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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37화 (37/189)

< 제가 맡겠습니다 (2) >

나는 저승사자와 시야 공유를 끊었다.

‘잘됐네. 그럼 나는 초대장을 보낼 사람들 명단이나 적어볼까?’

지금은 내가 대한민국 지하금융계의 다섯 거물 중 하나로 꼽히던 때가 아니다.

나보다 윗세대가 활약하던 시기.

정부의 사채 동결 조치 탄압에도 기어이 살아남은 음지 거물들의 시대다.

슥슥슥.

동전 지갑에서 꺼낸 새 종이에, 외투에서 꺼낸 몽블랑 만년필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 이상한 걸 적고 있네?”

이런. 누굴 초대하면 좋을지 너무 골몰히 고민하고 있었나.

어머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줄이야.

“명동 송골매, 말죽거리 말대가리, 까치산 방 여사, 종로 금이빨?”

“······.”

“이건 다 뭐니?”

“······골목대장들 별명?”

뭐? 왜? 뭐!

여기 적힌 양반들은 다 그 근방에서 알아주는 거물들인데, 골목대장 맞지 뭐!

“그럼 우리 정혁이의 별명은 뭘까?”

“······신림동 개미지옥이요.”

“뭐? 아하하, 그거 정말 재밌다. 와, 요즘 애들은 이렇게 노는구나.”

“······.”

죄송합니다, 어머니.

사실 저는 다 커서 그런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크흡!

“자, 이건 우리 정혁이 거.”

탁.

어머니는 생긋 웃으며 단내가 폴폴 올라오는 뜨끈한 코코아 한 컵을 내려놓았다.

“서재에 올릴 차를 준비하는 김에 우리 정혁이가 좋아하는 코코아도 타 왔지~”

“······.”

지금은 양잿물도 눈 딱 감고 들이켜야 할 때다.

나는 얌전히 코코아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엄마. 잘 마실게요.”

“아마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을 거야. 코코아 가루를 한 스푼 더 듬뿍 넣었거든.”

“······.”

어머니의 달달한 호의를 차마 거절할 수도 없고!

나는 효심으로 눈 딱 감고 호로록 마셨다.

“역시 어린애들은 코코아라면 껌뻑 죽는다니까? 다음엔 더 달콤하게 타 줄게.”

“······.”

어머니는 쟁반을 들고 서재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커피 향은 또 왜 이렇게 좋은지.

단내나 풀풀 풍기는 코코아와는 딴판이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먹을래?”

철구 아저씨가 내민 건 뻥튀기와 은단이었다.

“아저씨가 도와줄까?”

철구 아저씨는 내 코코아를 가져가 단번에 들이켰다.

바닥을 드러내기까지 3초 컷!

“크, 뜨끈하고 달달하니 좋네!”

철구 아저씨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커피도 블랙으로 마시고,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었을 땐 오만상을 찌푸리던 양반이.

이러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다음엔 아저씨가 쌍화차 사줄게. 계란 두 개 동동 띄워서. 맞지?”

하, 어쩔 수 없지.

나는 동전 지갑에서 오백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었다.

“난 율무차, 아저씨는 커피, 잔돈은 아저씨 팁. 나중에 우리 또 자판기 털러 갈까요?”

“그거 좋지. 거기 커피 맛있더라.”

철구 아저씨는 순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때 철구 아저씨의 뒤에서 얼굴을 쑥 내미는 이가 있었다.

“저도 자판기 커피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달달한 설탕 커피가 최고죠!”

눈치 빠른 경호원, 자칭 넘버 투, 내 수족을 자처하는 유종태 경호팀장이었다.

“빡대가리 빡 중령님과 달리 달리 저는 단 음식을 아주 좋아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도련님 앞으로 떨어진 달달한 것들을 처리해야 할 땐 저, 유종태를 찾아주십시오!”

유종태는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충성충성!”

“그래, 너 다 먹어라. 그럼 나야 좋지!”

철구 아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유종태는 웃음을 거두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방금 서재에 뭘 날랐는지 알려드릴까요?”

“보나 마나 태성건설과 관련된 일거리들이겠죠.”

“헉! 어떻게 아셨습니까?”

