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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64화 (64/189)

< 1억짜리 심부름 >

차 회장은 잠시 침묵했다.

-회장님께서는 왜 제게 익명의 후원자가 누구냐고 닦달하지도, 믿을 만한 사람이냐고 캐묻지도 않으십니까?

김 비서의 질문이 묵직했기 때문이었다.

“난 익명의 후원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라면 잘 알아. 자네는 나와 태성에 해가 되는 일을 좋다고 덥썩 받아먹을 사람이 아니야.”

“회장님······.”

“이미 자네 선에서 신원 파악과 능력 검증을 끝낸 일이겠지? 그럼 됐다.”

차 회장은 씩 웃었다.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작정입니다만.”

“그럼 그렇게 해.”

차 회장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지. 자네를 닦달해서라도 익명의 후원자라는 놈이 누구인지 정체는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불쑥불쑥 들곤 해.”

“그런데 왜······.”

“굳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차 회장은 단번에 술을 털어 마셨다.

“자네도, 그 익명의 후원자도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걸 텐데. 내가 괜히 들쑤셔서 불신을 자초할 필요 있겠나?”

“으음.”

“지금 그 익명의 후원자는 명백하게 태성에 호의를 보내고 있어. 그거면 됐지.”

“눈에 보이지 않는 호의잖습니까. 의도가 의심스럽거나 뒤탈이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그런 걸 왜 걱정해?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건 익명의 후원자지, 태성이 아니야.”

차 회장은 웃었다.

“내가 무릎걸음으로 찾아가서 도와달라 간청하길 했나, 각서를 쓰길 했나, 담보 잡히고 차용증을 적었나?”

김 비서는 목구멍까지 솟은 ‘회장님께선 이미 각서를 쓰셨습니다만.’이란 말을 꿀꺽 삼켰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지. 나한테 뭘 청구하려고 해도 어려울 거야. 난 모르쇠로 딱 잡아뗄 테니까. 증거도 없잖나?”

김 비서는 ‘회장님께서는 이미 주식까지 넘기셨습니다만.’이란 말도 차마 할 수 없었다.

“지금 이득은 일방적으로 우리 태성만 보고 있어. 그러니 내 어찌 귀인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나. 이건 호구인가, 대인배인가, 나조차도 헷갈리는데.”

김 비서는 ‘호구 잡힌다면 아마도 회장님이실 것 같습니다만.’이란 말도 삼켰다.

“귀인에게 입은 은혜가 많아. 그것도 번번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도움을 받았어.”

차 회장은 제 가슴을 탕탕 쳤다.

“나 차태성, 그리 배은망덕한 놈은 아니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언젠가 반드시 이 빚은 꼭 갚겠다고, 그리 전해주게.”

“예,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김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품을 더듬어 빈 종이와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는 게 아닌가.

김 비서는 그것들을 차 회장 앞으로 슥 밀어 넣었다.

“그분께서는 말보다는 문서를 좋아하시는 분이라서 말입니다. 말 나온 김에 쓰시죠.”

“아니, 나더러 요구하지도 않은 각서를 자청해서 쓰라고?”

“말뿐인 감사 인사보다는 성의 있는 감사 편지가 낫지 않겠습니까?”

“아, 감사 편지.”

그제야 차 회장의 안색이 펴졌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감사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 하고, 거듭된 호의엔 성의 표시라도 남겨야 하는 법.”

차 회장은 김 비서가 내민 몽블랑 만년필을 잡고 휘갈겨 감사 편지를 적었다.

“자, 가져가게.”

“예.”

“흐음, 김 비서가 감사 편지를 받아내? 아무리 봐도 이건 자네 스타일이 아닌데? 익명의 후원자께서 받아오라고 하던가?”

“그럴 리가요. 이건 그저 제 성의이자, 고객 맞춤 서비스일 뿐입니다.”

김 비서는 행여 구김이라도 갈까 조심조심 차 회장의 감사 편지를 곱게 접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 회장이 불퉁한 소리를 내었다.

“김 비서, 방금 나 의심이란 게 불쑥 들었어. 솔직히 말해 봐. 후원자야, 나야?”

“갈아타도 됩니까?”

“어림없어! 나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돼! 우리 죽을 때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했잖아! 의리 지켜!”

차 회장이 딱 잘라 말할수록 김 비서의 미소는 진해졌다.

“아니, 이 사람이? 대답은 하지 않고 아까부터 왜 계속 웃고만 있어? 진짜로 갈아탈 생각은 아니지?”

“사실 오늘 영입 제안을 받긴 했습니다만.”

“뭐라고?”

“딱 잘라서 거절하고 온 길입니다. 저 김영걸, 그리 배은망덕한 놈은 아닙니다. 회장님께 입은 은혜는 제 목숨으로도 못 갚습니다.”

“잘했어! 그래야 우리 김영걸이지! 그런 의미에서 술 한잔해!”

