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59화 (59/189)

< 예상 답안지 >

김 비서는 말했다.

“도련님께서 이걸 가리켜 왜 예상 답안지라고 하셨는지 이해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 비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성준 도련님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김 비서님, 이 쪽지도 비밀로 해줬으면 해요.”

김 비서는 안타까워했다.

아니, 왜?

“그럼 회장님께만이라도 살짝······.”

“아니에요.”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알리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건데, 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익명의 후원자로 남겨뒀으면 해요.”

“도련님, 회장님께서는 공을 세운 자에게 후한 포상을 내려주십니다. 이번 지하철 2호선의 노선도뿐만이 아니라, 거물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까지 전부······.”

“됐어요.”

나는 두 손을 들어 만류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시간과 기반이 더 필요해요. 쓸데없이 시선을 끌면 운신의 폭만 좁아질 뿐이에요.”

나는 아직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했다.

고작 일곱 살이고, 휘하의 수족마저 변변치 못한 처지다.

‘지금은 나보다 아버지가 주목받아야 한다. 아버지가 기반을 제대로 다져 놓아야 할 때야. 그게 나한테 더 유리하기도 하고.’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는 부실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몇 년이나 지방과 외국으로만 나돌았던 건 둘째 치고, 할아버지가 챙겨주려던 태성화학도 포기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형제들에게 무시당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세상은 약육강식이지. 정쟁(政爭) 못지않게 살벌하게 피 튀기는 싸움이 바로 재벌가의 경영권 싸움이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부모고 형제고 봐주지 않는다.’

권력은 원래 부모 자식 사이에도 나누지 않는 법.

내가 그런 꼴을 하루 이틀 봤을까.

재벌가와 정치권 인간들이 없었다면 뒷골목 해결사와 청소부들은 다 굶어 죽었을 거다.

그놈들이 누구의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살았는데.

‘약한 놈부터 물어뜯는 게 싸움의 기본이지. 경쟁자를 한 명이라도 먼저 탈락시키기 위해서.’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백부와 고모를 두고 내가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아니지. 기반이 튼튼해서 나쁠 건 없다. 돈과 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강자는 자비를 베풀 수 있으나, 약자는 강자의 자비에 운명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당분간은 아버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아니, 이 양반은 아까부터 왜 이렇게 억울해하는데? 내가 괜찮다니까?’

허어. 이것 참.

“도련님,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이 왜 있겠습니까. 도련님의 진가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고.

“저 김영걸, 언제고 반드시 태성을 위한 도련님의 이런 희생과 노력에, 그 대가를 꼭 받아내는 데 한 힘 보태겠습니다. 약속드리죠.”

난 호의를 거부하지 않는 사내다.

“좋아요. 안 그래도 마침 김 비서님께 몰래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예, 얼마든지요. 성심성의껏 도련님을 돕겠습니다.”

이거 아주 든든하구만!

태성가의 은밀하고 더러운 일까지 도맡아 처리하는 남자가 적극적으로 날 돕겠다니.

일이 아주 쉬워질 것 같다.

‘김 비서라면 내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투자 회사를 하나 세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아버지가 주목받고, 기반을 다지는 것도 물론 중요한데.

그렇다고 굳이 내 몫을 안 챙기고 나 몰라라 할 필요도 없잖아?

시간이 날 때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내 몫은 내가 알아서 틈틈이 챙겨가는 거지.

“우후훗!”

아차,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다.

“김 비서님. 그 쪽지, 아버지께 한시라도 일찍 전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예.”

나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얼른 가보세요. 아버지가 쪽지를 숙지할 만한 시간이 그리 넉넉할 것 같진 않으니까요.”

“예, 도련님. 먼저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김 비서는 서둘러 돌아갔다.

* * *

저승사자가 아버지 근처에서 맴돌았다.

테라스에서는 아버지 홀로 줄담배를 피웠다.

꾸깃.

아버지는 쪽지를 구겼다.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고서야 예상 답안지 같은 게······.”

헛소리라고 생각한다면 진즉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으면 됐을 텐데.

“기가 차는군.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 이런 걸 뽑아내는 거지?”

