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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36화 (36/189)

< 제가 맡겠습니다 (1) >

아버지는 서재로 먼저 들어가셨지만, 김 비서는 거실에서 태성그룹 경호원들 몇몇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김 비서에게 쪼로로 달려갔다.

“김 비서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옛날이라면 ‘신림동 개미지옥’의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면 그만이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래도 김 비서의 도움이 필요해서.

“부탁? 좋습니다. 다만 지금은 회장님의 명부터 이행해야 하기 때문에. 도련님께선 그동안 선물을 풀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김 비서가 말하는 선물은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놓인 선물상자 따위가 아니었다.

김 비서의 손짓에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들고 온 여행 가방을 내 발 앞에 놓았다.

“확인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실 테니, 기다리기 지루하진 않으실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김 비서는 내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에야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흐음?’

눈차 빠른 경호원, 자칭 넘버 투, 내 수족을 자처하는 유종태 경호팀장이 낑낑대며 가방을 나르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책상과 의자를 나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2층 서재.

‘아버지는 분명 차 한 잔만 마시자고 하셨었는데?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구만?’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어이, 수호신!’

[알았다. 시야 공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시야 공유를 하다니!

이 녀석도 수시로 굴리니까 일머리가 조금은 늘었구만!

* * *

아버지는 서재 유리창을 바라보며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김 비서는 정중하게 말했다.

“도련님,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소파에 앉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화 길게 나누고 싶은 마음 없다고 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일부러 정혁이 앞에서 태성화학 얘기를 꺼낸 저의가 뭡니까?”

차갑고, 예리하고, 적대감이 깃든 말투였다.

“정혁 도련님께서도 아셔야 할 이야기였습니다.”

“여전히 의뭉스럽군요. 이만하면 제 말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여겼습니다만.”

아버지는 김 비서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전 아버지를 잘 압니다. 사업에 관해서는 결코 허투루 여기는 법이 없죠. 대가 없이 태성화학을 포기하실 분이 아닙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일부러 애를 흔들어대는 이유가 뭡니까?”

“7년 전 돈 봉투 때문에 제가 도련님께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군요.”

김 비서는 아버지의 몫이라던 여행 가방을 열었다.

“회장님께선 대가 없이 선물을 거저 보내신 게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포상이랄까요?”

가방에서 노끈으로 묶은 검은 커버의 서류철을 꺼냈다.

탁.

“이건 우광건설 뇌물 장부입니다. 또한 중정 내부의 극비 자료이기도 합니다.”

“······뭐요?”

철구 아저씨가 작성했고, 내가 회장님께 보냈던 바로 그 장부였다.

“참고로 이 집에 얼룩덜룩 멍투성이인 불곰 같은 남자가 한 명 있을 겁니다. 박철구 씨라고. 그자가 이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작성한 장본인인 중정 요원입니다. 서빙고 물 고문실에서 다 죽어가는 것을 정혁 도련님께서 빼내 주셨죠.”

“설마······.”

“예, 정혁 도련님께서 회장님께 드린 게 바로 그겁니다.”

“······잠깐. 정혁이가요? 그 애가 우광건설의 치부를 어떻게 알고 그걸 아버지께 전합니까?”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 비서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뇌물 장부에 따르면 우광이 지하철 관련 중요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뿌린 뇌물은 약 20억 정도입니다.”

“잠깐. 4년 전에 뛰어든 철강 사업 때문에 우광은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우광이 무슨 돈으로 뇌물을 20억이나 뿌립니까?”

“태성의 금고에서 빼돌린 돈입니다.”

“뭐라고요?”

“예, 회장님께서 열받으실 만했죠? 이건 박철구 요원의 친필 진술서입니다.”

김 비서가 이번에 꺼낸 것은 내가 잘라낸 세 페이지였다.

“중정에 끌려가고서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던 독한 사내를 정혁 도련님께서 회유하셨죠. 덕분에 회장님께서는 태성건설 똥파리들을 한꺼번에 숙청하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태성건설이라 하셨습니까?”

“예, 이건 태성건설 차윤성 전(前) 사장이 자백한 내용입니다.”

탁.

“우광과 손을 잡게 된 경위와 그간의 정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 작은아버지가······.”

