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놓칠 수 없는 기회 >
우광건설 김 사장의 뒤를 따라 저승사자가 스르륵 다가갔다.
벌컥.
그때 서울시청의 시장실 문이 열렸다.
구 시장이 직접 데리고 나온 사람은 아버지였다.
구 시장은 몹시 흡족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덕분에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에 관한 구상이 확실하게 잡히는 것 같군.”
구 시장은 아버지의 어깨를 작게 두드렸다.
“역시 뜻이 통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단 말이야. 구청장 회의만 아니었어도 자네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이것 참 아쉽게 되었어. 우리 다음을 기약하자고.”
“예.”
“자네의 그 자신만만하고 담담한 태도가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여기서 얼마나 더 믿음을 주려고?”
구 시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입찰 자료, 제대로 준비해서 제출해야 할 걸세.”
“물론입니다.”
“난 이력에 오점을 남길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러니 자네가 더 신경 써서 자료를 제출해야 할 거야. 내 마음이 태성 쪽으로 기우는 것과 공사 입찰 서류를 날림으로 작성했는데도 눈 딱 감고 태성을 밀어주는 것은 엄연히 달라.”
“예, 태성은 무엇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을 테니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좋아! 바로 그런 말이 듣고 싶었지! 조심해서 돌아가게.”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우광건설 김 사장과 최 비서가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표정을 잔뜩 구겼다.
“공사 전에 결정권자를 만나서 로비를 하려나 본데. 그거 정경유착이야.”
하지만 대답은 아버지가 아닌 구 시장의 입에서 나왔다.
“정경유착? 그럼 자네는 왜 날 찾아왔나?”
뾰족한 소리였다.
“내게도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어. 자네가 시의원과 구의원은 물론 시청 관료들을 구워삶아서 자꾸 내 일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려는 모양인데. 난 그런 거 별로 좋게 보지 않아. 그게 바로 정경유착이지, 이게 뭐가 정경유착이야?”
“구 시장님, 조금 오해가 있으신 듯싶습니다.”
“오해? 그럼 내가 X도 모르면서 쓸데없이 트집이나 잡는다는 소리로군. 이것 참 어이가 없으려니까.”
구 시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아버지 역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재빨리 구 시장의 뒤를 따랐다.
“시장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십시오. 지하철 2호선 공사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한테 시간 맡겨놨나? 난 몹시 바쁠 예정이니까 이만 돌아가줬으면 하는데.”
“중요한 일입니다. 분명 시간을 내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제안을······.”
“그렇군. 마침 제안이라면 나도 해야 할 게 있었지. 공평하게.”
“네?”
“구청장 회의가 끝날 때까지 30분 넘게 걸릴 거야. 연말이라 한 시간 이상 걸릴 것 같은데.”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동안 지하철 2호선 노선도나 그려 보시게.”
구 시장이 손짓하자, 보좌관이 즉시 서울시 지도를 건넸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그리라니요?”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변경하기로 했네. 우광은 가장 유력한 시공사 후보 중 하나이니, 지하철 계획에 관한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주려고 해.”
구 시장은 얄밉게 씩 웃었다.
“어디 우광이 꿈꾸는 지하철 노선을 그려보라고. 한 40개 역 정도 찍으면 돼.”
“어떻게 한 시간 안에 지하철 노선도를 그려낼 수 있답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잘하면 가산점, 못해도 불이익은 없을 걸세.”
“지금 구 시장님께선 어려운 요구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잔뜩 구겨진 우광건설 김 사장의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40개 역이라고요? 그럼 고려해야 할 게 얼마나 많아집니까? 공사 비용도 전부 우광이 부담해야 하는데, 그렇게 무책임한 요구를······.”
“왜, 못 하겠나? 자신 없어? 태성은 30분 안에 해왔는데. 우광은 힘든가 보지?”
“······예?”
우광건설 김 사장은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성이 뭘 어떻게 해요?”
“태성이 30분 안에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그려 왔다고. 심지어 현무도 해왔는데, 우광만 못 하겠다고 나오는군.”
“사, 삼십 분 안에? 태성과 현무 둘 다?”
구 시장은 우광건설 김 사장의 어깨를 지그시 짚었다.
“자신 없으면 포기해도 돼. 거기까지가 우광의 능력이라 생각하겠네.”
우광건설 김 사장은 욕설을 꾹 참는 것 같고.
“난 능력도, 비전도, 식견도 없는 상대와는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군.”
“······하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어떻게든 해내야죠.”