벌써 네 번째 반복된 헛웃음이었다.

“······천재인가?”

아버지는 턱을 쓸었다.

똑똑똑.

김 비서가 테라스 유리창을 두드렸다.

“도련님, 이만 들어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도련님 차례가 머지않아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 줄 세우기의 결과, 순서대로 룸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쪽지 이리 주십시오.”

“음?”

김 비서는 쪽지를 입에 욱여넣고 대번에 꿀꺽 삼켜 없앴다.

아버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보거나 말거나.

김 비서는 90도로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배웅했다.

“여기까지만 배웅하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행운을 빌겠습니다.”

송년의 밤에 태성그룹 경호원들의 연회장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듯, 현무호텔 바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는 이내 몸을 돌려 현무호텔 바(Bar)로 향했다.

* * *

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현무건설 오 사장은 아버지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차 사장, 얼른 이쪽으로 오게. 이제 곧 우리 차례야! 겁도 없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건가?”

“담배 좀 피우고 왔습니다.”

실은 쪽지를 읽고 내용을 곱씹느라 시간이 걸린 거지만.

아, 물론 담배도 피웠다.

줄담배로 뻑뻑.

“자네도 실은 많이 떨렸던 모양이지? 휴우,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현무건설 오 사장은 손을 비볐다.

“내가 언제 각하를 따로 만나봤겠나. 기공식이나 개관식 같은 행사장에서나 먼발치에서 가끔 뵈었지, 술자리 동석은 나도 처음이야.”

현무건설 오 사장이 들고 있는 서류 겉면에는 <송년의 밤 후원자 명단 및 후원금>이라는 제목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똥색이었다.

“나야 송년의 밤 후원 명단을 건네드려야 한다 치고. 자네는 대체 왜 여기에 불려온 건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때문이라면 굳이 자네를 호출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차라리 차 회장님을 불렀다면 또 모르겠으나. 흐음.”

현무건설 오 사장이 아버지에게 바짝 붙어서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까지 쫓겨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나? 어림잡아도 스무 명, 아니, 서른 명쯤 됐나.”

“서른 명이나 됩니까?”

“조심하게. 들어간 지 몇 분 되지 않아 가차 없이 내쫓기기 일쑤야.”

현무건설 오 사장은 깊이 탄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직원들을 재촉해서 미리 예상 질문지나 좀 뽑아둘 걸 그랬네. 그래야 책잡히지 않을 만한 대답을······.”

그때 룸 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 사람이 밖으로 떠밀리듯 나동그라졌다.

쿠당탕!

“어이쿠!”

건설부 차관과 차관보였다.

청와대 경호실장이 들고나온 서류 가방 네 개를 내던졌다.

쫓겨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눈이 아주 차가웠다.

이내 청와대 경호실장은 이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현무건설 오 사장, 들어와.”

현무건설 오 사장은 송년의 밤 후원 명단을 꽉 쥐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곳에서 호명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 아버지만 남았다.

“성준아!”

“······아버지?”

할아버지가 황금색 보자기로 감싼 무언가를 들고서 이쪽으로 급히 걸어왔다.

아들을 돕기 위해 원군을 자처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에게 다가가 황금색 보자기를 내밀었다.

“최상등품 더덕주일세.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와서 각하께 명주를 대접할까 하여 가져왔네.”

할아버지는 두둑한 봉투도 슬쩍 찔러넣었다.

봉투를 받아 챙긴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은 슬쩍 귀띔했다.

“각하를 독살하려 했단 소리를 듣기 전에 가져온 술은 도로 가져가십시오. 이건 못 봐드립니다.”

“어쩔 수 없지. 자네를 귀찮게 할 수야 없으니. 알았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회장님.”

“그럼 이건 자네들이 나눠 드시게. 시중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최상등품 더덕주일세. 각하를 모시느라 늘 고생이 많아.”

할아버지는 더덕주를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에게 주었다.

작전과장의 눈짓에 할아버지를 강제로 끌어내려던 청와대 경호원들이 물러섰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성준아, 명심해라.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해라. 멋도 모르면서 주제넘게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낫다.”