“물론 이에 관한 증거와 이중장부 등의 자료는 이 가방 안에 들어 있습니다. 태성건설 임직원들을 전부 털어낸 후 결과만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으음.”

“그렇게 회장님께서 숙부님을 감옥에 보내지 않는 대신 가진바 탈탈 긁어서 정혁 도련님께 선물로 드리게 된 겁니다. 그래서 포상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버지가 당혹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회장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기를, ‘성준 도련님께선 아들 하나는 정말 잘 두셨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김 비서가 늘어놓은 자료들을 바라봤다.

김 비서는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잡아 들고 살짝 흔들었다.

“우광은 태성보다 기술 및 실적은 물론 규모 면에서도 몇 수 밀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광으로서는 로비에 사활을 건 셈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정경유착이 성행하고 있죠.”

“결국 정혁 도련님 덕분에 우광의 가장 강력한 무기까지 우리 태성이 얻게 된 셈입니다.”

“무기?”

“예, 회장님께서는 이 뇌물 장부에 기록된 자들에게 편지를 한 통씩 보내셨습니다.”

“협박을 했단 말입니까? 뒷감당은 어찌하려고요?”

“뒷감당은 태성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광이 걱정해야 할 일이죠. 왜 우리가 굳이 익명의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으음.”

“이런 좋은 무기를 얻고도 병신처럼 창고에서 썩힐 순 없지 않겠습니까?”

김 비서는 은테 안경을 추켜올렸다.

“이번에 저 역시 이 무기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지하시설 토목 기술 공법을 우리 태성이 얻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이건 일본과 체결한 기술 공유 협약서입니다.”

탁.

아버지 책상에 쌓이는 서류가 또 늘었다.

“원래 수확은 돈 주인이 거둬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광건설 사장이 태성호텔까지 달려와서 회장님께 공동 입찰을 제안하더군요.”

“하······!”

“물론 회장님께선 거절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 비서는 여행 가방을 가리켰다.

“그래서 태성건설 사장실 금고를 털 때 이 자료를 전부 가져왔지요. 앞으로 성준 도련님께서 직접 맡아 처리해야 할 태성건설의 미래랄까요?”

김 비서는 아예 여행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건 태성건설 사장실 금고에서 회수한 탈세 내역 및 당장 막아야 할 어음에 관련한 자료이고.”

탁.

“이건 태성건설이 팔아치우려 했던 아파트 부지와 현재 공사 중지 상태인 국내 건설 공사 현장에 관련한 자료.”

탁.

“그리고 이건 지하철 2호선 공사와 관련된 부지 선정 및 공사자금 마련에 관한 타당성 검토 자료입니다.”

아버지 책상 위에 서류가 켜켜이 쌓였다.

“후우. 아직 한참 더 남았는데 계속합니까?”

“······그만해도 충분한 것 같군요. 아니, 이미 과하게 넘칩니다.”

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똥 덩어리도 이런 똥 덩어리가 없다.

“하! 태성건설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 엉망진창인 암 덩어리 놈들을 이번에 깨끗하게 도려냈으니, 성준 도련님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 비서는 태성건설 임원진들과 관련된 서류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언제고 한 번은 치러야 할 싸움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임원 자리는 쉽게 나지 않는다.

잘라내려고 해도 명분이 필요하고, 자칫 반발이 크게 번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도련님께서 회사에 복귀하시면 그 빈자리는 도련님의 사람으로 채우십시오.”

아버지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게 전부 정혁이가 우광건설의 뇌물 장부를 가져왔기에 시작된 일이란 겁니까?”

“예.”

“정혁이는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앱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 참······!”

아버지는 마른세수를 했다.

“혹시 다른 유능한 조력자가 붙어 있었던 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바닥은 운도 능력이고, 수완도 능력입니다. 이 역시 전부 정혁 도련님의 힘이죠.”

김 비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회장님께서는 도련님께서 태성건설을 맡아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보란 듯이 성공시키길 바라십니다.”

김 비서가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한 번 더 흔들었다.

“어린 아드님께서 일을 이 정도까지 진척시켜주었는데, 아버님인 도련님께서 나 몰라라 하시렵니까?”

