섭섭함은 어느 순간 원망으로 변하는 법이죠. 회장님께선 다른 건 몰라도 포상에 관해서는 철저하십니다.”

김 비서는 내 발밑에 가방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 가방이 도련님께 돌아온 겁니다. 하지만 제가 포상이란 단어 대신 선물이라 말씀드린 까닭은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생각하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김 비서가 내 몫이라고 했던 여행 가방은 언뜻 봐도 꽤 묵직해 보였다.

“방금 태성건설 사장님께서 경질되셨습니다.”

빠르다!

친동생인 건설사 사장의 목을 날리는 일인데.

일이 다 마무리되기까지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이 걸릴 것이라 막연히 예상했던 터였다.

“주총 등 절차가 남긴 했으나 회장님의 뜻이 확고하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확정적인 사안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할아버지가 더덕주를 까셨군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태성건설 사장님께선 깡소주를 드셨습니다.”

마음에 든다!

내가 더덕주를 줄 때 김 비서에게 당부했던 대로였다.

“그분은 어떻게 됐어요? 경찰로? 검찰로? 아니면 중정으로?”

“그것까지도 예측하고 계셨습니까?”

김 비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쉽게도 셋 다 아닙니다.”

“흐음. 이렇게 빠르게 일을 처리하시는 할아버지가 굳이 무르게 구실 까닭이라면······.”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 비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태성건설 사장님은 일을 더럽게 못하셨다면서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태성그룹 보고서를 읽었으니까.

태성건설이 계열 독립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쫄딱 말아먹었거든.

이거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뭐라 설명할 방법이··· 있구만!

“우리 아빠가 일을 그렇게 많이 따왔는데도 태성건설 주식값이 똥값인 걸 보면 뻔하죠.”

“맞습니다. 회장님이 경영 능력을 따지셨으면 아마 그분은 변변한 자리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흠, 그럼 태성건설 사장님께 자식이 몇이나 있어요?”

“세 분 계십니다. 아드님 두 분은 결혼하셨고, 따님 한 분은 미혼이십니다.”

감 잡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딸 결혼식장에서 손잡고 들어가야 하니까 할아버지께서 봐주셨군요.”

“맞습니다. 마침 올봄에 결혼하실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김 비서가 흐뭇하게 웃으며 여행 가방을 열었다.

“이것은 태성건설 주식입니다. 태성건설 사장님께서 갖고 있던 4%에 더해 차명으로 긁어모은 3%까지. 총 7% 정도 됩니다.”

내가 1억 원어치 태성의 주식을 원했을 때, 할아버지는 태성건설 주식 1%를 가져왔었다.

그런데 이건 7%다.

“이건 태성건설 사장님께서 그간 빼돌렸던 비자금입니다.”

“두둑하네요? 무기명 채권에, 골드바, 해외 부동산에 달러 뭉치까지.”

“태성건설 사장님 댁 비밀금고를 털었죠.”

김 비서의 솜씨일 것이다.

건달들이나 사채업자가 열받으면 쳐들어가서 하는 짓거리이기도 하고.

내게도 몹시 익숙한 해결 방법이었다.

그러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당연히 태성건설 사장실 금고도 터셨겠네요?”

“그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건 성준 도련님의 몫입니다. 회사 일이라서 말입니다.”

김 비서는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묵직한 여행 가방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 태성건설 임원진들을 탈탈 털면 또 가져오지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없던 믿음도 절로 생기는 목소리였다.

“이건 모두 도련님께서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가져오신 덕분이고, 잘린 세 페이지를 마저 작성하신 덕분이죠.”

마저 작성?

그 대목에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 계셨어요?”

“뇌물 장부는 전부 타자로 쳤었는데, 그 잘린 부분만 친필로 적었잖습니까. 과연 그랬었군요.”

김 비서도 씩 웃었다.

“결과적으로 제 선택이 옳았군요. 박철구 씨를 회장님 앞으로 데려가기 전에 도련님 앞으로 데려간 것 말입니다.”

“탁월한 선택이었죠.”

나는 엄지를 척 들어 주었다.

철구 아저씨를 내게 데려왔던 날, 김 비서가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제가 박철구 씨에게 직접 칼을 대는 건 도련님과의 협상이 틀어진 후로 미뤄도 늦지 않습니다.

-박철구 씨, 똑바로 알아두십시오. 당신이 누구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합니까? 평생 우리 정혁 도련님께 감사하며 사십시오.

철구 아저씨의 머리 위에 황천길 카운터가 요란하게 반짝였던 데에는 김 비서의 지분도 꽤나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 비서는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굽혔다.

“박철구 씨의 무거운 입을 여신 것 또한 도련님의 수완이고, 능력이십니다. 덕분에 태성은 새는 물독을 틀어막을 수 있었죠. 회장님께서 포상을 내리실 만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김 비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우광건설 뇌물 장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하십니까?”