“예.”

“감옥에 가야 할 일이라면 떠넘겨라. 윤성이 놈이 태성건설의 문제를 일으켰으니, 책임도 그놈이 져야지.”

할아버지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자, 성의와 맞바꿔 얻은 조언의 기회였다.

“넌 중동 다녀오느라 아무것도 몰랐던 거다. 윤성이도 이미 약속한 일이고. 알았느냐?”

할아버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큰 소리로 날 불러라. 내가 같이 엎드려 청하면 각하께서도 한 번 정도는······.”

그때 룸 문이 벌컥 열렸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최선을 다해······ 억!”

룸에 들어간 지 1분도 되지 않은 시각.

현무건설 오 사장이 사색이 된 채 쫓겨났다.

청와대 경호실장이 현무건설 오 사장의 팔을 잡고 끌어낸 것이다.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청와대 경호실장의 눈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태성그룹 차 회장, 낄 때 안 낄 때는 구분하셔야지. 끌어내!”

청와대 경호실장이 아버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음. 태성의··· 거기 너. 어린놈.”

* * *

룸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해 너구리굴이 따로 없었다.

밀폐된 룸은 백열조명이 은은하게 비쳤다.

“거기까지.”

청와대 경호실장이 팔을 뻗어 아버지 앞을 막아섰다.

“네놈에게 허락된 거리는 여기까지야. 뒤로 물러서. 더 뒤로.”

아버지는 룸 입구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상석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대통령이었고, 그 오른편 소파에는 서울시장이, 왼편 소파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앉았는데, 술잔을 받은 사람은 오직 구 시장뿐이었다.

먼저 들어갔던 나머지 장관들은 술잔을 받기는커녕 모두 벽 쪽으로 내몰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지하철 노선도 세 장이 나란히 펼쳐져 있을 뿐, 대통령 옆에 놓인 양철 쓰레기통에는 서류가 한가득 쑤셔박혀 있었다.

그중엔 <송년의 밤 후원자 명단 및 후원금>이란 제목의 서류 뭉치도 포함되었다.

톡톡.

대통령은 손끝으로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두드렸다.

“태성이 그렸다는 지하철 2호선 노선도. 구 시장이 그린 것과 흡사하군.”

대통령은 빨간 사인펜으로 그린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손끝으로 툭 쳐냈다.

태성의 지하철 2호선 노선도는 팔랑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시청의 고위 관료를 매수해 국가 기밀을 빼돌렸나?”

대통령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하늘 아래 같은 노선도가 나올 확률보다 뇌물수수와 부정 청탁으로 정답지를 빼냈을 확률이 더 높다고 보는데. 자네 생각은 어떻지?”

쯧쯧,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에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양반치고 의심병에 안 걸린 위인이 없다니까?

오랫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라기에 혹시나 했더니만 역시나였어!

‘예상 문제 1번에 딱 걸렸네? 안 그래도 이건 언제 물어봐 주나, 하고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거 왠지 시작부터 운이 좋아!

그런데 대통령의 발언에 즉각 반응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구 시장이었다.

구 시장은 기겁하여 벌떡 일어났다.

“아닙니다, 각하! 그럴 리 없습니다!”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뇌물수수와 부정 청탁이란 단어.

그런 단어는 보통 쌍을 이루어 쓴다.

주는 자가 있으면 받는 자도 있기 마련이니까.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그려보라던 제안은 제 즉흥적인 변덕이었습니다!”

직접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가 기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외부로 유출된 것에 따른 책임만은 피할 수 없다.

이게 바로 구 시장이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변호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잘못 짚었다.

정말로 뇌물수수와 부정청탁을 의심했다면 중앙정보부장이 나섰을 것이다.

대통령이 아버지에게 직접 확인받고 싶은 건 따로 있을 터였다.

그러니 구 시장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버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일 테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대답.”

“결백합니다.”

“변명은 그걸로 끝이야?”

“변명은 지은 죄를 덮기 위해 하는 겁니다. 전 결과로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어떻게?”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를 동원하지 않고도 같은 노선도를 그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그제야 대통령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 예상 답안지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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