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럴 수가! (2) >
구 시장은 아버지의 말을 곰곰이 되씹는 듯 생각에 잠겼다.
“영등포역은 이미 지하선 1호선이 선로가 지나가고 있고, 현재의 한국 토목 기술력으로는 이미 지어져 있는 역의 지하를 관통하여 굴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라······.”
아버지는 덧붙였다.
“지질학 및 지정학적인 이유로도 신도림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거긴 기존의 역에서 살짝 비껴 짓는 게 가능합니다.”
“일리가 있군.”
구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태성의 개착식 흙막이 공법만으로는 어려워도 이번에 일본에서 들여온 NATM 공법이나 TBM 공법을 활용하면 어떨까? 그걸 써도 힘들 것 같나?”
“어렵기야 하겠지만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어떻게든 공사는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비용과 안전상의 문제까지 고려해볼 때 굳이 그렇게까지 무리해야 할까 싶군요.”
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요컨대 이건 현실적인 이유에 따른 선택의 문제란 겁니다. 무리하게 지하 터널 공사를 강행하다가 인명 피해라도 크게 나면 태성도, 구 시장님도 곤란해질 겁니다.”
“으음.”
구 시장은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다.
서울시장이 된 후 누구보다 강한 의지로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밀어붙이는 것도 다 빛나는 실적을 챙기기 위해서인데.
시행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가 인명 피해가 크게 발생한다면?
그에 따른 모든 비난을 구 시장이 감수해야 한다.
추후 정치적인 부담을 크게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태성은 막대한 공사비까지 부담해야 하니 영등포역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을 제시한 겁니다.”
“그래. 어차피 정해진 예산과 기한 안에서 완성해야 하는 공사, 계획 과정에서 변경한다면 피할 수 있는 위험과 비용을 구태여 떠맡고 싶지는 않겠지.”
구 시장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림. 확실히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선택지로군. 인정하지.”
구 시장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젊은 친구가 정말 대단해. 나조차도 간과한 점을 이렇게 딱 짚어낼 줄이야.”
구 시장은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이렇게까지 내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여태 없었어. 심지어 각하께서도 내게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맡아 추진해 보라고 하셨지, 내 도시계획 자체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구 시장은 몇 번이나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이런 계획을 구상했나 싶군. 마치 내 속을 꿰뚫어 보듯이.”
아버지를 보았을 때 은연중에 짓던 못마땅하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기쁨과 즐거움, 기대와 흥미가 자리 잡았다.
“내친김에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
“물론입니다.”
“내가 이 순환선 계획을 내놓았을 때, 시장실로 불렀던 도시계획국장, 도시계획과장, 지하철건설본부장 등은 한 가지 문제를 우려했었네. 자네는 그걸 어떻게 해결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구 시장은 표정은 물론 목소리마저 들뜬 기색이었다.
“일반적으로 지하철 노선은 도심과 외곽을 잇도록 방사형으로 구성해. 도심이 과밀화되어 교통량이 포화상태에 이를 때에야 부도심을 개발하기 위해 순환선을 짓는다. 하지만 자네는······.”
“왜 태성은 순환선을 우선 기획했느냐는 말씀이로군요. 쉽습니다. 구 시장님의 3핵도시론에 감명받았기 때문입니다.”
구 시장의 3핵도시론이란 서울시가 사대문 안, 영등포, 강남 3개의 도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문제는 순환선을 보조해줄 방사형 간선을 따로 마련하면 해결됩니다. 그런 이유로 지하철 3호선과 지하철 4호선 계획도 따로 구상해 보았습니다.”
“뭐라고? 지하철 2호선뿐만 아니라 3호선과 4호선까지?”
구 시장은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누렇게 변색된 서울시 지도를 내밀었다.
“이건 지하철 3호선의 노선도와 지하철 4호선의 노선도입니다. 순환선이 미처 채우지 못한 교통의 빈틈을 충분하게 메꿔줄 방안이죠.”
“그거 당장 이리 줘 보게!”
구 시장은 참지 못하고 지도를 빼앗듯이 가로챘다.
구 시장은 눈을 부릅뜨고 지하철 노선도가 그려진 지도를 보았다.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구 시장은 비명 같은 경악성을 토했다.
“이건 나조차도 지금 구상을 다 끝내지 못한 계획이야! 그런데 어떻게 내가 막연히 그려왔던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지? 이, 이건 정말······!”
