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몫은 내가 챙긴다 >
그 시각 김 비서는 나에게 와 있었다.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돌아오겠다던 약속 때문이었다.
나는 용건을 전했다.
“투자회사를 세우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투자회사?”
“네. 내 정체를 살짝 덮을 수 있는,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투자회사요.”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가 주는 신뢰감이란 게 존재한다.
나는 지금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애.
전면에 나서서 돈과 세력을 움직이기엔 걸리적거리는 게 많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투자회사를 앞세우면? 문제없지!
“도련님께서 직접 운영하실 겁니까?”
“네.”
물론 바지사장은 있어야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 봤자 딱히 어렵지도 않을걸요?”
내가 투자회사를 한두 번 운영해 보나.
과거 내 주특기가 바로 이거였다.
일반적인 투자회사라기엔 수단과 방법은 물론 취급하는 종목마저 불법과 편법을 오가서 문제였지만.
난 이제 태성그룹 사람이 되었으니 과거와는 달리 점잖고 깨끗하게 운영해야겠지?
“회사는 어떤 식으로 운영하려고 하십니까?”
“당분간 소규모로 돌릴 거예요.”
그러니까 회사를 인수하기 전까지.
“용돈벌이를 겸해 미리 회사 경영을 경험하시려는 거라면 굳이 투자회사를 설립할 필요 없이 차명 주식 등을 이용하여 소액 분산 투자로 돌리면 그만입니다만.”
“아마 어린애 용돈벌이치고는 규모가 꽤 클 거예요. 차명 주식, 소액 분산 투자 가지고는 안 돼요.”
내 이름이 박혀 있어야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거거든.
나는 말보다는 문서를, 문서 중에서도 국가가 인증해 주는 공문서를 믿는다.
이유는 또 있다.
“돈세탁을 하려고요.”
김 비서는 돈세탁이란 단어가 흥미로운 모양이다.
“도련님께서 굳이 돈세탁해야 할 일이 있겠습니까?”
“제법 큰 회사를 꿀꺽할 생각이거든요.”
큰 회사 인수라는 말에 더욱 기대하는 눈치다.
“태성그룹 다른 사람들의 견제를 받지 않는, 실질적으로 내 돈이 들어간, 내 지분, 내 회사의 대주주가 되고 싶어요.”
태성그룹이 망하더라도, 아버지가 경영권 싸움에 져서 뒷방으로 밀려나더라도!
내 회사는 내가, 내 밥그릇도 내가 챙겨야 하는 법이다.
난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
“대체 어떤 회사를 인수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대한석유공사요.”
“예?”
김 비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투자회사를 통해 은행 설립에 투자하고, 은행의 투자를 받아서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한다. 내 목표는 그거예요.”
김 비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한석유공사의 인수 자금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성의 계열사를 몇 개나 팔아도 부족할 겁니다.”
“지금 당장 제값 주고 사려면 그래야 하겠죠.”
하지만 대한석유공사가 시중에 매물로 나왔을 때는 제2차 석유파동 직후였다.
“대한석유공사의 지분 50%는 미국의 정유회사인 걸프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절대로 제가 가진 것을 헐값에 넘기려 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의 걸프사가 연달아 터진 오일쇼크 때문에 더 버틸 여력이 없을 때.
두 손 들고 약소국의 회사를 털어버리려고 할 때.
난 그때 대한석유공사를 헐값에 사들일 생각인데.
이건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은행 투자를 받으려고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대한석유공사는 공룡 기업입니다.”
내가 그걸 모를까.
‘이번에 태성은 지하철 2호선 공사,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공사 등 굵직한 국책 건설 사업을 따냈지. 체비지랑 역 근처의 땅만 되팔아 시세차익을 챙겨도 제법 목돈을 만질 수 있을 거야.’
지하철 2호선 예상 입찰가액이 무려 1,800억이 넘는다.
거기에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도로 및 상가 공사까지 합하면?
모르긴 몰라도 과거 우광건설 이상으로 떼돈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부족한 자금은 외국 차관으로 해결할 거예요.”
과거에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한 기업은 삼황그룹이었다.
삼황그룹은 걸프사가 내놓은 지분 50% 값, 1억 달러를 외국 차관으로 해결했다.
개미가 공룡을 집어삼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진 일이었다.
