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맡겨라! >
내가 지하철역 정보를 따로 하나 더 적은 쪽지를 내밀자, 스승님은 독수리처럼 채갔다.
“호오,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도 지하철 2호선이 들어간단 말이렷다?”
“특별히 알짜배기 정보로만 골라드렸어요. 그건 내 호의예요.”
“안 그래도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지하철역이 들어가느냐 마느냐 주목하고 있던 참이었다. 땅값이 얼마나 더 뛰려고 이러나. 으하하하!”
스승님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쪽지를 보고 또 봤다.
“지난번엔 바람잡이를 시키더니 이번엔 무슨 심부름을 시키려고? 내가 어디 가서 뭘 어떻게 해주랴?”
“일단 판매를 중개할 물건부터 보고 얘기할까요?”
딸랑.
눈치 빠른 유종태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직접 확인해 보세요.”
“좋다!”
스승님은 물건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맙소사! 이건 돈 주고도 못 살 국보급 문화재가 아니냐! 일제시대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알려졌던 최고급 예술 작품들을 이렇게 무더기로 가져오다니!”
무더기라니.
고작 7점밖에 안 골라왔는데.
“게다가 전부 진품이로구나! 호오, 내가 오늘 네 덕분에 눈 호강을 아주 제대로 한다!”
벌써부터 이렇게 눈이 뒤집히면 쓰나.
“어디서 구한 게야?”
“지하 금고에서 꺼내왔는데요.”
“꼬마야,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다. 진지하게, 심각하게, 간절하게 묻는 게다. 루트 좀 까 봐라. 암시장에서? 지하 경매에서? 장물 브로커를 통해서? 해외 밀반입이냐?”
아니,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를 않으시네?
“설마 태성갤러리를 턴 건 아니겠지?”
“누굴 도둑놈으로 아시나. 내가 그런 짓을 왜 해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히려 이걸 태성갤러리에 팔아줬으면 하는데요?”
“뭐? 태성갤러리에 팔아? 전부?”
스승님은 외눈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렇다면 날 통하지 말고 네가 직접 파는 게 나을 텐데? 태성갤러리는 태성의 둘째 며느리가 운영하는 곳이라서 웃돈을 아주 후하게 얹어줄 게다.”
“전 웃돈보다 돈세탁이 목적이라서요.”
“일곱 살짜리가 무슨 돈세탁을 해!”
“못 할 것도 없잖아요?”
나는 손바닥을 비비며 씩 웃었다.
“내 물건을 내가 판다는데, 되도 않는 증여로 의심받으면 억울하잖아요.”
“허······!”
“그렇다고 다른 화랑에 넘기자니 아깝기도 하고요. 딱 봐도 국보급 예술 작품인데요. 이왕이면 우리 태성이 돈과 명예까지 챙겨가야죠.”
“허······!”
스승님은 입을 떡 벌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네가 진짜 일곱 살짜리가 맞냐!’는 진부한 물음이 또 튀어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예술품들을 한꺼번에 사들이려면 태성갤러리도 허리가 휠 거예요. 워낙에 잘빠진 놈들밖에 없으니 놓치기 싫을 테니까요.”
“흐음. 꼬마야, 내가 보기엔······.”
“다 아는 선수끼리 거기까지만 해요. 보관 상태까지 아주 기가 막힌 물건이라는 거 누가 몰라요?”
나한테 이걸 넘기게 생기자 우리 집 지박령이 강제 성불할 정도였거든요?
나는 손끝으로 전당포 카운터를 톡톡 두드렸다.
“나한테 후려칠 생각하지 말고 제값이나 톡톡히 받아낼 생각을 하세요. 그러라고 준 심부름값이고, 이게 다 은행 투자금이 될 테니까요.”
“으음!”
“심부름값만 1억이에요.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하셔야죠.”
스승님은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좋다. 내가 맡아서 태성갤러리에 처분해 주지. 하지만 현금으로 다 맞춰주기는 어려울 게다.”
“어음과 현물은 안 돼요.”
꼬리가 잡힐 테니까.
죄지은 게 없으니 내 정체가 드러난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지만, 원래 뒷주머니로 챙기는 돈은 아무도 모를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다.
이를테면 와이프 몰래 빼돌리는 유부남의 비상금처럼?
“하지만 모자란 현금 대신 땅이나 주식으로 받아오는 건 괜찮아요.”
“땅은 그렇다 치고 주식? 오호라, 네가 노리고 있는 주식이 따로 있구나! 혹시 태성건설이냐?”
“틀렸어요. 태성자동차예요.”
태성자동차는 현재 큰아버지가 사장으로 앉아 있는 태성의 핵심 계열사다.
