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수끼리 도와야죠 >
스승님은 껄껄 웃었다.
“나뿐만이 아니야. 종로 금이빨과 말죽거리 말대가리도 함께하기로 했다. 뒷골목 출신들의 연합이지.”
호오!
“말죽거리 말대가리가 제일 강하게 밀어붙였다. 공권력에 치가 떨린다더라. 경마장에 은행을 입점시킬 거라나 뭐라나.”
말죽거리 말대가리는 도박의 끝은 경마장이라며 호시탐탐 노리긴 했다.
하지만 과거에 말죽거리 말대가리는 끝내 경마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경마장 대신 카지노를 노리다가 마카오에서 총 맞아 죽었다.
“종로 금이빨 그놈은 꿈이 1순위가 외환은행, 2순위가 증권회사라더군.”
과거 금 유통과 환치기 전문인 종로 금이빨은 조폭 간 세력 싸움에 휘말려 죽었다.
금고는 물론 금은방과 구역까지 전부 빼앗긴 채 가리봉동 뒷골목 쓰레기통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까치산 방 여사님은요?”
“그쪽은 은행엔 관심 없댄다. 대신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세우고 싶다더라.”
까치산 방 여사는 복부인들이랑 계를 만들어서 떳다방을 운영하다가, 어느 날 안기부에 끌려가 시체가 되어 나왔다.
물론 까치산 방 여사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땅은 곧 택지로 바뀌었고, 은밀하게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가 대선에 쓰였다.
‘좋은데?’
과거엔 힘을 합치지 못하고 뿔뿔이 각자도생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전(前) 시대의 거물들.
그들이 내가 보낸 초대장을 받고 뜻을 합쳐 양지로 나올 작정을 했다니.
“좋아요. 그럼 저도 한 힘 보탤게요.”
“······응?”
그렇게 얼척없다는 표정은 짓지 마시죠, 스승님.
“잊으셨어요? 내 손에 어떤 장부가 있는지.”
“아!”
스승님은 그제야 우광건설의 뇌물 장부를 떠올린 모양이다.
돈 받아먹은 정관계 고위 인사들의 명단과 뇌물 수수액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살생부였다.
“지금 기득권층인 은행장들은 권력 있는 놈들이랑 맞닿아 있는 자들인데, 그들이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을 손 놓고 멀뚱히 지켜볼 리 없잖아요.”
하지만 이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꼬마야, 그건 네 할아버지 손에 들어간 거 아니었느냐? 가진 것도 없으면서 막 이렇게 선심 쓰면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뒷감당 걱정을 왜 해요? 원래 칼은 칼집에서 나오지 않을 때가 무서운 거예요.”
나도 스승님에게 바싹 달라붙어 작게 속삭였다.
“우리 태성은 익명의 후원자에게 편지를 받았다고요. 잊으셨어요?”
“뭐? 으하하하하!”
그제야 스승님은 너털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내 말뜻을 이제야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다.
왜? 뭐? 왜!
태성의 익명 후원자, 나 맞잖아?
“익명의 협박 편지 몇 통 정도는 기꺼이 보내드릴 수 있어요. 선수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으하하하! 그래, 이 바닥 선수끼리 좋은 건수는 나눠 먹고 사는 거지.”
“은밀하게.”
“흔적도 없이!”
우리 사제는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럼 태성이 대출받을 때는 아군 우대해주시는 거죠? 금리는 싸게, 대출은 빠르게.”
“맨입으로?”
“협박 편지 돌리지 말까요?”
“끄응.”
“사실 태성은 어쩔 수 없어요. 금산분리, 은산분리란 것 때문에요. 아시죠?”
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자본과 기업으로 대표되는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이다.
이는 부실 대출을 막고, 고객 간 이해 상충 문제의 방지, 정보의 독점 폐해에 따른 불공정 경쟁을 근절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하지만 투자 회사는 다르죠. 태성과 달리 얼마든지 은행에 투자할 수 있거든요.”
나는 씩 웃었다.
“저도 투자 회사 세워서 한발 걸쳐 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환영합니다, 투자자님! 우리는 언제든 돈 들고 오는 사람을 환영, 또 환영합지요.”
“이래도 맨입이에요?”
“으하하, 진짜 널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구나, 꼬마야!”
스승님은 기분 좋게 쌍화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저 짠돌이가, 계란을 두 개나 띄운 비싼 쌍화차를, 종일 아껴 마시지 않고 단번에 벌컥벌컥 들이켜다니.
탁!
스승님은 쌍화차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아직 태성 계열사 중에는 투자 회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거늘.”
“태성이 아니라 제가 세우는 회사가 투자할 건데요?”
“뭐?”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입 무거우신 거 믿고 알려드리는 거예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 혼자 공들여서 잘 키운 회사를 태성에 홀랑 갖다 바치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내 몫은 내가 챙겨야죠.”