삼황그룹이 당겨온 외국 차관이라는 게 바로 사우디의 오일머니였고 말이다.
‘해 볼 만해. 삼황그룹도 했는데, 내가 못 할 이유는 없지.’
송년의 밤에서 들었다.
삼황정유 사람들이 사우디에 갔을 때, 그들의 접견을 받아주지도 않던 사우디 왕실이 아버지는 국빈으로 대접하고 있었다고.
‘아버지에게는 사우디의 왕실에 달아둔 빚이 있다. 게다가 대통령이 민간 차원에서 석유를 공급받는 것을 고려할 때, 제일 먼저 나온 대안이 태성이 정유회사를 세우면?이었고.’
이 나라의 절대권력자가 태성을 내심 낙점해둔 모양이니, 일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가는 길이 어렵다고 벌써부터 꿈을 포기하면 쓰나요.”
“으음.”
“꿈을 수치화하여 기한을 잡고 구체적인 목표를 정할 수 있으면 이미 절반은 달성한 셈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나는 할아버지의 각서를 꺼내 팔랑팔랑 흔들면서 씨 웃었다.
“마지막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을까 해요.”
그땐 어쩔 수 없이 내가 익명의 후원자라는 걸 밝혀야겠지.
그제야 김 비서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도련님의 손발이 되어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믿을 만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더 좋고요. 김 비서님처럼요.”
나는 은근슬쩍 영입 제안을 건넸다.
하지만 김 비서는 고개를 숙였다.
“전 회장님을 보필하기로 한 몸이라. 아쉽게 됐습니다.”
혹시나 하고 떠봤는데 역시나 안 되는군.
처음부터 김 비서를 얻을 거란 기대는 안 했다.
‘김 비서는 할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는 최측근이야. 태성의 전 계열사 사장단과 의견을 조율하는 핵심 인물이고.’
한마디로 할아버지의 사람이란 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굳이 이런 말을 꺼낸 건 김 비서의 사람을 빼 오기 위해서지.’
나는 일부러 몹시 아쉬워하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쉬운 대로 유 팀장님과 태성그룹 경호원들이라도 붙여주시면 안 될까요?”
“유 팀장과 경호 5팀 말입니까?”
“네.”
그들은 김 비서의 직속 수하였다.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붙여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그놈들을 쓰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녀석들은 일반적인 경호원들과는 궤가 좀 다릅니다.”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군 장교 혹은 운동선수 출신의 엘리트 경호원이 아닙니다. 능력은 제법 좋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죄다 출셋길이 막혀서 제 밑으로 들어오게 된 놈들입니다.”
그러니까 하자 있는 B급 어벤져스, 뭐 이런 건가?
오히려 좋아!
난 무능한 놈들보다 능력 있는 놈들을 좋아하거든!
모종의 이유로 출셋길이 막힌 놈들이라면 뒷골목엔 널리고 널렸다!
“특히 유 팀장이 제일 쓸만합니다.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웬만한 태성 엘리트들은 그놈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겁니다.”
좋은데?
안 그래도 유종태는 내게 맹세한 바 있다.
-저는 도련님께 뼈를 묻기로 맹세한 몸!
-도련님이 구르라면 발바닥에 땀 나도록 굴러도 좋습니다!
“유 팀장은 성질머리 때문에 번번이 내쳐졌다고나 할까요? 덕분에 꽤 오랫동안 제 밑에서 썩게 됐습니다.”
이상한데?
난 여태 유종태가 성질부리는 건 단 한 번도 못 봤다.
“그놈은 머리가 좋고 눈치도 빨라서 사람 열받게 하는 데엔 도가 튼 놈입니다. 다른 도련님들은 유 팀장 얼굴만 봐도 화딱지가 난다고들 하시더군요. ”
문득 유종태를 현무건설 오 사장에게 보내놨더니 3분을 센답시고 혀로 똑딱거렸던 일이 떠올랐다.
“만일 도련님께서 크게 써주신다면 그놈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김 비서는 빙그레 웃었다.
“한 명 더 추천해 드리자면 아버님을 돕고 있는 이경석 비서는 어떨까 합니다.”
“이경석 비서요?”
아버지를 돕고 있는 비서가 이경석이었어?
나는 이경석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태성의 브레인, 이경석 사장!’
그는 훗날 태성그룹 총수의 최측근이자, 태성의 핵심 계열사인 태성전자를 이끌게 되는 남자였다.
