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무건설 사장의 호의 >
현무건설 오 사장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우광건설 김 사장의 선동에 휘말려 불만 어린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이 상당수 포착되었다.
“송년의 밤의 취지를 떠올려 봅시다. 각하께서는 후원금이 많이 걷히는 걸 좋아하실까요, 난동을 피우다 쫓겨났단 보고를 듣는 걸 좋아하실까요?”
송년의 밤 행사는 청와대의 뜻에 따라 한경련에서 맡아 열었다.
있는 놈들의 주머니를 까서 연말연시 불우이웃을 돕겠다는 취지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좋다고 스스로 제 주머니를 열어 생돈을 내칠까.
“다들 아시다시피 후원자의 명단과 액수를 기록해 위에 보고할 겁니다. 그때 내가 후원금 0원이란 이름 옆에 어떠한 사유를 기재할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현무건설 오 사장은 우광건설 김 사장을 노려봤다.
“자꾸 이렇게 분란을 야기하고 소란을 피워댄다면 이 자리에서 강제로 퇴출시킬 겁니다. 김 사장, 이건 경고입니다.”
우광건설 사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스승님은 혀를 찼다.
“지랄을 떤다, 지랄을 떨어. 별것도 아닌 것이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더럽게 유세 떠네.”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며 기꺼이 투자자들을 환영했다.
“이리로 오십시오. 여러분들께서 태성을 도와주시겠다면 당연히 반가운 마음으로 투자금을 받아야지요. 감사의 마음으로 거하게 술 한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김 비서!”
“예, 회장님.”
“투자자분들 모시고 가서 투자 약정서부터 쓰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김 비서가 네 명의 거물들을 모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김 비서 주위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도 태성건설에 투자를 좀 할까 하는데 말입니다.”
“얼마나 투자해야 체비지를 받을 수 있는 거죠?”
“한배를 탄 투자자가 되면 체비지를 못 받더라도 지하철역이 어디에 들어가는지는 알려 줍니까?”
김 비서가 뒤를 돌아봤다.
태성그룹 계열사 사장단이 눈치껏 즉시 달려왔다.
태성건설에 투자금을 유치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최우선 사항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우리 태성은 언제나 투자자들을 환영합니다.”
“태성건설에 투자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결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위 관료 및 정치인들과 악수를 나눴다.
태성건설 새로운 사장이 될 것이라 공표받은 아버지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에게 잔뜩 둘러싸여서 말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홀에 우두커니 남겨진 우광건설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하······!”
태성건설은 유일한 빈틈인 자금 부족 문제를 방금 해결했다.
우광건설 사장이 전(前) 태성건설 사장을 꼬드겨서 만들어놓은 큰 구멍이 이렇게 쉽게 막힐 줄은 몰랐을 것이다.
위기감이 엄습했는지, 우광건설 사장은 똥물을 한 사발 들이켠 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우광건설 사장은 씩씩대며 홀을 떠났다.
“두고 보자!”
우광건설 사장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노골적인 분노가 묻어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 가란 인사 한 마디조차 건네는 이가 없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어.”
현무건설 오 사장은 피식 웃었다.
“안타깝군. 우광건설 김 사장의 후원금은 0원. 이거 사유를 뭐라고 기재해야 할지.”
현무건설 오 사장은 미리 경고했었다.
이름 옆에 후원금과 함께 사유를 기재해 위에 올리겠다고.
현무건설 오 사장은 수첩을 꺼내어 만년필로 대충 휘갈겼다.
<난동 피우다가 쪽팔려서 몰래 튐.>
현무건설 오 사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첩과 만년필을 양복 포켓에 넣었다.
“분명히 송년의 밤은 불우이웃 돕기 자선 바자회 겸 후원회인데, 걷혀야 할 바자회 후원금은 안 걷히고 대신 태성건설의 투자금만 잔뜩 걷히는군. 대단한 수완이란 말이지.”
현무건설 오 사장이 주목한 사람은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차성준이라. 태성건설의 새로운 사장으로 낙점되었다던데. 내게 유종태를 보내서 수서동 아파트 부지를 넘긴 자가 바로 태성그룹의 막내였던 모양이야.”