차 회장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김 비서의 술잔 가득 술을 따랐다.

“방금 각하께서 왜 장관들을 모아다가 술을 내리는지 깨닫고 만 것 같다. 이거 기분이 째지는데?”

“저도 방금 각하의 축하주를 하사받으면 왜 다들 기뻐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술맛이 참 좋을 것 같군요.”

“에잇, 난 그런 서열 놀이는 딱 질색이야. 술맛만 떨어진다고! 그러니까 우리끼리는 편하게 주고받으며 마시자. 건배!”

차 회장과 김 비서는 쨍 소리를 내며 술잔을 부딪쳤다.

칼바람이 불던 대통령과의 술자리와 달리 이곳엔 훈풍이 불었다.

“김 비서야, 저기 마지막 남은 더덕주 말이다. 이따 갈 때 잊지 말고 챙겨 가.”

최상등급 더덕주였다.

시중에서 구하려고 해도 쉽게 못 구하는 술이었고, 대통령에게 바치려고 했던 술이었다.

“못 받습니다. 정혁 도련님께서 주셨다고 동생분께도 안 내어주신 술이잖습니까.”

“자네가 못 받긴 왜 못 받아? 아들에게 조언 한마디 건넨답시고 청와대 경호원들에게도 바친 술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가져가. 자네도 한번 맛은 봐야지.”

차 회장은 마지막 더덕주를 김 비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술맛이 아주 끝내줘. 내가 태성을 세운 이후 지금까지 온갖 명주를 다 받았어. 그렇게 많은 술 중에서도 이 더덕주가 단연 최고야. 내 장담하지.”

일곱 살짜리 손자가 할애비의 다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건네준 술이었다.

그때부터 더덕주는 차 회장의 인생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술이 되고 말았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한번 맛봐야겠군요.”

김 비서는 더덕주를 즉시 개봉했다.

쪼로록.

“딱 한 잔만 나눠드리겠습니다. 제게도 그 정도의 의리는 있으니까요.”

“이 귀한 더덕주을 왜 나에게 나눠줘? 자네 혼자 아껴 마셔.”

“혼자 술 마시는 것도 청승입니다. 회장님과 함께 나눠 마셔야 술맛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김 비서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정혁 도련님이 얼른 커서 셋이 함께 술잔을 기울일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나도 그래! 우리 정혁이를 위해 건배할까?”

“좋습니다.”

쨍.

그렇게 둘은 마지막 더덕주를 끝냈다.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차 회장의 부인이자, 차성준의 모친이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후우, 간신히 세이프! 아직 통금 시간 안 넘긴 거 맞죠?”

“그래, 유치장 신세는 간신히 면했구만. 자네 머리에 그건 뭐야?”

“네? 머리라뇨?”

회장 사모님은 깜짝 놀라 머리를 더듬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은 뒤집어쓰고 있던 검정 비닐 봉투를 재빨리 벗었다.

“어머나, 세상에! 깜빡했어요!”

사모님은 이마를 탁 쳤다.

“광 팔았는데!”

광 판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비닐 봉투까지 쓰고 있었건만!

차 회장은 혀를 찼다.

“손자 보러 간다면서 뛰쳐나가더니 뭐? 광을 팔아?”

“그래도 사돈이랑 그간의 오해를 전부 풀고, 앞으로의 얘기도 잘 끝냈어요.”

“응?”

“고스톱으로 하나 되어 애들 결혼시키기로 합의 봤답니다.”

“사돈? 고스톱?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혹시 분당에 다녀왔어?”

“아뇨? 한남동 저택에서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 이수진의 어머니랑 오빠잖아요. 사돈댁 요리 솜씨가 정말 끝내주던데요?”

김 비서는 담담하게 정정했다.

“사모님, 아무래도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사돈 될 어르신들은 현재 분당에 거주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네?”

“한남동 저택에서 본 모자(母子)라면 아마 구로동 판자촌의 집주인 모자일 겁니다. 딱 봐도 불곰 두 마리. 맞습니까?”

“헉!”

사모님은 입을 떡 벌렸다.

“조만간 같이 인왕산 선녀보살을 찾아가서 혼삿날 받아 오기로 방금 대동단결하고 왔는데!”

* * *

한남동 우리 집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아버지와 김 비서님은 물론 태성그룹 엘리트들이 총동원되어 머리를 맞대고 정신없이 일했다.

지하철 제2호선 연장 공사에 따른 견적서와 계획서를 다시 산출했다.

거기에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도로 확장 공사 및 상가 건설에 관한 예산과 기획도 동시에 짜내야 했다.

-바로. 올해 넘기지 않게.

대통령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부터 타임 리미트가 걸린 셈이었다.

“조 과장, 로드롤러와 굴착기는 몇 대나 있습니까? 당장 태성중장비에 전화 넣으세요. 웃돈을 얹어주고서라도 넉넉히 확보해야 합니다.”

“예!”

