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빛 서류 >
김 회장은 우광건설 김 사장을 향해 절뚝이며 걸어갔다.
지팡이를 짚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김 회장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무거웠다.
“차 회장은 아이만 거둬 키우고 어미는 돌려보낼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누군가가 부린 수작질을 알게 되어 동생은 내치고, 내 딸과의 혼사도 접기로 결심했다더군.”
김 회장의 눈빛이 칼날처럼 꽂혔다.
“왜 그랬냐?”
우광건설 김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뭐라고 변명해야 무사히 수습할 수 있을지 머리를 팽팽 굴렸다.
“잡소리 하지 말고. 있는 대로 말해. 이 일이 너랑 무슨 상관이야?”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본 기술 고문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한 건 또 뭐고. 왜 다시는 우광과 상종하지 않겠단 소리가 나왔지?”
“그건 태성이 중간에 수작질을······.”
“무슨 수작질?”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태성이 분명 일본인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중간에 오해가······.”
“무슨 오해?”
우광건설 김 사장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일본인과 대화 한 번을 못 해보고 놓쳤다.
“어제 송년의 밤. 정관계 인사들이 우광에게 보내던 그 싸늘한 눈초리는?”
“그건······.”
“내 앞으로 몇 명한테 항의 전화가 온 줄 알고는 있나?”
“죄송합니다. 그건 나중에······.”
“이것까지 제대로 설명 못 한단 말이지.”
김 회장은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내 딸 혼사도 망쳤고, 정관계 인사들과의 관계도 망쳤고, 기술 협정도 망쳤고, 지하철 2호선 공사까지 망친 것 같고.”
김 회장은 풀어 내린 넥타이를 주먹에 둘둘 말기 시작했다.
“하라는 설명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저 변명할 생각에 눈알만 굴려대는 놈을 내가 봐줘야 하나?”
김 회장이 넥타이가 감긴 주먹을 꽉 쥐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입 다물어.”
“전부 별것 아닌 일입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입찰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퍼억!
김 회장의 주먹에 우광건설 김 사장은 고개가 돌아갔다.
김 회장은 우광건설 김 사장의 멱살을 틀어쥔 채 주먹을 날렸다.
퍼억! 퍽! 빠악!
피가 튀고, 침이 튀고, 둔탁한 소리가 튀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형과 맞붙는 대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번 지하철 2호선 공사는 반드시 우광이 따오겠습니다! 아시잖아요, 전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서 가져오는 놈이라는 거!”
김 회장의 주먹이 우뚝 멈췄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로 증명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사업만 괜찮으면 다른 건 다 수습 가능합니다!”
김 회장의 싸늘한 눈빛이 우광건설 김 사장의 뒷머리에 내려꽂혔다.
“서울시를 관통하는 지하철! 1,800억짜리 공사! 지하철역과 체비지라는 콩고물을 흔들면 정관계 인사들은 절대 우광에게 등 못 돌립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외쳤다.
“실력으로 증명하겠습니다, 결과로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은 완전히 실패한 후에 물어도 늦지 않습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믿고 맡겨주십시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무거워서 벽시계의 째깍째깍 소리가 거슬리게 들려왔다.
“일을 이따위로 망쳐놓고 무작정 덮어놓고 믿어만 달라?”
차가운 목소리였다.
“네놈은 어제도 천지 분간 못 하고 나대더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김 회장은 이번엔 가죽 허리띠를 풀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사색이 되었다.
“지하철 2호선 공사의 결정권자는 구 시장입니다! 관리 감독의 책임자 역시 구 시장입니다!”
혁대를 높이 치켜들었던 김 회장의 손이 우뚝 멈췄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정관계 인사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태성이 등을 돌렸든, 혼사가 깨어졌든, 태성에 투자금이 몰렸든,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걸 정하는 사람이 바로 구 시장이고요! 구 시장이 우광의 손을 들어준다면 게임은 끝납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의 말이 빨라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구 시장부터 구워삶아 보겠습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입찰까지는 보름 넘는 시간이 남았으니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잖아요!”