“차 한 잔만 마시고 나올 줄 알았던 김 비서가 여태 깜깜무소식이잖아요. 책상과 의자까지 들였으면 말 다 한 거죠.”

“역시! 역시! 역시!”

유종태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만 바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제가 그 일거리를 돕기 위해 당분간 아버님 밑에서 데굴데굴 구를 예정이라는 것도 알고 계실까요?”

유종태는 도로 두 손을 싹싹 비벼댔다.

“저는 도련님께 뼈를 묻기로 맹세한 몸! 어떻게 좀 빼주실 수 없을까요? 왠지 몸이 가루가 되도록 갈려나갈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든단 말이죠.”

호오.

“도련님의 충복은 오직 도련님께만 충성을 바칠 뿐! 충성충성! 도련님이 구르라면 발바닥에 땀 나도록 굴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단 말이지?

달칵.

그때 김 비서는 2층 서재 문을 열고 나왔다

나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도련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김 비서님 말마따나 이거 보고 있으려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던데요? 재밌더라고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헛웃음이 절로 나오더라니까?

“어떻게 그 많은 돈을 이렇게까지 까먹을 수가 있죠?”

부하 직원들에게 퍼주는 것도 정도가 있고, 투자에도 요령이 있지, 어떻게 이렇게 안 되는 걸로만 골라서 돈을 쏟아부었을까?

“주식으로 꼬라박고, 사들인 땅은 죄다 개발 가능성이 희박한 곳뿐이에요. 이건 뭐 답도 없네요.”

보고 있자니 헛웃음과 함께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다.

10억짜리 태성화학을 7년 만에 300억짜리 회사로 키운 할아버지의 동생이라기엔 일을 너무너무 못한다.

“해외 부동산도 비슷해요. 그래도 도쿄, 홍콩, 런던, 뉴욕은 그나마 나아요. 그것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처분해서 달러로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해외 부동산을 받아 갔다.

“이번에 아버님께서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맡게 되셨습니다.”

“좋아요!”

안 그래도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내가 왜 태성건설에 달라붙은 똥파리들을 치워버렸겠어.

“할아버지가 이참에 우리 아빠를 제대로 밀어주려나 봐요? 양보해 주셔서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예,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김 비서는 빙그레 웃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사실 태성은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따내기 위해 총력으로 공사 입찰 견적서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가격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 1원 단위까지 금액을 깎아가며 말이죠.”

그랬을 것이다.

태성은 우광에 비해 가격 외의 모든 면에서 앞서고 있었으니까.

“우광이 뒷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게 이 정도 규모의 로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태성의 금고를 털어서 선심을 쓰고 있었을 줄이야.”

씁쓸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가져오신 뇌물 장부가 모든 판도를 뒤집어 놓은 겁니다. 그러니 마땅히 그 공은 도련님이, 그리고 아버님께서 차지하셔야 옳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걸 노리고 잘라낸 세 페이지에 태성화학 얘기는 쏙 뺐다.

태성건설에 붙어 있는 똥파리들부터 먼저 쳐내야 했으니까.

그래야 내가 곱게 차린 밥상에 우리 아버지가 숟가락을 얹을 것이 아닌가!

‘태성건설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아버지 밥그릇이야!’

나는 죽 쒀서 개새끼들을 처먹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참, 아까 저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하셨죠?”

“네, 이거요.”

나는 동전 지갑을 열어서 곱게 접었던 종이를 꺼냈다.

접힌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 담배처럼 끼웠다.

“이번 송년의 밤 행사에 이분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초대장을 돌릴 생각이에요.”

“이런. 이번 송년의 밤 행사는 한경련의 순번에 따라서 현무호텔에서 엽니다.”

김 비서는 작게 혀를 찼다.

“태성호텔에서 열었던 작년이라면 아주 쉽게 해결되었을 일인데, 이번에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군요.”

“현무호텔 주인이라면 현무건설 사장님이죠?”

“예.”

“그럼 오히려 일이 더 쉽게 풀릴 것 같은데요?”

운이 좋다!