똑똑똑.
문을 열어주자, 유종태와 태성그룹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다들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태성이 방금 지하철 2호선 공사를 확정 지었답니다!”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도로 확장 공사는 물론이고 터미널 상가까지 우리가 맡는답니다!”
“회장님께서 당장 한우정으로 모이랍니다! 소고기 회식입니다!”
유종태가 뿌듯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님은 물론 도련님도 함께 소고기 먹자고 하셨습니다. 가실까요?”
“네. 좋아요.”
내가 유종태의 손을 잡고 막 걸음을 떼려던 때였다.
“도련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어라? 김 비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김 비서답지 않게 너무 비장하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유종태와 경호원들을 복도로 내보낸 후 방문을 닫았다.
“전 이미 도련님의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신용 대신 호기심을 택하여 쪽지를 펼쳐봤기 때문입니다.”
미묘하게 착잡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도련님께선 제가 회장님과 아버님께 슬쩍 후원자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을까,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까짓것, 태성의 후원자가 나라는 게 밝혀지면 뭐 어때?
내가 죄졌어? 그저 조금 귀찮아질 뿐이다.
“그럼 되묻겠어요. 제가 김 비서님 앞에서 비밀을 드러낸 거요. 멍청해서였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김 비서와 스승님 앞에서 내 능력의 일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앞에서는 아니었다.
김 비서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건넸을 때 끝낸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난 그때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건네면서 말했다.
-난 지금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직 돈도 안 받았는데, 장부부터 내주다니. 이보다 더 확실한 신용 거래가 또 있겠어요? 그건 내 호의예요.
-그 장부, 차 회장님께 바치세요. 나한테 뜯긴 것 이상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이건 서비스.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먼저 건넨 내 성의에 김 비서님은 어떻게 보답했죠?”
김 비서는 할아버지에게 내 비밀을 낱낱이 발설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우광건설 뇌물 장부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캐묻지도 않았다.
대신 김 비서는 철구 아저씨를 할아버지 대신 내 앞에 먼저 데려오는 것으로 의리를 다했다.
그렇게 우리는 신용 거래를 텄다.
“하하하!”
김 비서는 오랜만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제가 도련님께 한 방 먹었군요. 도련님이 보내주신 신뢰, 사양치 않고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김 비서는 더욱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도련님, 그럼 전 이만 회장님께 돌아가 보겠습니다.”
“같이 소고기 먹으러 안 가시고요?”
“오늘은 회장님 곁에서 축하주를 따라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김 비서는 빙그레 웃었다.
“얼른 자라십시오.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축하주를 기울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한우정에 도착했다.
회식할 방을 두 개 잡아 장지문을 열고 상을 붙였다.
태성그룹 경호원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태성그룹을 위하여!”
“위하여!”
데워진 불판 위에 싱싱한 한우가 올라갔다.
치이익 연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다들 바쁘게 젓가락을 움직여서 밥을 먹었다.
갑자기 잡힌 대통령과의 술자리 때문에 다들 저녁도 못 먹었던 것이다.
“도련님, 많이 드세요. 오늘 꽃등심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꽃등심보다는 살치살이 더 맛있는 것 같아요. 꼭꼭 씹어 드세요.”
“무슨 소리! 이 집은 채끝살로 유명하다고! 사이다 드실래요?”
태성그룹 경호원들은 내 앞접시 위에 작게 자른 쇠고기를 올려주기 바빴다.
“성준 도련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술 한 잔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너무 많이 마셨어요. 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벌건 것이 술을 거나하게 드신 모양이었다.
화장실을 가려는 건지, 바깥 공기라도 쐬려는 건지.
나는 조금 걱정이 되어서 아버지 뒤를 조용히 따랐다.
드르륵. 탁.
아버지가 장지문을 닫고 가게 복도로 나왔을 때,
“어? 설마 너 성준이냐?”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40대 초반의 멋쟁이 신사.
묵직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버지와는 달리, 유쾌하고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였다.
“대준이 형님.”
대준이 형님? 설마 차대준인가?
실물로 대면한 적은 없지만, 태성그룹 보고서에서 자주 보던 이름이었다.
‘이 사람이 내 큰아버지라고? 태성그룹 비운의 황태자?’
< 내 몫은 내가 챙긴다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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