구 시장은 갑자기 아버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자넨 천재야!”
아버지는 움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에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당장 자네의 이 계획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어째서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을 이 노선으로 짰는지, 내가 그리고 있던 구상과 어떤 면이 같고 다른지, 태성이 꿈꾸고 있는 청사진이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구만! 자네, 시간 괜찮지?”
구 시장은 몹시 기뻐하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현무건설 오 사장도, 김 비서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구 시장이 어찌나 흥분했던지, 콧김까지 뿜어댈 기세였다.
“오 사장, 여기 호텔에 남은 방 있지? 스위트룸으로, 없으면 비즈니스룸이라도 좋아! 하나만 내놔 봐!”
“뭐? 갑자기 호텔 방은 왜?”
“내 이 친구와 밤새 지하철 노선 계획에 관해 논의해 봐야겠어!”
구 시장은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버지를 잡아끄는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오 사장이 왜 그리 자네를 극찬하나 했더니! 과연 정말 대단하군! 아주 훌륭해! 이참에 자네와 함께 서울시의 도시개발에 대해······.”
“······감사합니다, 구 시장님. 하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뭐?”
구 시장의 발이 우뚝 멈췄다.
덩달아 아버지의 발도, 현무건설 오 사장과 김 비서의 발도 멈췄다.
구 시장이 물었다.
“아니, 왜?”
현무건설 오 사장도 합세했다.
“진심인가?”
“예. 죄송하게 됐습니다.”
“무려 1,800억짜리 공사가 달린 일이야. 거기다 지하철 3호선과 4호선까지 하면 도대체 얼마짜리 대공사가 될지 모르는데, 이걸 거절하겠다고? 왜?”
“아들과 불꽃놀이를 함께 보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에 다들 입을 떡 벌렸다.
“고작 불꽃놀이 때문에?”
“현무화학의 불꽃놀이는 장관이지 않습니까. 송년의 밤 하이라이트 일정이기도 하고요.”
“허······.”
현무건설 오 사장의 입꼬리가 작게 실룩거렸다.
“불꽃놀이라면······. 한 5분 더 연장하라고 지시해 놓지.”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될 것 같군요.”
아버지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구 시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가족까지 챙기면서 살다니. 이건 나조차도 제대로 못 하는 일인데 말이야. 소신과 전문성까지 뚜렷한 젊은 인재를 탐내지 않을 도리가 없구만. 하하하! 잘 가게!”
구 시장은 오히려 아버지의 선택을 높이 샀다.
“그럼 내일 시청으로 오게나! 시장실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지. 그건 나도 양보 못 하니까 그런 줄 알고! 하하하!”
현무건설 오 사장은 재빨리 아버지를 따라잡으려다가 김 비서에게 붙잡혔다.
김 비서는 오 사장의 손에 슬쩍 접힌 쪽지를 쥐여 줬다.
“음?”
김 비서는 꾸벅 인사하고 미련 없이 아버지를 따랐다.
홀에서 나와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김 비서님, 쪽지에는 지하철 2호선에 관한 내용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내일 구 시장님이 묻는 질문에 병신처럼 버벅대지 않도록, 종일 토론을 벌여도 태성이 밀리지 않도록, 태성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도록, 제가 지하철 계획에 관해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비서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김 비서는 눈을 크게 떴다.
돈 봉투 일로 뻣뻣하게 굴던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좋습니다.”
김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현무호텔에 방을 잡아 놓을 테니 불꽃놀이가 끝나고 위로 올라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면 김 비서의 표정은 묘하게 어두워졌다.
착각인가?
* * *
“허······.”
현무건설 오 사장은 손바닥을 폈다.
“이, 이건······!”
태성그룹 경호원이 가져왔던 쪽지와 똑같은 글씨체였다.
<현무건설에서 그칠 게 아니라면 구 시장에게 제안하십시오. 지하철 공사에 사용할 폭약은 대한화학이 아니라 현무화학의 것을 써 달라고. 지하철 계획을 함구하는 조건으로.>
현무건설 오 사장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거야 원. 이번에도 태성건설에 빚을 지게 생겼군.”
지하철 2호선 공사는 지하 터널과 토목 공사가 무척 큰 규모가 될 예정이라, 사용하게 될 폭약량이 어마어마할 터였다.
“구 시장, 부탁이 있네.”
현무건설 오 사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이번에 아버지께 단단히 눈도장을 찍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나?”
“현무그룹 총수께?”