“압구정 현무 아파트가 대박 났잖아요. 이 기세로 밀고 나가자며 새로운 아파트 부지를 찾는다고 눈이 뒤집혀 있다면서요?”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침 내가 갖고 있잖아요, 아파트 부지!”

무능한 태성건설 사장과 임원진이 공사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방치한 아파트 부지!

다른 사람에게 팔려고 했다가 몰수당한 아파트 부지!

할아버지가 아까 내게 선물로 준 이 땅문서 말이다.

“이걸 현무건설에 적당한 값으로 넘기는 대신 초대장을 받을까 해요.”

“급매로 처분하는 것인 만큼 시세대로 다 받긴 어려울 텐데요. 고작 초대장을 몇 장 보내는 일에 그렇게까지 양보해야 합니까?”

“장담할게요. 이건 절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

나는 자신 있었다.

‘이거 황금빛이 하나도 안 납니다. 오히려 거무죽죽한 똥빛만 돌거든요.’

무능한 태성건설 사장이 눈독 들여 골라 빼돌린 아파트 부지답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곯아 터지기 일보 직전!

어떻게 골라도 알고 보면 똥값인 것으로만 골라 빼돌렸을까.

이 정도로 무능한 것도 재능이지 싶다.

‘따지고 보면 그리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야. 난 이 기회에 전(前) 시대 지하금융계의 거물들에게 돈을 왕창 뜯어내서 아버지의 골치를 해결해 줄 생각이거든!’

똥빛이 도는 아파트 부지는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골치만 아플 뿐이다.

똥 덩어리를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데, 해야지!

“도련님, 송년의 밤까지 이제 겨우 사흘이 남았을 뿐입니다. 초대장을 보내려면 적어도 오늘, 혹은 내일까지 발송해야 할 텐데요.”

“나도 알아요. 그래서 내가 급매로 넘기겠다는 거예요.”

내가 받은 땅문서, 내가 넘긴다는데.

나는 괜찮은데, 왜 김 비서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인 거냐.

똥망이 예정된 사업이라서 난 일찌감치 손 떼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도련님, 사업성까지 검토한 후 아파트 부지를 넘기기에는 지금 밀린 일이 너무 많습니다.”

김 비서는 어떻게든 나를 설득할 작정인 것 같지만.

“무능한 놈들이 미룬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그걸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아버님께서는 과중한 부담을 느끼실 겁니다. 아무래도 현무건설 사장과의 면담은 우선순위가 많이 밀립니다.”

“그럼 이 일은 제가 맡을게요.”

“예? 도련님께서요?”

“대신 유종태 경호팀장만 잠깐 빌려 써도 될까요?”

“그거라면······ 좋습니다.”

김 비서는 유종태를 힐끔 바라보았다.

“제가 직속으로 데리고 다니는 놈인 만큼 제법 실력이 괜찮습니다.”

이번 기회에 유종태 경호팀장의 실력을 한번 확인해 볼까?

고작 초대장을 보내는 심부름조차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다면 내 수족을 자처할 자격도 없다!

김 비서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도무지 짐작조차 안 되는군요. 어떻게 처리하실 작정입니까? 유종태만으로는 힘드실 텐데요. 당장 현무건설 사장을 상대하는 일부터가 문제일 겁니다.”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게요.”

“흐음, 대체 어떤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기에 도련님께서 이런 번거로움까지 감수하는지, 몹시 궁금해지는군요.”

김 비서가 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종이를 흘깃 바라봤다.

하지만 난 이걸 넘겨줄 생각이 사라진 후다.

김 비서는 아버지를 돕느라 바쁠 예정이니, 내 일은 내가 처리해야지.

“두고 보세요. 이 아파트 부지와 맞바꿀 만한 초대장이었다는 건 결과로 증명해 보일 테니까요.”

“호오.”

“송년의 밤 행사가 태성의 이름으로 아주 발칵 뒤집어질 거예요.”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김 비서는 은테 안경 너머로 눈빛을 번뜩였다.

기대감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유 팀장.”

“넵!”

유종태가 경례를 올려붙였다.

“정혁 도련님을 확실하게 보좌하여 이 일을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난 의욕 넘치는 놈이 좋더라!

< 제가 맡겠습니다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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