장부가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회장님께서 태성화학을 포기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당분간 태성화학을 정리하기 위해 바빠지실 텐데, 1,800억짜리 지하철 2호선 공사까지 맡아 동시에 추진하기엔 무리가 아닐런지요?”

“······좋습니다. 지하철 2호선 공사는 제가 맡겠습니다.”

아버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책상 위에 올린 서류 산을 바라봤다.

“까짓것 하자고 달려들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한번 제대로 해보렵니다. 공사 입찰이라면 중동에서 수도 없이 견적서와 계획서를 만들어서 브리핑했는데, 한국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도련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버지는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탁 덮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을 것 같군요.”

“예. 아시다시피 지하철 2호선 공사 입찰까지 시일이 촉박합니다. 그러니 상당히, 아니, 몹시 바쁘실 겁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입찰 견적서 준비는 어느 정도나 됐습니까?”

“태성건설 임원진들이 워낙 무능하여 진척이 많이 느립니다. 한숨이 나올 정도죠.”

김 비서가 여행 가방을 가리켰다.

“마저 자료를 더 꺼낼까요? 참고로 아직 반도 못 꺼냈습니다만.”

“됐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아듣습니다. 갈 길이 까마득하단 소리로군요.”

아버지가 작게 한숨을 터뜨렸다.

“저 혼자 이 일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직 입찰까지 채 한 달도 안 남았는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이니.”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만.”

김 비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할까요? 차 한 잔 마시고 이대로 떠날까요? 아니면 남아 있을까요? 전 처음부터 밝혔듯이 도련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사 간청하게 생겼군요.”

“간청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도련님께선 그저 명령하시면 됩니다.”

김 비서가 서재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종태가 묵직한 여행 가방 다섯 개를 내려놓았다.

“당분간 제 경호팀도 함께 합류하여 서포트할 예정입니다.”

“태성그룹 비서실 직원들 중 일곱을 불렀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전원 이쪽으로 합류할 겁니다.”

“태성건설 재무부와 총무부, 감찰부에도 연락 돌렸습니다. 관련 자료와 장부를 가지고 올 겁니다.”

“도련님께선 그들에게 일거리를 적절히 배분해주시면 됩니다.”

김 비서와 유종태는 합이 척척 맞았다.

아버지는 씩 웃었다.

“든든하군요.”

“뒤는 제게 맡기시고, 도련님께서는 지하철 2호선 공사만 보고 달려가시면 됩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김 비서가 손을 까딱이자, 태성그룹 경호원이 책상과 의자를 서재 구석에 가져왔다.

“사흘. 송년의 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붙어서 도련님을 보좌하겠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맡겨주십시오.”

“우선 전보 하나만 보냅시다.”

“전보? 어디로 보낼까요?”

김 비서는 은테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버지는 메모지 위에 만년필로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메모지를 김 비서에게 넘겼다.

“두바이에 있는 크리스탈 호텔 707호로.”

“아, 이 비서를 부르시려는 거군요?”

“천팔백억짜리 지하철 2호선 공사에 걸린 게 너무 많습니다. 이럴 때엔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가 절실한 법이죠.”

아버지는 우광건설 뇌물 장부 커버를 살며시 손끝으로 더듬었다.

“제가 지금까지 왜 눈이 벌게지도록 중동을 돌면서 공사 수주를 따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말했다.

“우광과의 혼사를 거절할 때, 태성화학이 날아가게 될 경우에 감당해야 하는 막대한 손해를 조금이나마 줄여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내가 벌인 일인데, 손해와 책임을 전부 아버지께 떠넘길 순 없잖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표정을 굳히고 김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제가 왜 하필이면 중동으로 날아가게 된 건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중동은 석유 무기화를 천명한 이후 무지막지하게 오일 머니를 벌어들이게 됐죠. 그 넘쳐나는 돈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있기 때문에. 아닙니까?”

“틀렸습니다. 제가 자존심 다 버리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청했을 때.”

“설마······.”

김 비서는 드물게 당황했다.

“이수진 씨의 마지막 행적이 중동에서 끊겼다는 보고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이 잡듯이 뒤져도 못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수진이는······.”

“그건 마포구 중동이었습니다만······.”

“······.”

< 제가 맡겠습니다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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