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51화 (51/189)

< 금방 뚝딱 노선도 >

나는 피식 웃었다.

‘구 시장이 과연 우발적으로 그런 제안을 건넸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태성과 우광을 시장실에 불러서 은밀히 제안을 건넸다면 또 모를까.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 극비 정보라 할 수 있는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가져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아까 태성이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맡을 것 같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투자자에게 체비지를 내놓을 것 같자 너도나도 몰려들어서 투자에 관해 물었다.

그런 상황을 목격하고도 구 시장은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꺼내는 시늉을 했단 말이지.

이건 다분히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계산이 들어가 있는 노림수였다.

‘전형적인 기업 길들이기로군.’

어차피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다.

구 시장은 이미 계획을 세웠고, 그대로 추진할 작정이다.

아예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에서 내칠 수 있는 예산은 정해져 있네. 만일 태성이 그려온 계획이 획기적이고 뛰어나지 않다면? 별수 없이 우리가 계획한 탁상행정에 따라야지.

그게 구 시장의 권한이자, 청와대의 뜻이며, 예산의 집행 방향이다.

이참에 구 시장은 시공사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탁상행정이라는 비웃음과 불만마저 깔끔하게 종식시킬 의도인 것이다.

‘구 시장 딴에는 고작 일주일 만에 일개 시공사가 지하철 노선도를 그려올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하면서 건넨 제안이었을 테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아버지가 표정을 굳혔을 리 없고, 현무건설 오 사장이 터무니없는 요구라며 일축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예산과 기한까지 정해진 마당이라 따로 고려해야 할 것도, 계산해야 할 것도 너무 많다.

거기에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입찰 견적서와 공사 계획서까지 작성해야 하는 시기.

지하철 노선도 작성에 투입될 인원이 대폭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변변치 못할 노선도를 들고 오거나 빈손으로 올 확률이 몹시 높다.

‘노골적인 계산속이고, 귀찮은 수작질이다. 오래 공들일 필요는 없겠지.’

차라리 구 시장이 우광건설에 제안을 건네기도 전에 우리가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버리는 게 더 낫지 않겠나.

내가 지하철 2호선 노선표를 그리면 굳이 아버지와 태성건설 사람들이 일주일간 모여서 끙끙댈 이유도 없어질 테고.

좋은데?

‘이왕 찍어야 하는 눈도장이라면 당일에, 확실하게, 화끈하게 찍는 게 최고다.’

이미 구 시장은 아버지보고 몇 차례나 ‘젊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관록과 경험을 우대하는 이 바닥에서 약간의 못 미더움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무시받는 것보다는 인정받는 편이 낫지.’

무려 5년이나 같이 손발을 맞춰 진행해야 하는 대공사다.

결정권자이자 감독관이 시공사를 눈 아래로 보고 틈만 나면 갈궈대면 매사가 엄청 피곤해진다.

‘오히려 잘됐군.’

만일 태성이 구 시장이 구상했던 것과 흡사한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그려온다면?

구 시장의 말마따나 같은 목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건설 전문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구 시장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앞으로 태성의 능력을, 아버지의 젊음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딱 하나, 문제가 있는데.’

사소하다면 또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당장 어디서 서울시 지도를 얻어 오지?’

서울시 지도가 있어야 지하철 노선도를 그릴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슥 둘러봤다.

이곳은 현무호텔의 행사장.

호텔 로비에 있을 안내 데스크가 떠올랐다.

‘프런트에 서울시 관광 지도가 있으려나? 아니면 서울시 지도책이라도 쓰면 되겠지 뭐.’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들 때가 아니라서 호텔 프런트에 관광 지도가 구비되어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네비게이션이 없는 시절이라 다들 지도책을 보면서 운전했다.

나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러 갔다.

* * *

“도련님!”

내가 홀에서 나오자, 유종태와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반색하면서 달려왔다.

“도련님,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혹시 다리 아프세요?”

“아이고, 손이 얼음장입니다. 제 털장갑이라도 끼세요.”

“볼이 빨갛군요. 열 있는 거 아닙니까?”

태성그룹 경호원 중 누군가는 내 팔다리를 조심스럽게 주물렀고, 또 누구는 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다리에 알이 배기진 않았습니다. 찰떡처럼 말랑말랑한 게······.”

“다행히 열도 없군요. 그저 볼에 홍조가······ 볼 한 번만 만져봐도 될까요?”

“어허, 어디서 감히 신입 주제에. 넌 뒤로 빠져 있어, 인마.”

어느새 유종태가 경호원들을 물리치고 제일 앞에 섰다.