‘오일쇼크가 터지면 연비 때문에 가장 시끄럽게 불타오를 종목이지.’
중동에서 시작된 오일쇼크에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릴 것이다.
네덜란드는 엠바고를 받아서 배급량 이상의 전기를 사용하는 이들의 감옥 형량을 줄일 정도가 된다.
영국은 즉시 중동 개입 중단을 선언할 정도로 석유 공급에 목을 매고, 프랑스는 이로써 경제 황금기인 영광의 30년이 끝난다.
한창 성장일로를 걷고 있던 일본 역시 헬 게이트가 열리는 건 마찬가지다.
엔화 가치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버텼으며, 거리의 네온사인마저 꺼야 했을 만큼 긴축정책에 들어간다.
‘제2차 오일쇼크 때문에 전 세계 자동차 기업이 도미노처럼 줄도산을 시작한다.’
미국의 메이저 자동차 회사인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이때 맞은 타격을 이후 영원히 회복하지 못한다.
연비 개선에 목숨을 걸었던 독일과 일본, 미국만이 겨우 버텼을 뿐,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아예 자동차 산업이 거의 붕괴하고 만다.
‘우리나라도 관료 차량을 4기통으로 제한하는 등 자동차 수요 억제 정책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제5공화국의 병크라 일컬어지는 자동차공업 통합 조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과거 큰아버지는 크게 곤욕을 치러야 했다.
태성자동차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매각을 고려해야 했을 만큼.
그런 이유로 장남은 태성자동차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태성자동차를 기사회생시킨 것은 차남이었다.
‘하필이면 그때는 태성화학 화재 사고로 할아버지가 총수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상황이라서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를 걷게 됐었지.’
그 일로 차남이 급부상하여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고, 계열 독립해서 떨어져 나간 태성화학과 태성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는 장남과 차남으로 나뉘어 분열을 시작했다.
그렇게 태성은 재계 서열 5위에서 5년 만에 재계 서열 198위까지 곤두박질치고 만다.
다들 이대로 공중분해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태성의 암흑기였다.
‘이참에 태성자동차의 손실은 최대로 줄이고, 헐값에 나온 다른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서 덩치를 키워 보자고.’
나는 망해가던 태성자동차가 어떻게 급부상했는지 일련의 상황을 전부 꿰고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정답지를 들고 뛰어드는 셈이다.
“원래 기업이 은행에 우호지분을 넘기는 대신 투자를 받거나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태성자동차 주식, 뜯어낼 수 있겠죠?”
“한번 해 보마!”
스승님도 전당포 카운터를 탁 쳤다.
“이제 막 시작하는 은행에 태성그룹과 같은 우량 고객이 거래를 튼다면 처음부터 기반이 튼튼해지는 거지. 태성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데 주식만 한 것도 없고.”
이게 바로 은행과 기업의 공생관계다.
“게다가 태성이라면 이자 안 밀리는 곳으로도 유명해. 괜히 다른 은행들도 공들이는 알짜배기 기업이 아니라니까? 우리야 거래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럼 이것부터 쓰세요.”
나는 전당포 카운터에 종이를 슥 밀어 넣었다.
“이건 중개 계약서고요, 이건 투자 약정서예요.”
“허, 서명 날인만 하면 끝나도록 철저하게도 준비해 왔구나.”
“확실한 게 좋잖아요?”
내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나는 돈 회수에 관해서라면 목숨 걸고 확실하게 해야 하는 사람인지라.
“마지막 용건이에요.”
“전당포에 담보 잡히려고?”
“그것 역시 직접 확인해 보세요.”
나는 동전 지갑에서 황금빛이 번쩍이는 차용증 하나를 꺼냈다.
“현무호텔 커피숍에서 저한테 하셨던 말, 기억하세요?”
스승님은 말했다.
-꼬마야, 만일 네 돈을 먹고 큰 후에 네 뒤통수를 갈기는 놈이 있거들랑 내게 말해라.
-난 돈만 먹고 튄 자들을 곱게 보내지 않는 사람이란다.
내가 무려 1억이나 되는 돈을 고작 예술 작품 몇 점 중계한 값으로 내놓을 리 없잖은가.
이 심부름의 진짜 용건은 이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중정 요원인 철구 아저씨와 태성그룹 경호원인 유종태가 나서서 처리하기 좀 껄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심부름값이에요.”
“아니, 이게 뭐야!”
스승님은 내가 건넨 차용증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하우스를 대체 몇 개나 뜯긴 거야? 말대가리가 아주 제대로 털렸구나! 으하하핫!”
이윽고 배를 잡으며 한참이나 웃기 시작했다.
“이거 아주 재밌겠구나! 말대가리한테서 고리대랑 원금 회수하는 것은 내게 맡겨라! 으하하핫!”