“방금 본 것은 입 다물겠네. 대신 지하철 2호선 공사에 사용할 폭약 납품처로 우리 현무화학을 선택해 줬으면 해.”
“호오.”
구 시장의 눈이 작게 접혔다.
현무그룹의 지주회사는 현무화학이다.
현무그룹 화학에서 시작해 중공업으로 그 영역을 넓히고 있었고, 현무건설은 그에 비해 작은 계열사에 불과했다.
“이런 쪽으로는 영 머리를 안 쓰던 친구가 오늘따라 똑똑한 제안을 하는군?”
구 시장이 지도를 곱게 접어 챙기며 턱짓했다.
“이따 방으로 올라가서 마저 얘기하자고. 이왕이면 견적서와 납품 계획서도 받아봤으면 하는데. 어렵겠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자고. 솔깃한 제안을 받았으니 구체적인 공급 계획을 들어보겠다는 것뿐이잖나.”
현무건설 오 사장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어려운 요구를 하면서 어렵게 생각하지 말란 소리가 나오나? 그게 어디 당장 만들어 바칠 수 있는 일이야?”
“태성은 30분 만에 지하철 2호선, 3호선, 4호선 노선도까지 그려왔는데.”
“······.”
“그것보다 어렵겠나?”
현무건설 오 사장은 참지 못하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단어를 내뱉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벌써부터 골이 지끈대는지 똥물을 삼킨 표정이다.
구 시장은 얄밉게 웃었다.
“왜? 자신 없나? 자신 없으면 포기하든가. 난 대한화학에도 같은 제안을 건넬 생각이니까.”
“해! 한다고! 누가 못 한대? 태성이 했으면 우리 현무도 할 수 있어!”
마음이 급해진 현무건설 오 사장은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홀에 남겨진 구 시장은 샴페인을 홀짝였다.
입꼬리가 올라간 지는 이미 오래였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오 사장이 드디어 뜻을 펼칠 결심이 든 모양인데.”
전쟁터와 정치판에서 굴러다니며 발달한 기민한 촉이 움직였다.
태성에서 시작된 새로운 바람이 불 모양이다.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줘야지.”
구 시장은 샴페인 잔을 들었다.
친구에게 보내는 건배였다.
* * *
저승사자와의 연결을 끊었다.
‘좋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현무건설 오 사장이 이번 일로 현무화학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건 내가 보답하는 호의였다.
“정혁아!”
아버지는 롱코트를 휘날리며 뛰어왔다.
숨은 거칠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무겁고 세련된 향수 냄새와 함께 더운 김이 훅 끼쳤다.
“아빠!”
펑! 퍼퍼펑! 펑!
아버지는 씩 웃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약속은 지켰다. 읏차!”
아버지는 나를 훌쩍 들어 목말을 태워 주셨다.
“우와아!”
“이제 좀 보이려나?”
어른들의 키보다 훌쩍 높아져서 사방이 뻥 뚫려 보였다.
하늘에는 오색빛깔 화려한 불꽃놀이가, 땅에는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과 전구가 반짝였다.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 잘 보여요.”
퍼퍼퍼펑! 펑!
어째서 가족들이 불꽃놀이를 보러오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불꽃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뻗고 활짝 웃었다.
“헤헤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와 함께 웃었다.
‘송년의 밤에 오길 잘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김 비서가 슬쩍 다가와서 작게 물었다.
“도련님, 지하철 노선도와 관련해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하, 이것 참. 당장 아버지가 숙지해야 할 일이니 귀찮다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전반적인 서울 도시 계획에 관해서라면 김 비서도 잘 알고 있겠지.
그럼 3분이면 되겠네!
“좋아요. 이따 잠깐 화장실로 따라와요.”
“감사합니다, 도련님.”
어째선지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김 비서가 활짝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우광그룹 회장실.
우광그룹 김 회장이 던진 꽃병이 우광건설 사장의 머리를 스치며 날아갔다.
쨍그랑!
꽃병은 산산이 깨졌고, 벽을 타고 물이 뚝뚝 흘렀다.
우광건설 김 사장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뚝뚝 흘렀다.
“회, 회장님!”
“그 입 닥쳐.”
우광그룹 김 회장의 목소리는 북풍한설처럼 싸늘했다.
“어제 차 회장은 내 체면을 봐서 그냥 넘어간 모양이다만, 난 아니야.”
< 이럴 수가! (2)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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