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물의 등장 (1) >
태성그룹 차 회장의 집에선 쉴 새 없이 전화가 울려댔다.
따르릉!
“여보세요?”
차 회장이 직접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이건 부인이나 가정부에게도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전화였다.
“태성건설에 투자하고 싶단 말씀이죠? 좋습니다. 그럼요. 이번 지하철 2호선 공사는 우리 태성이 꼭 따낼 겁니다.”
한참이나 투자 설명이 오갔다.
전화를 끊으면서 차 회장은 뿌듯하게 웃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군. 사업을 확장할 때마다 돈 빌리러 다니기 바빴는데 말이야. 허허허.”
“회장님, 목마르시죠? 꿀물 좀 드세요.”
탁.
차 회장의 두 번째 부인이자, 차성준의 모친이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체 무슨 전화가 하루 종일 오는지. 회장님은 중요한 전화란 말만 하시고. 좀 알려주면 덧나요?”
“태성을 도와주겠다는 귀한 투자 전화야.”
이 세상에 제 돈을 쉽게 내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사업하는 차 회장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러니 성심성의껏 응대할 수밖에.
“송년의 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투자 전화가 빗발쳐요? 험한 꼴 보게 될 거라며 저랑 애들에겐 갈 생각도 하지 말라 엄포를 놓으시더니.”
“험한 꼴 볼 뻔했지. 그런데 희한하게 일이 잘 풀렸어. 태성에 아주 대담하고 화끈한 후원자가 붙은 덕이지.”
차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수완이 어찌나 좋은지 말도 못해. 김 비서에게 현금 30억을 전달한 것도 모자라, 큰손들을 불러와 순식간에 150억이나 태성에 투자하게 만들었거든.”
“배, 백오십억!”
사모님은 숨을 들이마셨다.
“세상에, 그게 다 얼마래요?”
“태성화학의 딱 절반. 그게 우리 후원자가 하룻밤 만에 끌어온 투자금이야.”
“그게 누군데요?”
“몰라. 그저 태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것만 알아.”
차 회장은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는 대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꿀물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순식간에 판을 바꿔놨어. 모르긴 몰라도 보통이 아니야. 거물의 솜씨가 분명해.”
“거물? 정치 쪽에 발 담근 사람인가요?”
“글쎄. 동원한 현금을 보면 금융 쪽인 것도 같고. 하여간에 이건 판을 크고 넓고 길게 보던 자의 솜씨야. 그것만은 분명해.”
“대체 그 후원자가 어찌했길래 이래요?”
“쓰는 수가 수준이 높아. 우광은 정관계 고위 인사들에게 뇌물을 썼지만 후원자는 그들의 돈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했지.”
“그게 그거 아니에요? 힘 있는 자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똑같은데요?”
“같은 목적을 완전히 다른 입장으로 풀었다는 게 대단한 거야.”
호로록!
“고위 인사들 입장에서 보자고. 우광이 건넨 뇌물은 이미 제 주머니 속 돈이지. 청탁을 받거나 말거나 아쉬울 것 없어. 반면 제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우리 태성에 들어오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져. 우리 태성이 망하면 손해를 보게 되는 거지.”
“아!”
사모님은 손뼉을 탁 쳤다.
“이득은 당연한 거고, 손해는 절대로 보기 싫고?”
“그래. 우리 태성을 확실하게 밀어줘야 할 이유가 생긴 거지.”
탁.
차 회장은 꿀물이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건 몹시 어려운 일이야.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어디 호락호락한 사람들인가? 그런 사람들을 홀려서 앞다투어 투자하도록 몰아간 거지.”
“어떻게 홀렸는데요?”
“바람잡이 선정이 아주 기가 막혔어.”
송년의 밤에서 태성이 붙인 바람잡이는 야당 의원.
그것도 협박 편지의 화살을 다른 곳을 돌리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후원자는 달랐다.
대담하게도 지하금융의 큰손들을 끌어들여서 송년의 밤을 투자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차 회장은 턱을 쓸었다.
“이런 재주를 부리는 자라면 분명히 한가락 하는 사람일 텐데. 아무리 손꼽아 봐도 이만한 수완가는 없단 말이지. 대체 누굴까······.”
