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58화 (58/189)

< 거물의 등장 (2) >

궁금했다.

책이나 서류상으로만 만나 봤던 대단한 인물이 곧 이곳에 도착한다니.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통령은 왜 아버지를 불렀을까? 그것도 사석의 술자리에?’

가뜩이나 바쁘신 양반이라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닐 테고.

그래서 물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빠를 부른 게 맞아요? 확실해요?”

“김 비서님도 구 시장님께 두 번이나 되물어서 확인하셨습니다. 회장님은 초대받지 못하셨다는군요.”

그러니 의아할 수밖에.

‘아버지는 대통령의 술자리에 참석하기엔 급이 맞지 않아.’

이 시절의 대통령이라면 태성그룹 총수인 우리 할아버지도 고개를 조아려서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쩔쩔매야 하는 상대였다.

새파랗게 어린 데다 고작 태성건설 사장에 불과한 우리 아버지?

청와대 비서실의 사무관조차 만나주지 않을 터였다.

‘급도 맞지 않는 아랫사람을 지목해서 술자리에 불렀다는 건 용건이 확실하다는 뜻이지. 대체 그게 뭘까?’

유종태는 작게 속삭였다.

“호출받은 이상 각하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로 비상출동 떨어지고, 관련 자료를 전부 옮겨서 필요시 즉각 대령할 수 있도록 세팅하던 중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준비한 자료라면 역시 지하철 2호선에 관한 공사 자료일 터였다.

‘아니야. 그건 구 시장에게 보고받는 것으로도 충분할 거야. 굳이 아버지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은 중요한 용건이 더 있다는 소린데.’

그때 현무호텔 진입로에 검은색 리무진이 등장했다.

즉시 청와대 경호원들의 통제가 더욱 철두철미해졌다.

로비에서 대기 중이었던 서울시장 및 장관 등도 재빨리 달려나와 2열 종대로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어이, 수호신!’

[그래.]

나는 저승사자와 시야를 공유했다.

* * *

눈앞에서 보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생생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만큼 저승사자도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울시장과 장관들을 2열 종대로 줄 세운 리무진의 주인.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밖에 없었으니까.

‘대통령과 최측근들이 도착했다!’

리무진이 현무호텔 정문 입구에 정지했다.

달칵.

청와대 경호원들이 달려가 주변을 경계하며 엄호했다.

날렵하게 생긴 남자가 보조석 문을 열고 내렸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중앙정보부장이로군.’

중정부장이 재빨리 뒷문을 열려고 했을 때, 그보다 먼저 반대쪽 뒷문이 열렸다.

“뒤로 빠져. 각하는 내가 모신다.”

부리부리하게 생긴 청와대 경호실장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중정부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청와대 경호실장은 옷깃을 털며 뚜벅뚜벅 돌아가 뒷문을 열었다.

“각하, 도착했습니다.”

“그래.”

바닥을 딛는 최고급 구두는 먼지 한 점 없이 광으로 번쩍거렸다.

양복 바짓단 주름이 칼처럼 잡혀 있었다.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최고급 밍크 털이 둘러진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서.

대통령이 차에서 내렸다.

‘이 나라 최고의 거물!’

이 시절의 대통령은 고작 5년짜리 뜨내기 권력자가 아니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간척지가 메워지고, 산이 뚫려 터널이 생기고, 외국 차관을 빌려와서라도 공장을 지어서 대령해야 하는, 말 그대로 절대권력의 시대였다.

‘이런 긴장, 이런 설렘이라니. 이거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군.’

애송이 때나 느껴보던 심정을 다시금 또 느끼게 될 줄이야.

‘아마도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던 유일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려나.’

그래서 더 흥미로웠고, 그래서 더 눈이 갔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지. 서로 가는 길이 달라.’

나와는 이번 생애에도 만날 일도, 엮일 일도 없을 테니까.

대통령은 코트 자락을 떨쳤다.