“눈가에 눈물 자국 없고, 입가에 초코 자국 없고. 좋습니다.”

유종태는 평소처럼 능글능글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었다.

“씩씩하고 야무진 표정으로 보아 우리 도련님이 확실하군요. 혹시 위로나 격려 같은 거 필요하진 않으세요? 제 품은 아주 넓고 따뜻합니다. 자, 여기로 들어오시죠.”

“됐어요. 정중하게 사양할게요. 그나저나 왜 다들 여기에 모여 계세요?”

“우광에서 왔다잖습니까. 혹시 모를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잠시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지요.”

태성은 우광과의 혼사를 파투 내기로 결정한 후였다.

그걸 태성그룹 경호원들도 전부 알고 있었다.

행여 행사장 안에서 싸움이라도 날까 우려해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련님, 안에서 뭐 좀 드셨어요?”

“마침, 아주 우연히, 어쩌다 보니, 은단과 뻥튀기가 있는데. 드실래요?”

“답답한 분위기에 체라도 하실까 봐 어린이용 소화제도 준비했습니다.”

그때 유종태가 주머니에서 음료수병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도련님, 따끈한 호빵은 없지만, 미지근한 두유는 있습니다. 손이 차가울 때는 이런 걸 먹어줘야죠.”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나는 순순히 유종태와 태성그룹 경호원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눈을 번쩍였다.

“호빵이랑 두유······. 메모······.”

“잠깐만요, 유 팀장님! 미지근한 두유랑 따끈한 두유 중에 어느 게 맞습니까?”

꼬르륵!

어디선가 민망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아까 아버지가 가져다준 핑거푸드를 몇 개 집어 먹었는데?

꼬르륵! 꼬르륵!

역시 내 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보자,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어색하게 뒷머리를 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혹시 지금까지 저녁도 못 드신 거예요?”

“······.”

“지금이 몇 신데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뭐라도 좀 드세요.”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안에 못 들어갑니다.”

“괜찮습니다, 도련님. 저녁이야 나중에 먹으면 되죠.”

“행사 끝나고 먹을 겁니다. 우리는 포상으로 소고기 회식권도 받았잖아요.”

문득 대한민국 지하금융을 장악한 전(前) 시대의 거물들에게 급이나 주제 따위를 운운하면서 당장 끌어내라고 날뛰던 우광건설 사장이 생각났다.

왜 여기서 덩치 좋은 남자들이 한가득 어슬렁대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비서나 운전기사, 혹은 경호원일 것이다.

‘진짜 유치하게 구네. 누군 사람이고 누군 머슴이야?’

돈 많은 전(前) 시대의 거물들도 내쫓으려는 판에 경호원이나 운전기사들까지 챙겨줄 리 없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럼 지금 해요, 소고기 회식!”

나는 동전 지갑에서 10만 원권 자기앞수표를 꺼내 들었다.

10만 원권 자기앞수표는 최고액권으로 부유층들이 많이 사용하곤 했다.

태성건설 전(前) 사장의 금고를 털면서 내 몫으로 떨어진 돈이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까지 굶으면서 야근하는 건 너무 서럽잖아요.”

“도련님······.”

“우리 엄마가 철구 아저씨 굶었다는 소리에 화냈던 거 기억하죠? 얼른 가서 소고기 먹어요.”

“아닙니다, 도련님.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여기 현무호텔 레스토랑의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와인도 비싸고 좋은 걸로 곁들여 드세요.”

“아직 행사도 다 안 끝났고······.”

“행사는 태성이 아니라 현무에서 주관하는 거고요. 이젠 혹시 모를 싸움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할아버지랑 우광그룹 회장님이 사이좋게 술 마시러 가셨거든요.”

나는 웃었다.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면 교대로 저녁을 먹고 오면 되지 않을까요? 근무 중이니까 와인도 딱 한 잔씩만 해요.”

여긴 술잔으로 쓸 화채 그릇은 없겠지만.

“도련님,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뭐라고 이런 거금을······.”

“매일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우리 아빠 일을 도와주시는 게 고마워서 그래요. 꼭 맛있는 저녁 한 끼 근사하게 대접해드리고 싶었어요.”

10만 원권 자기앞수표가 도합 다섯 장, 총 50만 원!

이 시절 장관 월급이 25만 원이었고, 국무총리 월급이 35만 원이었다.

“그리고 저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태성가 사람으로 인정받았어요. 그게 너무 기뻐서 축하주 한잔 사려고 하는데요.”

“아······!”

“혹시 축하해주기 싫어서 제가 사는 저녁밥을 거절하는 거라면······.”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재빨리 손을 내저으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도련님. 합시다, 회식! 소고기 회식, 해야죠!”