우리 스승님은 본인이 이득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동종업계 경쟁자들을 후려치는 건 더 좋아하시는 분이다.
스승님은 신이 나서 두 팔을 걷어붙였다.
행동력은 또 얼마나 빠른지.
그 자리에서 당장 전화를 돌렸다.
“어이, 말죽거리 말대가리! 나 명동 송골매다! 듣고 놀라지나 마라. 방금 나한테 네 차용증이 왔지롱! 지금부터 내가 수금한다!”
딸깍.
이것이야말로 용건만 간단히!
스승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따르릉! 따르릉!
미친 듯이 울려대는 전화기를 보며 스승님은 낄낄 웃었다.
“약 올라 죽겠지? 어우, 이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네!”
스승님은 즐겁게 웃으며 손바닥을 짝짝 쳤다.
“자, 그럼 용건은 끝났······ 응?”
“용건 아직 안 끝났는데요? 말대가리한테 채권 회수하고 싶으시다면 이것부터 쓰셔야죠.”
나는 전당포 카운터에 종이를 하나 쓱 들이밀었다.
“채권 회수 위임 계약서예요.”
“으하하핫!”
스승님은 즉시 똥볼펜을 들어 서명과 날인을 휘갈겼다.
나는 위임 계약서를 곱게 접어 동전 지갑에 넣었다.
“원래 채권 대리의 수수료는 좀 센 거 알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런 험한 일은······응?”
스승님은 <대행 수수료는 약속대로. 자세한 내용은 뒷면에 계속>이란 깨알 같은 문구가 중간에 은근슬쩍 기재됐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급하게 위임장을 뒤집어서 뒷면을 확인한 스승님은 눈을 부릅떴다.
<채권 회수에 관한 수수료 일체는 선금으로 지급한 심부름값 1억으로 퉁친다.>
“어억! 설마 이렇게 날로 먹겠다는 건······ 야!”
딸랑!
이미 꼬마 손님과 유종태는 튀고 없었다.
* * *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동차에 올랐다.
“유 팀장님, 출발!”
“안전벨트 매셨죠? 도련님, 그럼 출발합니다!”
부르릉.
운전석에 앉은 유종태가 낄낄 웃었다.
“송골매 어르신이 벌써 두 번이나 눈 뜨고 당하시는군요. 이번에도 잔뜩 신이 나신 모양이니 다행입니다. 말죽거리 말대가리가 임자 제대로 만났네요.”
스승님과 말죽거리는 오랜 앙숙이니까.
스승님이라면 절대로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만 해도 남산 찰거머리를 족칠 기회가 온다면 냉큼 받아들일걸?
“어디로 모실까요?”
“태성백화점이요.”
“혹시 무슨 용건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우리 엄마 옷장 좀 채우려고요.”
할아버지가 송년의 밤이란 공식석상에서 먼저 우리 모자(母子)를 공개했다.
그러면서 다른 가족들 섭섭하지 않게 나중에 가족끼리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식사에 초대했다.
그게 바로 내일이다.
“시댁 식구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잖아요. 예쁜 옷 입고, 예쁜 가방 들고, 예쁘게 꾸며서 가야죠.”
우광과의 혼사가 날아가면서 태성화학까지 날아가게 된 상태.
할아버지는 그까짓 태성화학 없으면 태성이 무너지냐며, 살다 보면 작게 투자해서 크게 키우는 사업도 있고 크게 투자해서 작게 말아먹는 사업도 있으니 태성화학은 키우다가 말아먹은 사업이라 치겠다고 하셨지만.
다른 식구들까지 순순히 받아들이란 법은 없다.
태성화학을 들먹이며 어머니를 몰아세우면 부모님은 얼굴을 붉힐 테고.
형제들끼리 언성이 오가게 되면 굉장히 시끄럽고 껄끄러운 식사 자리가 되고 만다.
‘원래 첫인상에 두 번의 기회란 없지. 우리 어머니 때문에 개판 났다고 두고두고 까이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그건 나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원치 않는 일이다.
‘태성그룹 직계 중에서 가장 까탈스럽고 모난 성격인 손위 시누이. 고모의 입을 막아둘 필요가 있겠어.’
그래서 간다, 태성백화점!
태성백화점 사장이며, 할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이자, 내게는 고모가 되는 차만영을 공략하러!
‘그럼 눈도장 좀 찍어 볼까?’
총알은 아주 넉넉하다.
이럴 줄 알고 현금을 두둑하게 준비해 왔지!
나도 한번 해보자, 돈지랄!
나도 이젠 어엿한 재벌집 사람이라구?
< 내게 맡겨라! > 끝
ⓒ 오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