“각하, 오셨습니까!”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2열 종대로 모였던 서울시장 및 장관들은 90도로 허리를 굽혀 우렁차게 인사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대통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청와대 경호원들이 통제한 결과, 현무호텔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호텔 정문부터 로비가 통째로 뻥 뚫려 있었다.

“가지.”

대통령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신감이 넘치는 걸음걸이였다.

그렇게 2열 종대의 긴 줄을 유지하며 이 나라의 거물급 인사들이 선두에 선 대통령의 보폭에 맞춰서 걷기 시작했다.

‘똥군기가 제대로 잡혔네. 사단장이 와도 이 정도로 칼각은 안 잡을 텐데.’

아무렴 그럴 것이다.

육군 사단장은 물론 육군 참모총장이 와도 이 시절 대통령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

그는 이 나라의 절대권력자이자 군부 독재자였으니까.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대통령이 성큼성큼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탑승정원이 아직 넉넉히 남았건만, 단 3명만이 대통령과 함께 탈 수 있었다.

청와대 경호실장과 청와대 비서실장,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땡.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이 말했다.

“다음 엘리베이터에는 서울시장님, 재무부 장관님, 건설부 장관님, 상공부 장관님, 외교부 장관님께서 오르실 겁니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엘리베이터 탑승 순서까지 지정해주었다.

‘이 정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군. 권력 줄 세우기라니.’

눈에 보이는 권력 서열화.

이것이 바로 절대권력자의 행동강령인가 싶었다.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이라면 서울시장은 물론 각 부의 장관들보다도 직급이 낮다.

그런데도 다들 순순히 작전과장의 명에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못마땅한 기색이나 작은 반발조차 없다.

‘반발은커녕 걱정만 가득해 보이는군. 사석에서 갖는 술자리에 다들 왜 이렇게 긴장해서 쩔쩔매는 거지?’

구 시장도 잔뜩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들고 있던 종이봉투만 만지작대면서 마른 입술을 혀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청와대 경호원들은 씩 웃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순서대로 올라가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물론 이들 중에 가장 나중 순서로 배정받은 것은 아버지와 현무건설 오 사장이었다.

‘술자리에서는 더한 일이 벌어지겠군. 이거 대충 준비했다간 본전도 못 건지고 쫓겨나겠는데?’

나는 어째서 술자리에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지하철 2호선 공사 자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지 깨달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일곱 살짜리 어린애만 아니었어도. 내가 직접 담판을 지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좀 아쉽군.’

슬쩍 치솟는 아쉬움도 잠깐.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를 떠올렸다.

‘대통령이 초대한 술자리다. 아버지가 망신당하는 것부터 막고 봐야지.’

아니지. 이런 행운 같은 기회를 그렇게 시시하게 낭비해서는 안 되지.

‘이참에 높으신 분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는 것은 물론이고, 태성건설의 입지를 제대로 굳혀 봐?’

나는 명예 대신 실리를 챙기련다!

이건 음지를 살아가던 내가 선택한 신념이었다.

‘좋아. 대통령이 혹할 만한 그림 한번 만들어 보자고.’

국위선양과 체면을 중시하는 대통령.

인재와 경제 발전을 좋아하는 대통령.

마침 우리에겐 대통령이라면 주목할 만한 정보가, 대통령이 나서줘야 쉽게 풀릴 만한 일이 있지!

게다가 이건 내 개인적인 욕심도 채울 수 있는 판이었다.

‘처음으로 모이는 새해 가족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어깨 펴고 당당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보기 좋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고?’

어머니 때문에 태성화학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식구들 귀에 들어갔을 터.

애 앞세워서 빌붙은 여자, 남자 앞길 막는 여자라는 욕을 면전에서 들을 수야 없지.

‘아버지가 대통령과 독대했다는 소리가 나오면 다른 형제들이 아버지를 얕잡아 보지도 못할 테고.’

아버지에게 출셋길이 열렸다는 부러운 소리를 들으면 또 모를까.