“안 그래도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싶습니다, 소고기 만세!”

“우리 도련님이 정식으로 태성가의 일원이 되셨다는데 당연히 축하해드려야죠. 샴페인도 터트릴 겁니다!”

나는 유종태에게 자기앞수표를 내밀었다.

“잔돈은 팁이에요.”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몹시 기쁜 얼굴로 대뜸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봤지? 벌써부터 이렇게 통 크고 화끈하신 거! 이분이 바로 우리 태성의 막내 도련님이시다 이거야!”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며 모른 척했다.

유종태가 보란 듯이 부채처럼 펴서 들고 있는 10만 원권 자기앞수표를 보면서 부러운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입맛을 다시는 사람도 있었고, 딴청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다시 동전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날도 춥고 쌀쌀한데 뜨거운 커피와 간식거리라도 넉넉하게 사와서 이분들께 돌려주세요.”

여기는 호텔 로비 문이 활짝 열린 데다 석유곤로 하나만 피워져 있어서 홀 안에 비해 너무 쌀쌀한 것 같거든.

“어······?”

“저희 것도 챙겨주시게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슬쩍 고개를 빼 들었다.

“유 팀장님, 혹시 서울시 지도나 지도책을 구할 수 있을까요?”

“서울시 지도요?”

“네, 우리 아빠가 공사한다니까 궁금해서요. 안에 가져가서 보려고요.”

“어이, 신입!”

유종태가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차 키를 휙 던졌다.

딱 봐도 어린 티가 나는 경호원이 얼떨결에 차 키를 받았다.

“내 차 뒷좌석에서 굴러다니는 지도책 좀 가져와 봐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담배 때문에 완전 누렇잖아요. 괜찮을까요?”

어쩔 수 있나. 급한 대로 그런 거라도 써야지.

잠깐 보여주고 버릴 지도에 금 발라먹을 것도 아니고.

“상관없어요. 혹시 빨간 사인펜이나 매직이 있으면 그것도 좀 부탁할게요.”

“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태성그룹 신입 경호원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런데 웬 멀끔하게 잘 차려입은 남자가 손을 들었다.

“마침 나한테 꽤 커다란 서울시 지도가 있는데. 이거라도 괜찮다면.”

잘 포장된 선물용 고급 지도였다.

나는 먼저 건네는 호의는 마다하지 않는 사내지.

“유 팀장님, 저분도 같이 스테이크 합석이요!”

“알겠습니다. 금조그룹 장 비서님, 혹시 합석 가능하시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호의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난 호의와 감사의 빚을 떼어먹는 타입은 아니라서.

“그럼 지도값이라도 받으셔야죠. 고마워요.”

나는 두둑한 성의를 그의 양복주머니에 찔러주었다.

“······.”

그는 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유종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실까요?”

“김 비서님이요.”

“아하, 김 비서님이라면 지금 현무호텔 바에 올라가셨는데요? 회장님이 더덕주를 까신다고 해서 말입니다.”

“김 비서님께 잠깐 시간 좀 내달라고 전해줄래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마침 신입이 헥헥대면서 지도책과 빨간 사인펜을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나는 두 손을 모아 배꼽 인사 했다.

“······?”

왠지 로비에 있는 모든 이가 이쪽을 주목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러든가 말든가.

어차피 난 남들 눈을 피해서 화장실 안에 들어가 지하철 2호선 노선도나 그릴 건데 뭐.

3분이면 충분하지!

* * *

김 비서는 홀에 들어섰다.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버지는 홀로 테라스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김 비서와 마주했다.

“도련님, 선물 가져왔습니다.”

“선물? 이렇게 뜬금없이 말입니까?”

“구 시장님께서 요구하셨다던 제안 말입니다. 구 시장님이 귀가하시기 전에 제출하고 끝내죠.”

“······!”

아버지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김 비서를 바라봤다.

“지금 제안받은 지 20분도 채 안 지났습니다만. 그게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뭡니까?”

김 비서는 곱게 접힌 지도를 흔들었다.

아버지의 눈동자도 지도가 흔들릴 때마다 같이 흔들렸다.

“서, 설마······.”

“그럼 가실까요? 가는 동안 이걸 읽고 숙지하십시오.”

김 비서는 빼곡하게 글자가 적힌 종이도 내밀었다.

“그건 또 뭡니까?”

“구 시장님의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있어야겠죠?”

“······?”

솔직히 말해서 지하철 노선도 그리는 시간보다 저걸 적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 금방 뚝딱 노선도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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