현무건설 오 사장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지하철 2호선 공사라면 내가 도와줄 게 있을 것 같군.”
현무건설 오 사장이 단상에서 내려와 인파 사이로 걸어갔다.
* * *
‘좋아!’
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 모자는 성공적으로 공식 석상에 소개되었지만, 모두의 시선은 우리 모자가 아닌 태성건설에 쏠렸다! 지하철 공사 투자와 체비지로!’
남의 집안사를 파고드는 것보다 당장 자신에게 떨어질 콩고물에 눈 돌아가는 게 사람이니까.
나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초대장을 돌렸고, 전(前) 시대의 거물들을 이 자리에 모셨다.
‘내가 그렸던 그림 그대로다!’
끓어오르는 고양감과 가슴을 꽉 채우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이래서 사람들은 나를 신림동 개미지옥이라고 불렀는데,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정혁아.”
아버지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홀 한쪽에 마련된 푸드 코트에서 가져온 모양인지, 커다란 접시에 알록달록한 핑거 푸드가 올려져 있었다.
아니, 전부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골라서 가져올 줄이야.
“배고프지?”
“괜찮아요.”
저승사자가 날라 오는 정보 얻기도 바빠 죽겠는데.
애초에 밥을 먹으려면 식당에 갔지.
이런 고급 정보가 오가는 곳에 와서 한가하게 음식이나 처먹고 있을 땐가.
“자. 입에 맞을까는 모르겠다만.”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아빠.”
나는 커다란 접시를 받아 들려고 손을 뻗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고는 내 손을 잡아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홀 구석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 음식 접시를 올려놓고,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날 훌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아버지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었다.
“혹시 무서운 건가?”
“아니에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다리 아팠을 텐데 투정 부리지도 않고, 배고팠을 텐데 칭얼대지도 않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치였을 텐데 보채지도 않고.”
내가 파티를 한두 번 다녔겠나.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겠나.
별것도 아닌 일에 유난 떨 필요는 없······.
아버지는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씩씩하게 잘 참았구나. 착하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피곤하면 방에 가서 누워 있을래?”
“방이요?”
“여기 호텔에 방 잡아뒀다. 아무래도 아빠는 좀 늦을 것 같아서.”
아버지는 호텔 룸 넘버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쪽지를 받아 들었다.
아버지는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오는 곳이라 낯설 텐데. 심심하지?”
“전 알아서 재밌게 잘 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로 재밌었다.
돈 되는 주식 정보부터 정치권의 은밀한 움직임까지.
이곳은 말 그대로 고급 정보의 노다지였다.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양반들이 벌이는 우스운 작태도 아주 재밌었고 말이다.
나는 씩 웃었다.
“얼른 가보세요. 아저씨들이 아빠를 기다려요.”
아버지 주변에는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한테까지 쓸 정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도 아버지가 내게 관심을 쏟고 있구나 싶으니까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 홧홧했다.
“이따 멋진 거 보러 갈까?”
“멋진 거요?”
“현무호텔 정원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더라. 알록달록 아주 예쁠 거다.”
불꽃놀이?
송년의 밤 행사에서 원래 그런 걸 했었나?
“정혁아, 아빠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할아버지가 가져온 수서동 땅을······.”
나는 아버지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빠, 저기 오 사장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오 사장님?”
아버지가 돌아보자, 그제야 현무건설 오 사장은 싱긋 웃었다.
“부자간의 다정한 시간을 방해하게 되어서 미안한데?”
“오랜만입니다, 오 사장님. 안 그래도 불꽃놀이는 언제 할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건 9시에 하기로 했지. 잠깐 얘기 좀 할까?”
현무건설 오 사장은 슬쩍 눈짓했다.
나는 아버지의 등을 떠밀었다.
“다녀오세요. 전 여기서 먹고 있을게요.”
“그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고치며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어이, 수호신!’
[그래, 간다.]
스스스슥.