“허······.”
“지금은 내가 은행에 투자하지만, 머지않아서 회사 하나를 인수할 생각이거든요. 그땐 화끈하게 도와주기에요?”
스승님은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이내 퍼뜩 제정신을 되찾았다.
“이제 막 은행 차린답시고 가진 돈을 다 털털 털어낼 텐데,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지하철역 정보를 싸게 넘겨드렸잖아요. 체비지도 챙겨드리잖아요. 조만간 땅값이 폭등하면 주머니가 두둑해지겠죠?”
“뭐라?”
스승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 재벌가에서는 이렇게 이른 나이부터 조기교육을 시킨단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어제 송년의 밤 행사에서 봤잖아요. 난 이제야 태성가에 입성했다니까요.”
스승님은 할 말이 없는지 또 부자연스러운 헛기침만 커흠댔다.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묻는 말이 고작 이거다.
“왜 하필 투자 회사냐?”
“쉽잖아요.”
일곱 살짜리 꼬마가 사장으로 앉아 회사를 굴린다는 게 어디 쉽겠나.
하지만 투자 회사는 조금 다르지.
“싹수 있는 회사를 선별해서 초기 사업 자금을 대주는 거죠. 대신 그 회사 주식을 왕창 뜯어낸 후 비쌀 때 팔아치워서 돈 벌려고요.”
역시 주식은 돈이 된다.
이제 막 제조업과 중공업이 제대로 성장하기 시작한 지금 이 시절엔 주식 투자로 더 크게 벌 기회가 아주 많았다.
오죽하면 성장세가 둔화된 21세기에도 가장 대표적인 재태크 방법 중 하나로 손꼽힐까.
하지만 스승님은 고개를 저었다.
“말이 쉽지. 그게 어디 눈만 가지고 되는 일이더냐? 싹수 있는 회사를 찾아내는 것도 일이지만, 그렇게 성장한 회사에서 내 돈을 되찾아 오는 것도 일이다.”
내가 그걸 모를까.
돈 회수에 목숨 걸지 않고서야 검은돈은 못 만진다.
“사업 자금 빌린다는 놈들은 처음엔 간이라도 내어줄 것처럼 굽신거린다. 하지만 돈맛을 보고 나면 금방 눈이 돌아가. 돈 빌릴 때는 무릎걸음으로 기어왔다가 돈 갚을 때면 침을 뱉고 가는 게 이 바닥이야.”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인데.
내가 그 꼴을 한두 번 봤을까.
그런데 스승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꼬마야, 만일 네 돈을 먹고 큰 후에 네 뒤통수를 갈기는 놈이 있거들랑 내게 말해라. 난 돈만 먹고 튄 자들을 곱게 보내지 않는 사람이란다.”
이것 참 든든하구만!
원래라면 내가 직접 해결하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일곱 살짜리 꼬맹이인지라.
내게는 충성을 맹세한 철구 아저씨와 태성그룹 경호팀장 유종태가 있지만, 더러운 일 만났을 때 생각나는 조커가 더 있으면 좋지!
“고마워요.”
오가는 호의 속에 싹트는 동업!
나는 동전 지갑에서 종이를 꺼내고, 외투에서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서 우리 집 전화번호를 썼다.
맨 끝에는 내 이름, ‘차정혁’도 빼놓지 않고 적어서 내밀었다.
“투자에 관심이 생기시면 여기로 연락 주세요.”
“응? 잘못 들었나? 뭔가 말이 좀 이상한데?”
“들으신 그대로예요.”
“뭐라? 아깐 네가 우리 은행에 투자하겠다며?”
“은행도 투자 회사에 투자하잖아요?”
나는 씩 웃었다.
“난 안목 있고, 돈 많고, 건실한 투자 기관을 언제나 환영하거든요.”
장담할 수 있다.
머지않아 스승님은 내가 준 전화번호로 연락하게 될 것이라고.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의자에서 내려와 두 손을 모아 꾸벅 배꼽 인사 했다.
난 쌍화차 두 잔 값을 계산하고 호텔 커피숍을 나왔다.
* * *
구 시장은 우광건설 김 사장이 그린 지도를 보았다.
“한 시간 동안 그려낸 게 이게 전부인가? 지도에 점 몇 개도 찍지 못했군.”
혀 차는 소리가 뒤따랐다.
“차라리 양 전(前) 시장의 지하철 노선도라도 그려내지 그랬나? 어린애가 대충 찍어도 이것보다는 잘 찍었겠어.”
“구 시장님, 이건 각하께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국책사업이지 않습니까. 우광건설 임원진과 함께 심사숙고해서 결정해도 부족한 일입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몹시 억울한 표정으로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듣다 못한 구 시장이 손을 들었다.
“됐네. 우광의 뜻은 그만하면 알아들었어.”
구 시장은 우광건설 사장이 그린 지도를 대충 접었다.