“좋아. 자네가 이렇게 의욕적으로 달려드는데 믿고 기다려 보지.”
구 시장의 웃음이 왜 이리도 음흉해 보이는가.
구 시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로 떠났다.
시장실 복도에 남겨진 우광건설 김 사장은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젠자앙!”
구 시장이 건넨 서울시 지도를 보자마자 참았던 욕설을 내뱉었다.
“태성은 어떻게 40개 역을 30분 안에 찍어서 제출했지? 1분에 역 한 개를 찍어도 시간이 부족하잖아!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표정이었다.
저승사자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더니 우광건설 김 사장을 내버려두고 어디론가 스르륵 사라졌다.
저승사자에게는 우광건설 김 사장 외에도 살펴봐야 할 다른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
바로 철구 아저씨가 추려낸 태성화학의 끄나풀들 말이다.
* * *
저승사자와의 시야 공유는 그렇게 끊겼다.
‘우광건설 사장의 표정을 보아하니 지하철 노선도는 글렀······ 앗! 스승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서 얼른 스승님께 쪼로로 달려갔다.
스승님이 들고 있는 그 황금빛 서류가 뭔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두 손을 모아 꾸벅 배꼽 인사 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꼬마 손님이 아니신가?”
“전당포에 찾아간 게 아니니까 손님이란 말은 빼주세요.”
“그래, 꼬마 손님 대신 뭐라고 부를까. 태성그룹 3세라고 불러주랴?”
스승님은 웃었다.
“비서 놈이 따라다닐 때부터 짐작은 했다만, 설마하니 태성의 막내 손자일 줄은 몰랐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차정혁이에요.”
“그래, 네 덕분에 초대장 잘 받았고, 좋은 구경 실컷 했다. 네 할아버지에게 비싼 술도 잘 얻어 마셨고. 꽁술 덕에 차 굴린 기름값은 본전 뽑았다.”
하여간에 꽁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신다니까.
“덕분에 태성도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쪽도 짭짤했으니, 썩 괜찮은 거래였지. 다음에도 건수가 있으면 또 부탁하자.”
“그러죠 뭐. 선수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래, 이 바닥 선수끼리 좋은 건수는 나눠 먹고 사는 거지.”
우리 사제는 마주 보며 웃었다.
“시간 괜찮으면 저랑 같이 차 한잔 마실래요.”
“안 그래도 여기 호텔 커피숍에 가는 길이긴 한데. 크흠!”
“전 쌍화차로 할게요. 계란 두 개 동동 띄워서.”
“있는 집 자식이라 티 내는 게야? 입맛이 왜 이리 고급져? 계란을 두 개씩이나 띄워 놓고 마시겠다니. 허!”
“그럼요. 태성그룹 3세인데 그 정도 사치는 부릴 수 있잖아요.”
“아이고, 이거 아무래도 시간이······.”
스승님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기 전에 나는 동전 지갑을 흔들었다.
“물론 제가 살 거예요.”
“약속까지 시간 넉넉하게 남은 것 같구나. 그럼 나도 쌍화차로 할까?”
하여간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좋다고 얻어마실 분이라니까.
하지만 난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열었다.
“그럼 사장님 것도 계란 두 개 띄워 드릴게요.”
“호오, 내 평생 이리 사치스럽게 마셔본 적이 없는데, 그 맛이 어떨지 벌써 기대되는구나.”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 스승님께 입은 은혜가 크다.
봄이면 새 학기라고 새 옷을 맞춰주시던 것이 고맙고.
여름이면 모기향을 슬쩍 피워주시던 것도 고맙고.
가을이면 고운 단풍 책갈피나 하라며 책 살 돈을 쥐여 주시던 것도 고맙고.
겨울이면 전당포 난로 위에 고구마나 가래떡을 구워주셨던 것도 고마워서.
“그런데 누구 만나러 호텔에 오신 거예요?”
“말하면 알고?”
“아마도요.”
스승님은 말문이 막혔던 모양인지 한참이나 헛기침을 대신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호텔은 뭐든 비싸다고 치를 떠시는 분이.”
“누군 비싼 호텔 오고 싶어서 왔나? 있는 것들이 고상 떤다고 호텔로 오라니까 어쩔 수 없이 왔지.”
“고상 떠는 있는 것들이요?”
절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스승님은 그런 사람들을 호텔이 아니라 전당포에서 만나곤 했다.
대부분 그쪽에서 급전을 쓰고 싶다며 무릎걸음으로 찾아왔으니까.