“뇌물 장부는 어떻게 쓰셨어요? 편지로? 아니면 대놓고 만나서?”

“호오. 그것까지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김 비서는 은테 안경을 추켜올렸다.

“편지로 배달했습니다.”

“잘하셨어요. 할아버지 성격이라면 뇌물 장부 적힌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큰소리를 치실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참을성이 강하신 분이셨군요.”

“화염 불도저라는 별명 때문에 보통 그런 선입견을 가지곤 하죠. 그 역시도 회장님께서 일정 부분 의도하신 바입니다.”

“그렇다면 협박의 뒷감당은 우리 태성이 아니라 우광이 떠맡을 게 확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였다.

‘중요한 대목이었는데!’

아버지는 싸늘한 눈으로 김 비서를 노려보았다.

“지금 어린애를 붙잡고 무슨 수작을 부리시는 겁니까?”

“오해하셨군요.”

김 비서는 내 몫이라던 여행 가방을 가리켰다.

“회장님께서 보내신 선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글쎄요. 이 늦은 시각에 보호자도 없이 애만 불러다가 밖에서 수군거리는 꼴이 썩 정정당당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럼 저택 안으로 들어가 보호자 앞에서 마저 설명드려도 됩니까?”

김 비서는 여행 가방 두 개를 단번에 들어 올리며 웃었다.

“두 손 가득 꽤 무겁게 준비해서 들고 온 참이라서 말입니다.”

“들어오세요!”

나는 환영이었다.

“아빠, 선물을 가져온 손님을 문전 박대하면 안 돼요!”

“으음.”

“내 손님이에요. 그러니까 잠깐이라면 괜찮죠?”

“······어쩔 수 없지. 김 비서님, 5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5분으로는 부족할 것 같군요. 회장님의 전언입니다. 그깟 화학 하나 없다고 태성이 무너지냐?”

“······!”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아버지가 우뚝 멈춰섰다.

김 비서에게서 여행 가방을 받아 들던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 비서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참고로 회장님께서 제게 지시하신 사항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태성화학 지분을 정리하면 손해는 얼마나 감수해야 하는지 한번 견적을 뽑아보라고 하셨습니다.”

“······!”

아버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숨을 들이마셨다.

경호원들 중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회, 회장님께서 정말 태성화학을 포기하신다고 하셨습니까?”

김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할아버지의 말을 마저 전했을 뿐이었다.

“이번 송년의 밤 행사에 이수진 씨와 정혁 도련님을 대동하여 참석하라고 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공식적인 행사에 혼외자식을 대동하고 나오라니.

벌써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했다.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김 비서는 옷깃을 반듯하게 고쳤다.

“자세히 보고드리기엔 역시 5분은 너무 짧을 것 같군요.”

“서재에서 차 한 잔 마시고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마 차 한 잔으로는 모자랄 것 같지만, 저는 도련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김 비서는 거침없이 걸어갔다.

한겨울 찬 바람이 휭휭 날리는데도 머리카락 한 점 흐트러지지 않고 바짓단의 주름마저 칼각이 잡혔으며, 구두에 광택이 번쩍번쩍한 게 먼지 한 톨 없었다.

밖에 남겨진 경호원들이 참지 못하고 저희들끼리 작게 수군거렸다.

“이게 다 뭔 일이랍니까?”

“태성화학이라면 무려 300억짜리 사업체잖습니까?”

“처음 공동 출자할 때만 해도 10억짜리 사업을 300억짜리 큰 회사로 키우신 건 회장님이신데.”

“지금 태성화학을 정리한다면 이만저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닐······!”

내가 김 비서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 경호원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채 지우진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관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태성화학을 정리한단 말이지?’

할아버지가 결단을 내리신 것이다.

속이 쓰릴 만큼 큰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는 일인데도 말이다.

‘할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 정도 손해를 감수하시기로 하셨다면, 나 역시 두 팔 걷어붙이고 전심전력으로 도와드려야겠는걸?’

인생은 원래 기브 앤 테이크다.

호의를 받았으면 호의로 보답하는 것이 사내의 도리!

‘할아버지가 굳이 손해를 감수할 필요 없이! 오히려 태성화학을 날로 먹으면서도 우광에게 손해배상까지 두둑하게 받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보자! 거기에 하나 더!’

송년의 밤.

연말연시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 바자회와 후원회를 겸하는 정재계 중요 인물들의 모임이다.

‘이참에 태성건설 사장과 임직원들이 날려 먹어서 생긴 구멍까지 간단하게 메워드릴까 싶네?’

그렇다면 판을 좀 더 키워야겠군.

‘흠, 아무래도 송년의 밤 행사에 몇 분을 더 초대해야겠어.’

초대장을 받으면 스승님께선 아주 좋아라 하며 달려오실 것이다.

지하금융계의 다른 거물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 판을 더 키워볼까?(유료 시작)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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