“그렇다면 특별히 우광에게는 제출 기한을 일주일로 늘려주지. 싫으면 말고.”
“좋습니다! 일주일! 반드시 제대로 된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작성해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광건설 김 사장은 그제야 얼굴을 폈다.
“가산점만 주되 불이익은 없는 거 확실하죠?”
“내가 허튼소리나 할 사람으로 보이나? 기한이나 제대로 지키게.”
“물론입니다. 그럼 일주일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우광건설 사장은 최 비서와 함께 달려나갔다.
“최 비서, 당장 우광건설 임원 회의 소집해!”
“예!”
“지하철 2호선과 관련된 모든 자료 준비해 놓고! 40개 이상의 역으로 구성된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작성하라고 해! 기한은 일주일!”
“지금 입찰 견적서랑 공사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지하철 노선도까지 짤 만한 인력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쪽 인력까지 전부 노선도 작성에 동원해! 이쪽은 기한이 일주일이고, 그쪽은 기한이 3주야!”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소리였다.
“구 시장의 마음에 쏙 드는 지하철 노선도! 거기에서 승패가 판가름 날 것이다. 불이익이 없어? 사람 마음이 기우는 것 자체가 한쪽엔 가산점이고, 다른 쪽엔 불이익이야!”
우광건설 김 사장이 서두르는 이유였다.
“호텔을 잡아놓고 일주일 동안 합숙시켜!”
“예.”
우광건설 엘리트들이 데굴데굴 곡소리가 나도록 구를 것이 확정된 순간, 최 비서는 물었다.
“그렇다면 태성화학 쪽 작업은······.”
“그건 최후의 보루라니까! 일단은 이쪽부터 신경 써야지. 구 시장의 마음만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런 위험은 굳이 무릅쓸 필요도 없다!”
구 시장은 시장실 유리창을 내려다보았다.
우광건설 김 사장과 최 비서가 급하게 시청을 빠져나갔다.
“쯧쯧, 한 시간을 줘도 그려내지 못한 비전인데, 일주일을 준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은가?”
구 시장의 책상 위에는 지하철 2호선 노선도 세 장이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두 건설사 간에 실력이 차이 날 줄은 몰랐군.”
오른쪽은 태성의 것, 가운데는 구 시장이 작성한 것, 왼쪽이 바로 우광건설 김 사장이 작성했던 것이었다.
“사장이라는 자의 식견과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어서야. 우광건설의 미래도 알 만하군.”
따르릉!
내선 전화였다.
“청와대에서 전화 왔습니다. 연결할까요?”
“빨리!”
구 시장은 급히 자세를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각하. 구재철입니다.”
-지하철 2호선. 어떻게 되고 있어?
대뜸 본론부터 시작하신다.
“안 그래도 그 일로 보고드릴 일이 생겼습니다.”
구 시장은 전화를 받으며 책상 위에 펼쳐진 지하철 노선도 세 장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지하철 2호선 공사를 맡길 시공사를 결정했습니다.”
-시간 좀 남았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번복할 것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기에?
“비전 있고, 기술력 있고, 투자금까지 많은, 지하철 공사에 적합한 건설사를 마침 발견했습니다.”
빨간색 사인펜으로 그려진 지하철 노선도.
신도림역이 들어설 곳에 별표까지 붙인 바로 그 지도가 구 시장의 눈을 사로잡았다.
“시공사의 비전을 보여달란 소리에 그 자리에서 서울시 지하철 2호선, 3호선, 4호선을 그려냈습니다. 30분도 안 걸리더군요.”
-흠.
“기술적, 지질학적, 지정학적, 비용적 측면에서도 완벽했습니다.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빈틈까지 완벽하게 보완한, 미래 한국의 도시개발계획 방향을 제시한 겁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시공사. 어디지?
“태성건설입니다.”
구 시장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무능하기로 소문난 차윤성 전(前) 사장이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사장은 수완도 좋고, 능력도 좋고, 여러모로 아주 뛰어납니다. 중동에서 큰 공사를 여럿 따내며 오일 머니를 벌어들여 국위선양까지 했다는군요.”
-음.
“각하께서 직접 보시면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런 의미로 이번 신년 오찬에서 재벌 총수들을 부를 때 그 친구도 함께 부르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좋다. 얼굴 한번 볼까?
“감사합니다, 각하. 지하철 노선도 챙겨 가겠습니다. 신년 오찬에서 뵙지요.”
-신년까지 갈 거 있나. 말 나온 김에 오늘. 술 한잔하지.
사석의 술자리 제안이건만, 구 시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더욱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예, 그럼 제가 지하철 노선도를 챙겨서 청와대로 가겠습니다.”
-근처 지나가는 길이야. 현무호텔이 좋겠군.
전화기 너머에서 한마디가 덧붙었다.
-그 친구도 불러.
< 선수끼리 도와야죠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