와장창!
김 회장이 허리띠를 냅다 던져 창가의 화분을 박살 냈다.
흰 도자기 파편과 흙 알갱이가 어지럽게 튀었다.
“꺼져.”
“가, 감사합니다, 형님!”
“송 팀장, 이 새끼 당장 끌어내.”
“예, 회장님!”
우광그룹 경호원들이 우광건설 사장에게 다가갔다.
“제 발로 돌아가겠습··· 어억! 이것 놔, 이 새끼들아! 으억!”
우광건설 김 사장은 질질 끌려 나왔다.
쾅!
우광그룹 회장실 문이 닫혔다.
우광그룹 경호원들이 힘을 풀고 떨어져 나가자, 우광건설 김 사장은 휘청거리다가 끝내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욕이 절로 나왔다.
이가 갈리고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회장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최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사장님, 피가······!”
“젠장!”
우광건설 김 사장은 손수건으로 피를 벅벅벅 닦아냈다.
입가는 터졌고, 코피는 멈추지 않았다.
“지하철 2호선 공사,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가 따내야겠다. 안 그러면 당장 나부터 뒤지게 생겼어.”
만일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따내지 못한다면 형이 어떻게 나올지는 눈에 선했다.
그게 무서워서 지금까지 정관계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돌리며 구워삶으려고 애썼다.
“애초에 태성과 실력으로 붙어서 이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꼭 실력이 있다고 공사를 따내는 건 아니지. 세상은 어차피 강약의 논리로 돌아가. 여차하면 힘으로 찍어 누르면 돼.”
벌떡 일어난 우광건설 김 사장은 저벅저벅 걸었다.
최 비서가 뒤따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시청으로 가자.”
“시청이요?”
“구 시장을 만나 봐야지. 구 시장만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두려울 게 없다.”
“지금껏 뇌물과 압박으로도 구 시장을 공략하지 못했는데, 인제 와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구 시장이 최근 지하철 2호선의 노선을 변경하는 일로 스트레스가 아주 심하다고 들었다. 양택석 전(前) 서울시장이 구상한 노선이 영 마음에 안 든다며 전면 백지화시키겠다던데. 그 빈틈을 파고들어야지.”
마음이 급한 만큼 발걸음도 빨라졌다.
“우리는 구 시장과 뜻을 함께하는 시공사의 포지션을 맡아보자고. 구 시장과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꿈을 꾸며, 같이 일할 수 있는 공동 협력을 제시해야지.”
“공동 협력이요?”
“노선도를 결정할 때부터 현장 경험이 풍부한 시공사가 참여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정치적인 부담도 나눠질 수 있지. 정치에 뜻을 둔 구 시장이라면 혹할 거야.”
우광건설 김 사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당장 구 시장을 못 꾀어내도 상관없어. 우리에겐 최후의 방법이 있으니까.”
우광건설 김 사장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스슥.
우광건설 김 사장과 최 비서의 뒤를 거무스름하고도 투명한 연기 같은 것이 뒤따랐다.
송년의 밤 행사가 끝나기 무섭게 밀착 감시를 명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차정혁의 히든카드, 믿는 구석이었다.
* * *
저승사자가 보내준 장면은 잘 봤다.
나는 현무호텔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생각했다.
‘흐음, 우광건설 사장이 믿는 구석이 있는 건 확실하군. 그게 뭘까. 구 시장을 못 꾀어내도 지하철 공사를 따낼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라면······.’
짚이는 게 있다.
‘역시 태성화학 화재 사고인가.’
이 사고로 23명이 죽고, 166명이 병원으로 호송됐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에 크게 노한 대통령이 할아버지를 청와대로 불렀다.
그 후 할아버지는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으며, 사재 30억 원을 출연하여 태성재단을 설립했다.
자숙하는 의미로 잠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지하철 2호선 공사는 우광으로 넘어갔다.