“태성건설 소속 인부로는 어림도 없겠습니다. 이 차장은 인력사무소에 전화 연결하시고.”

“예!”

“김 부장, 잡석과 시멘트는 얼마나 확보했습니까?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도로 확장 공사부터 시작할 겁니다.”

“예!”

덕분에 다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쉴 새 없이 바쁜 곳은 2층 서재뿐만이 아니었다.

주방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국 끓어 넘친다! 불 조절하셔야지!”

“콩나물무침은 간이 너무 슴슴하네. 소금 더 치고, 참기름도 한 바퀴 더 돌리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집주인 할머니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해서 김 비서가 주방 도우미를 몇 명 더 불러주었다.

물론 나도 바빴다.

“정혁아, 콩나물 대가리는 다 땄니?”

“네.”

“콩깍지 벗기는 건?”

“다했어요.”

“멸치 똥은?”

“그건 아직이에요. 지금 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내가 종일 바쁜 이유였다.

행여 어린 내가 심심하다고 아버지의 일을 방해할까 우려한 특단의 조치랄까?

내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나도 바쁘다고, 아무리 호소해 봐야 믿어주질 않는다.

이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도련님, 지금 햄스터 표정이 된 거 아세요?”

뚱하지 않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유종태가 주방 이모들의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멸치 똥 따는 거 도와드려요?”

“됐어요. 유 팀장님은 지금 투자회사 설립 때문에 바쁘시잖아요. 이런 거 도울 시간에 그거나 신경 쓰세요.”

“그건 얼추 끝나 갑니다.”

빠르다!

“한국에서 하나, 미국에 하나. 이렇게 두 개의 투자회사를 설립하는 거 맞죠?”

“네. 그래야 미국 본사와 한국 투자회사가 서로에게 투자를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역시! 돈세탁이로군요!”

유종태는 척하면 척 알아들었다.

“그럼 조만간 제가 미국에 다녀와야겠군요.”

“그 문제는 유 팀장님께 일임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염려 놓으십시오, 도련님. 저 유종탭니다!”

그렇게 내 투자회사도 점점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도련님, 초기 사업자금은 전(前) 태성건설 차윤성 사장님의 개인 자산을 처분한 것으로 충당하겠습니다.”

할아버지가 태성건설의 전(前) 사장을 쫓아내면서 그 집 금고를 털어 내게 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집 지하실 방공호의 금고를 열 때가 됐다!’

금괴, 달러, 땅문서와 예술 작품들까지.

내가 이 집을 사지 않았더라면 남산 찰거머리 손에 들어갔을 재산이었다.

놈은 과거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무지막지하게 세력을 확장했었다.

‘이걸 시드머니로 삼아야겠군.’

* * *

나는 명동 구석진 골목에 자리한 송골매 전당포를 찾았다.

딸랑.

“어서 오세요. 아니, 이게 누구신가?”

“안녕하세요.”

“태성그룹의 막냇손자께서 여기엔 또 어쩐 일로 오셨나?”

스승님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어디 보자. 약속대로 지하철역 정보를 가져온 거래 당사자인가, 은행 투자자인가? 그것도 아니면 전당포 꼬마 손님으로 왔을까?”

“셋 다예요. 오늘은 용건이 좀 많을 예정이에요.”

나는 전당포 철창살 밑으로 곱게 접은 종이를 슥 밀었다.

“지하철역 17개의 정보를 드릴까 하는데요.”

“오, 난 50억을 투자했는데 열일곱 개 역을 내어줬네?”

하여간에 공짜로 떨어진다 싶으면 눈을 번쩍 뜨신다니까.

저걸 노리고 일부러 딱 떨어지지 않는 돈을 투자하신 거 다 안다.

“1억은 서비스인 거 맞지?”

“양심도 없게 무슨 서비스를 1억씩이나 받으려고 하세요?”

“그럼 나더러 1억을 따로 내라고? 에잉, 나 돈 없다! 배 째!”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럼 지하철역 16개 정보만 받으시든가요.”

“늦었다. 이미 내 손에 17개 역의 정보가······ 16개 역이었네?”

스승님께 드린 쪽지엔 16개 역 정보만 적혀 있었다.

“그럼 2억은 서비스인 거 맞죠?”

“양심도 없게 무슨 서비스를 2억이나 받아먹으려고 해!”

“어린 내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배 째시든가요.”

같은 말로 돌려줬건만, 스승님은 게거품을 물었다.

스승님이라면 절대로 포기하지 못한다.

“물건 판매를 중개하고 지하철역 정보를 하나 더 받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우리 1억은 심부름값으로 퉁쳐요.”

나는 곱게 접은 쪽지 하나를 비비며 씩 웃었다.

“싫으면 말고요. 그럼 다른 용건까지 갈 것도 없어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배꼽 인사 했다.

스승님은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좋다! 17개 역! 1억짜리 심부름, 내가 맡으마!”

< 1억짜리 심부름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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