“호호호, 누구면 어때요. 우리 태성을 힘껏 밀어주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런 후원가가 눈독을 들인단 것만 봐도 우리 태성은 앞으로 더 잘될 거예요.”
사모님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차 회장의 너털웃음도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두 부부가 한참을 웃다가, 차 회장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제 우광과의 혼사를 파투 내고, 성준이 처자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뭐라고요?”
사모님은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아무리 혼사를 물리자고 졸라도 300억짜리 태성화학이 걸린 일이라며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으면서!”
“성준이가 원한다잖아. 제 처자식을 버릴 수 없다는데 어떡하겠어. 대신 태성화학을 넘기기로 했다.”
“잘했어요!”
차 회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성준이에게 물려줄 태성화학을 넘기면 어쩌냐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더니?”
“난 회사 일 따윈 몰라요. 하지만 집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것만은 잘 알아요.”
사모님은 팔짱을 꼈다.
“우광 회장의 막내딸, 우리 성준이 짝으로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고요.”
차 회장은 황당하단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내는 300억짜리 혼사를 망친 비난과 타박 따윈 생각도 않는 모양이니까.
“정말 괜찮겠나? 우광 쪽에서 사모들을 들쑤셔서 자네에게 면박을 줄 텐데. 입장이 아주 난처해질 수도 있어.”
“면박? 내 앞에서 헛소리를 하는 여편네부터 머리털을 다 뽑아놓으면 돼요.”
사모님은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간도 크게 내 앞에서 시비를 걸어요? 난 그 꼴 곱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거 아시잖아요.”
“허······.”
“머리채까지 갈 것도 없어요. 일단 마시던 찻잔부터 내던지고 테이블을 뒤집어엎을 때 즈음이면 다 도망가고 없거든요.”
사모님은 슬쩍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흠흠, 인왕산 선녀보살이 우광 딸이랑 우리 성준이는 궁합도 최악이랬어요. 그 애랑 엮이면 성준이가 단명에 비명횡사를 면치 못할 거라나 뭐라나.”
“또, 또, 또!”
“인왕산 선녀보살은 우리나라의 국운까지 맞춘 최고의 무당이거든요?”
“되도 않는 점쟁이의 헛소리!”
“결과만 봐요. 솔직히 말해서 우광 딸이랑 약혼한다 소리가 나오면서부터 성준이가 밖으로만 나돈 건 사실이잖아요? 7년이나 내 아들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봤다고요.”
사모님은 부르르 떨었다.
“인왕산 선녀 보살이 우리 성준이랑 이수진이 천생연분이랬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내가 지금도 그 돈 봉투만 생각하면······ 어휴!”
사모님은 벌떡 일어났다.
“우리 아들이랑 금쪽같은 내 손자 보러 갈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뭐? 이렇게 갑자기? 애 놀라면 어쩌려고?”
“어린애치고 사탕이랑 초코케잌에 눈이 안 뒤집히는 애는 없어요! 내가 아주 달콤한 것들로만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꼭 듣고 말겠어요! 두고 봐요!”
사모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차 회장은 크게 외쳤다.
“조만간 식구들 전부 불러다가 같이 신년맞이 밥 한 끼 하기로 했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하지만 아내는 이미 현관문을 열고 튀어나간 이후였다.
차 회장은 혀를 찼다.
“쯧쯧쯧. 하여간에 일단 들이박고 보는 건 저 나이가 돼도 여전하구만.”
따르릉!
마침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회장님, 저 김영걸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자네답지 않게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방금 구 시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각하께서 성준 도련님더러 술 한잔 같이하자 하셨답니다.
“뭐야? 그거 큰일이로군!”
차 회장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미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이 일을 대체 어쩌지? 아니, 각하께서 왜 성준이를 따로 부르신단 말이야? 이제 막 귀국한 애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설마 우광의 보복은 아니겠지?”
생각할수록 나쁜 상상만 점점 더 커졌다.
청와대의 뜻이 최우선인 시대였다.
“어디야? 술자리 하자시는 곳!”
-현무호텔이라고 합니다.
“안 되겠다. 나도 가 봐야겠다!”