부스럭.
나는 동전 지갑에서 작게 잘 접힌 종이를 꺼냈다.
철구 아저씨가 친필로 적었던 진술서였다.
여전히 황금빛이 번쩍대는 게 다시 봐도 예사롭지 않은 종이다.
‘어이, 수호신.’
[······왜?]
‘여기에 적힌 태성화학 용의자들 뒤도 좀 캐 봐.’
[저 얍삽하고 비열한 놈 뒤를 캐는 건?]
‘그놈도 놓칠 수 없지.’
[양심은 안녕하신가? 이러다 과로사할 것 같······.]
‘오, 저승사자도 또 죽고 그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네?’
[······다녀오마.]
저승사자는 스르륵 사라졌다.
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려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심신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침에는 조식 뷔페, 점심에는 호텔 일식, 저녁에는 호텔 양식이라니.
“이게 바로 호캉스지. 아, 좋다.”
팔자 좋은 백수의 삶이 따로 없다.
어린애가 되어서 가장 좋은 게 바로 이런 거다.
남들 출퇴근하는 시간에 눈 비비고 일어나서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이 보호 아래에서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돈 싸움, 칼 싸움, 구역 싸움, 세력 싸움에 얽혀 목숨이 위험할 일도 없다.
“어린애의 일이란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거라니, 너무 좋잖아.”
사실 과거에는 얼른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린애가 벌 수 있는 돈이란 개미 눈물만큼이랄까.
‘뒷골목의 세계. 보호자가 없는 어린애의 삶은 참 가혹했었지.’
나는 껌을 팔든가, 소매치기를 하든가, 구걸을 하든가, 하다못해 양아치나 건달들을 위해 망이라도 봐야 했다.
집도 없어서 지하철역이나 공원에서 노숙하기 일쑤였으며, 겨울이면 창고나 보일러실에 몰래 숨어 자다가 걸려서 도망가던 날도 숱하게 많았다.
‘남들에게 호의를 구걸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삶이었달까. 내 어린 시절은 하루하루가 비참하고 더러웠지.’
떠올릴수록 진저리 처지는 시절이다.
그런 끔찍한 일을 두 번 겪기는 싫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부모님도 다 살아계시고, 호텔에서 먹고 자고, 어머니가 마사지를 받는 동안 난 이렇게 빈둥대고.’
일 안 하고 뒹굴거리고 있는데 아무도 때리지 않다니!
와, 이게 바로 천국, 그 자체!
뒷골목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난 스승님 밑으로 들어가면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인 편이지.’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만한 것을 찾던 나를 보고 스승님이 뭐라고 했더라?
-쯧쯧, 눈깔이 참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딱 봐도 쥐약을 뿌려놓은 빵을 좋다고 주워 먹으려고 해? 따라와라.
-국민학교에서 글과 산수라도 배워야 뭘 써먹기라도 하지. 좋은 머리를 왜 이렇게 썩히누.
덕분에 늦게나마 국민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승님께서 뒷돈을 찔러주고 가짜 호적을 마련해주신 덕분이었다.
그때까진 주민등록이나 호적 체계가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이라 틈이 많았다.
공무원들이 수기로 작성했었고, 이래저래 기재가 누락된 사람도 꽤 있었거든.
벌떡!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편하니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진 거다.
찬 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겠지.
“기분 전환엔 역시 산책이지!”
현무호텔 정원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예쁘게 꾸며놓은 데다 산책로와 정원을 제대로 정비해서 꽤 예뻤다.
어젯밤 봤을 때 훤한 낮에 한 번 더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외투를 챙겨입고 호텔 1층으로 내려왔다.
‘어······?’
현무호텔 로비로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승님!’
지금쯤 전당포에 있어야 할 양반이 이 시각에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지?
‘······어?’
스승님이 들고 있는 종이봉투에서 황금빛이 번쩍번쩍 터져 나오고 있었다.
< 황금빛 서류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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