저승사자가 재빨리 아버지 뒤를 따라붙었다.
* * *
현무건설 오 사장은 홀을 가로질러 갔다.
“자네가 앞으로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맡기로 했다지?”
“예, 그렇게 됐습니다.”
“좋아. 그럼 자네에게 사람을 한 명 소개해 주겠네.”
“소개요? 누구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현무건설 오 사장은 씩 웃었다.
“구재철 서울시장.”
구재철이라면 제주도지사, 수산청장, 경북도지사와 서울시장을 역임한 후 머지않아 내무부 장관에 오르는 자였다.
강북의 명문고 강남 이전,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립, 금화터널 건설 등 강남 개발을 가속화시켜서 ‘황야의 무법자’란 별명이 붙은 사람인데.
역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지하철 2호선 공사라 할 수 있었다.
“자네도 알지? 서울시장은 지하철 2호선 공사의 결정권자이자, 공사 대금을 지불하고, 공사 현장을 관리 및 감독하는 책임자라는 거.”
지하철 2호선은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국책사업이다.
“자네는 구 시장에 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나?”
“포병장교 출신의 행정 관료라고 알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중히 쓰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래. 각하와 함께 쿠데타에 동참했던 최측근이라 할 수 있지. 구 시장은 특히 지하철 2호선 공사에 아주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네.”
“지하철 1호선 공사 이상으로 성공시켜야 한다며 야심 차게 2호선 공사를 추진한다더군요.”
“참고로 구 시장은 양택석 전(前) 서울시장이 수립했던 지하철 2호선 노선 계획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현무건설 오 사장은 작게 귓속말을 전했다.
“양 전(前) 시장은 2호선을 김포공항에서 목동, 여의도, 공덕을 걸쳐 을지로를 지나 왕십리에서 강남으로 꺾어 양재동에서 끝나는 노선으로 설계했거든.”
“그렇게 되면 강남 개발에 따라 강남과 강북을 연결한다는 목적에는 부합할지 모르지만, 지하철 1호선이 경유하지 못하는 서울 주요 번화 지역을 관통한다는 당초의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겠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구 시장은 양 전(前) 시장의 계획을 완전히 엎어버리고 전면 백지화시켰지.”
현무건설 오 사장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구 시장은 서울시가 사대문 안, 영등포, 강남 3개의 도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3핵도시론을 주장하고 있어.”
3핵도시론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구재철 시장이 지하철 2호선 노선을 즉흥적으로 변경시켰구나! 총길이 48.8km, 43개 역으로 이루어진 서울 도심의 순환선으로!’
구재철의 일화는 유명하다.
구재철은 포병장교 출신이라서 그런지 지도 파악력이 무척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도시계획국장, 도시계획과장, 지하철건설본부장 등 최측근만 시장실에 불러다 놓고 극비로 노선 변경 계획을 강행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울시 지도를 펼쳐 놓고 군사 계획을 짜듯 지하철 2호선 노선을 슥슥 그려냈다는 것이다.
구로공단 앞은 통과해야 하고, 한국대 앞도 지나야 되고 등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고작 30분 만에 이뤄진 날치기 계획이었지만, 실제로 공사에 들어갔더니 놀랍게도 별다른 난공사 없이 지하철 노선 계획의 대부분이 그대로 이뤄졌다던데.’
구 시장의 계획에서 공사하다 변경된 유일한 부분은 지하철 1호선과의 환승역이 영등포역이 아니라 신도림역으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이는 당시 기술로는 이미 지어진 역의 지하를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만 해 두게. 구 시장을 만날 때 이 정보를 유용하게 잘 써먹으면 더 좋고. 아니면 말고.”
돈 주고도 쉽게 얻지 못할 귀한 정보였다.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현무건설 오 사장을 바라보았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정중한 인사였다.
현무건설 오 사장은 아버지의 어깨를 작게 두드리며 웃음 지었다.
“자네가 먼저 내게 손 내밀어 주지 않았나. 수서동 아파트 부지 말이야.”
< 현무건설 사장의 호의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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