“은행을 세워볼까 한다.”
“푸흡!”
나답지 않게 쌍화차를 뿜고 말았다.
그만큼 스승님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은행을 세워요?”
스승님은 평생 음지에서, 전당포에서 돈을 굴리시던 분이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목 좋은 부동산을 쓸어 담아 땅 부자가 되었어도.
스승님은 은행에 대한 뜻을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니 이리 놀랄 수밖에.
갑자기 왜?
“네 덕분에 그리되었다.”
그건 은행을 세우겠단 말보다 더 황당한 소리였다.
너무 황당해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은행과 제가 무슨 상관이라고요?”
“네가 초대장을 보내주었잖느냐?”
초대장?
“어제 송년의 밤에서 내가 어떤 자들을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짐작하느냐? 이럴 수가! 번개가 뇌리에 꽂히는 것처럼 눈이 탁 트이는 게야.”
“전쟁 통에서 구르다가 사채에 눈 뜨셨을 때도 딱 그랬다면서요?”
“그래! 내가 왜 지금껏 이런 좋은 것을 몰라서 멍청하게 밑바닥을 굴렀는지, 시야 좁게 살아온 지난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승님은 무릎을 탁 쳤다.
“이 나라의 대사를 결정하는 인사들의 말들 속에는 돈 되는 정보가 한가득이란 말이야? 거기서 내 아주 좋은 걸 건졌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데요?”
“금융 개혁.”
스승님은 쌍화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과연 목소리는 더 은밀하면서도 또렷해졌다.
“꼬마야, 너 혹시 사채 동결 조치라고 들어 봤느냐?”
“네, 대통령이 긴급명령권을 발동해서 사채를 한순간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일이잖아요.”
스승님 앞에서는 일부러 어린애처럼 굴지 않아도 되니 편하단 말이지.
“일주일간 자금출처가 신고된 사채액만 약 3,600억. 이는 한국 전체 통화량의 약 80%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국내 여신 잔액의 약 34% 수준이었죠.”
“······!”
“제도권 금융을 잠식하고 있던 지하금융을 일거에 쳐내고, 사채시장의 자금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하기 위해 행한 극단적인 방책이었죠. 덕분에 건실하지 못했던 제도권 금융이 살아났고, 은행의 부실 채권을 틀어막을 수 있었어요.”
“허······!”
“상위 83개 기업 중에 45%에 달하는 부실기업을 강제 회생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까지 섞인, 일거양득의 수였달까요?”
스승님은 입을 떡 벌린 채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일곱 살짜리······! 아니, 됐다. 그래, 네 말이 전부 맞다.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다 맞췄다.”
“그래서 사채 동결 조치가 왜요? 2차 사채 개혁이라도 또 시행한대요?”
“머리고 좋은 녀석이 눈치도 빠르구나. 그래, 또 한 번의 금융 규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가 나돌더라.”
글쎄. 아닐 텐데.
‘그거 아마도 일부러 흘리는 헛소문일 거예요.’
사실 한 번의 사채 동결 조치를 시행하는 것만으로도 청와대가 짊어져야 하는 경제적, 정치적 부담이 제법 컸다.
대통령으로서도 경제를 크게 출렁이는 금융개혁을 연달아 펼치기엔 무리가 있다는 소리였다.
더구나 내년 7월에 대선이 잡혀 있는 시기.
또 한 번 더 금융계에 무리수를 던지긴 어렵지 않나 본다.
“이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강행한 굵직한 금융 규제가 대체 몇 개인지 모른다. 화폐 개혁과 환율 평가 절하는 물론이고 사채 동결 조치 같은 규제가 연달아 줄줄 나와! 정부가 규제의 칼을 한번 빼 들었다 하면 지하금융은 우르르 떼 몰살을 당하곤 했지.”
하지만 스승님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작게 줄인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더 은밀해졌다.
“조만간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규제 조치를 내릴 모양이더라.”
8.8 부동산 규제!
그건 부동산 투기 과열을 막기 위해 확실하게 강행하긴 한다만.
“부동산 규제에는 금융권의 규제 또한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거든.”
스승님은 씩 웃었다.
“그래서 조금 이르지만 우리도 은행을 세워서 양지로 나가 볼 생각이다. 규제가 우리의 발목을 잡기 전에. 좀 더 큰 물에서 놀아봐야겠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스승님을 바라봤다.
‘좋은데?’
왜 저 서류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이건 내게도, 스승님에게도, 태성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 놓칠 수 없는 기회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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