지금 한가하게 밥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차 회장은 서둘러 외투를 걸쳤다.
“고 실장, 차에 시동 걸어! 더덕주 챙겨서 당장 현무호텔로 가자!”
“예, 알겠습니다.”
* * *
나는 현무호텔 산책로를 몇 바퀴나 홀로 돌았다.
내딛는 걸음마다 스승님이 말했던 은행과 내가 세우고자 하는 투자 회사 등에 관해 곰곰이 생각했다.
산책이 끝났을 즈음엔 내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역시 머리 굴릴 땐 산책이 최고라니까!’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을 마친 후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어?’
호텔 정문에 줄줄이 자동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가 멈추자마자 용수철처럼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태성그룹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서류 박스들을 안고 바쁘게 달려왔다.
무척 긴장한 표정에 다급한 걸음이었다.
“앗, 도련님!”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날 발견하고 반색하며 달려왔다.
“어머님은 어디 계시고 혼자 나오셨어요? 길 잃으신 겁니까?”
“아이고, 손 차가우신 것 봐. 볼도 꽁꽁 얼었네요.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계셨어요?”
“안 되겠다. 신입, 우리 도련님을 호텔 방까지 제대로 모셔다드리고 와라! 얼른!”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쭈뼛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도련님을 모시고 따뜻한 쌍화차라도 한잔 사드리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요?”
“아, 촌각! 아주 급한 일이란 뜻입니다.”
내가 단어를 몰라서 이러나, 상황을 몰라서 이러지.
“무슨 일인데요?”
“그건 국가 기밀이라서 감히 알려드릴 수가······!”
국가 기밀?
“그, 그렇게 예쁜 눈으로 바라보셔도 안 됩니다!”
“도련님, 얼른 호텔 방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곧 청와대 경호원들이 들이닥쳐서 이곳을 통제하고 사람들을 정리할 겁니다.”
청와대?
뜬금없이 점점 더 거물급 단어가 튀어나오니 나도 눈이 더 커질 수밖에.
그때 눈에 익은 고급 승용차가 도착했다.
아버지와 김 비서가 차에서 내렸다.
“도련님, 아버님을 부르시면 안 됩니다. 지금 정신없으실 겁니다.”
눈치 빠른 경호원, 자칭 넘버 투, 내 수족을 자처하는 유종태 경호팀장이 들고 있던 서류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날 달랑 안아 들었다.
“저 유종태가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얘들아, 자료 빠뜨리지 말고 얼른 날라 놔라.”
“예, 팀장님. 그럼 도련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종태는 날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눈알을 굴려 좌우를 확인하고서야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제가 몰래 국가 기밀을 알려드릴까요?”
“네!”
“구 시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아버님과 술 한잔 같이하자셨답니다.”
“네에?”
대통령?
나는 정말로 기겁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대통령이 왜 여기서 튀어나와? 정말 여기에 온다고? 현무호텔에? 갑자기? 아니, 왜?’
이건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때 검은색 차량이 줄줄이 잇달아 현무호텔 진입로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와대 경호원들이 도착했군요. 지금부터 호텔을 통제할 겁니다. 도련님, 이쪽에 있다가는 경을 칠 테니 방으로 올라가시죠.”
줄줄이 이어서 들어오는 검은색 세단 행렬과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면면이 아주 대단했다.
유종태는 목소리를 더 낮추어서 말했다.
“호텔 로비에 들어오는 순서대로 말씀드리자면, 서울시장, 청와대 비서실장,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 재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입니다.”
유종태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그 뒤를 따르는 게 각 부의 차관과 차관보입니다. 날고 기는 인사들이 줄줄이 튀어나오는군요. 이게 청와대 회의실인지, 사석의 술자리인지 헷갈릴 정도인데요?”
동감이다.
심지어 그들이 들고 있는 서류량도 만만치 않다.
‘근데 가져온 서류들은 왜 죄다 똥색이야?’
유종태가 말했다.
“외무부 장관은 대사관 사람들을 대동했군요. 으음, 어디더라. 중동 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중동? 오호라!
대통령의 이목을 확 끌 수 있는 정보가 떠올랐다.
< 거물의 등장 (1)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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