후처 소생에 늦둥이로 태어나, 오랫동안 지방과 중동을 전전한 탓에 단단한 기반이 없는 아버지다.

그에 반해 다른 식구들은 태성의 중요 계열사를 한 자리씩 제대로 꿰어찬 상태고.

하지만 그런 형제들도 대통령과의 사석에서 술자리를 가져본 적은 없겠지!

좋아! 한번 해보자!

“유 팀장님, 잠깐 김 비서님 좀 불러주실래요?”

할아버지의 최측근인 김 비서라면 대통령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책도 제대로 마련해 놓았을 테고.

그러니까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저렇게 서류를 바리바리 싸놓은 게 아닐까 싶다.

* * *

“모르겠습니다.”

김 비서의 대답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유종태는 눈치껏 복도로 나가 경계 근무를 자처한 탓에 방 안에는 김 비서와 나, 둘만 남아 있었다.

“각하께서 왜 술자리에 초대하셨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김 비서님, 믿고 있었는데!

“차 회장님을 통해서가 아닌, 구 시장님을 통해서 술자리 제안이 온 것으로 보아 지하철 2호선 공사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김 비서의 얼굴엔 근심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래서 꽤 난감한 상황입니다. 짐작 가는 일이 없으니, 준비 역시 미흡합니다.”

김 비서는 평소보다 날이 선 상태였다.

“여러모로 바깥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은 제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부디 도련님께서 양해를······.”

“잠깐만 기다려 봐요.”

외투를 어디에 벗어뒀더라? 에라, 모르겠다!

나는 호텔방에 비치된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메모지 옆에 놓였던 똥볼펜을 들고 빠르게 휘갈겨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김 비서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얼굴을 굳혔다.

“도련님,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만.”

“짐작 가는 일이 없어서 준비가 미흡하다면 대책도 없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좀 기다려 봐요. 대책, 지금 적고 있으니까요.”

“대책을······ 말입니까?”

나는 겉면에 1부터 3까지 숫자가 적힌, 곱게 접은 쪽지 3장을 내밀었다.

“아빠에게 이걸 전해주셨으면 해요.”

“이건 뭡니까?”

“예상 답안지요.”

김 비서는 쪽지를 받았다.

“겉면에 숫자는 왜 적으신 겁니까?”

메모지가 작아서 글자가 다 안 들어가서 그렇다.

이유는 또 있다.

“예상 질문별로 헷갈리지 않도록 표시해 봤어요.”

“내용을 확인해 봐도 됩니까?”

“물론이에요. 다만 내 믿음을 살 것인가, 궁금증을 해결할 것인가. 선택은 김 비서님의 몫이에요.”

“그럼 허락해 주신 것으로 알고.”

김 비서는 주저 없이 쪽지를 펼쳤다.

유종태가 호기심 대신 신용을 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내 믿음을 저버리고 호기심을 택했군요.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는 제가 모시는 분께 잘못된 정보를 가져가 일을 그르칠 때나 하는 겁니다.”

김 비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도련님께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원망을 하셔도, 실망을 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역시. 마음에 들어.

만족스러웠다.

‘김 비서는 유종태와 같은 선택을 하면 안 되지. 김 비서는 심부름꾼에 그쳐선 안 되는 사람이니까.’

김 비서는 정신없이 쪽지를 읽기 시작했다.

읽어내리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3번째 쪽지까지 전부 읽은 후, 김 비서는 고개를 들어 나를 돌아봤다.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이걸 다 도련님께서······!”

김 비서는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요. 이게 어떻게 미취학 아동의 식견이··· 후!”

김 비서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김 비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운이 좋으면 태성은 단독 입찰을, 그보다 더 운이 좋으면 나머지 국책 사업까지 맡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야지. 그렇게 만들어야지.

이건 월척을 낚을 천금 같은 기회였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

‘내가 적은 쪽지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건 또 처음 보는군.’

< 거물의 등장 (2) > 끝

ⓒ 오소록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