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성백화점 VVVIP >
딱.
나는 손가락을 부딪쳤다.
‘어이, 수호신.’
어쩐 일인지 저승사자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데?
딱. 딱. 딱!
그제야 저승사자가 연기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너야말로 무슨 일 있었어?’
[아까 네가 가져왔던 겸재의 산수화를 잠시 감상하느라.]
겸재?
아, 정선!
[삼부연폭포가 꽤 멋지게 그려져 있더군.]
‘조선시대 작품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다음에 다른 산수화도 찾아서 보여줄 테니까 지금은 정찰부터.’
[정찰? 어디로?]
‘태성백화점 사장실. 우리 고모는 지금 무엇 하고 계신가 궁금해서.’
손자가 말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적을 알아야 공략 방법을 찾지.
* * *
저승사자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이곳은 과감한 색채와 세련된 가구로 꾸며놓은 태성백화점 사장실이었다.
고급스러운 원피스, 화려한 액세서리, 짙은 화장에 딱 떨어지는 똑단발을 하고 있는 30대 여자.
<사장 차만영>이란 명패가 적힌 책상을 탕 내리치며 고모는 뾰족하게 말했다.
“연말 매출은 우리 백화점의 성적이자, 자랑이자, 간판인 실적이에요!”
성탄절에 신년까지 몰린 연말 정기 세일 시즌이 바로 백화점의 최대 매상을 올리는 대목이었다.
“우린 보름 전부터 송년 감사 세일에 들어갔어요. 일 년 중 할인 행사를 가장 크게 열 때! 고객들이 지갑을 가장 많이 열 때!”
태성백화점도 ‘최대 70% 할인’, ‘초특가 세일’, ‘최저 가격’, ‘추가 할인’, ‘가격 인하’ 등의 문구로 매장 전체를 도배하고 있었다.
당연히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사고 싶은 손님들이 많이 몰려서 연일 최고 매출 기록을 경신할 때였다.
그래서인지 태성백화점 1층도 몰려든 고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바글댔다.
“그런데 멀쩡히 잘 나오던 매출이 뚝 떨어져서 갑자기 전(前)주 대비 17%나 폭락했어요.”
고모는 백화점 매장별로 올린 주간 매출 보고서를 탁탁 쳤다.
태성백화점 사장이 오전부터 백화점 임원들을 소집하여 화를 내는 이유였다.
사장실에 불려온 임원들이 입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인 까닭이었다.
‘이렇게 손님들이 잔뜩 몰려와서 정신없이 물건을 사고 있는데, 총매출이 17%나 떨어졌다는 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백화점 매출에 기여하는 바가 큰 VIP 고객들이 갑자기 우르르 빠져나간 모양이군.’
파레토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상위 20%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80%를 가지고 있으며, 상위 20%의 고객이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는 법칙이다.
비즈니스에서 VIP 고객이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태성백화점 명품관에서도 연말 특별 할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던데. 여긴 휑해도 너무 휑하다.’
부자도 사람인데, 같은 물건을 할인된 가격으로 사는 걸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태성백화점 명품관엔 파리만 날렸고, 명품관 직원은 한가롭기 짝이 없다.
‘최상부 한 층은 아예 통째로 비워져 있고. 입점을 원하는 수입 명품점이 다른 백화점에 비해 적다는 소리로군.’
백화점 경영이 어렵다는 뜻이었다.
“이번 연말 실적에 따라 태성백화점의 미래가 결정될지도 몰라요. 안 그래도 요즘 백화점 매각설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던데, 악착같이 연말 실적을 올리겠다고 두 손 걷어붙여 달려들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두 손 놓고 나 몰라라 할 거예요?”
임원들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고모는 씩씩댔다.
“왜 갑자기 VIP 고객들이 썰물처럼 싹 빠진 거죠? 우리 태성백화점 명품관에는 파리만 날리는데, 우광백화점 명품관은 미어터진다면서요?”
임원들은 고개만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겨울 정기 세일을 노리고 왔다 가는 일반 고객이라면 모를까. VIP 고객은 한번 빠져나가면 여간해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그간 공을 얼마나 들였는데요!”
고모가 아무리 눈을 마주치려고 해도 아예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벽을 보고 말해도 이렇게까지 답답하지는 않을 터.
고모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천불이 터질 상황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다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요!”
“······.”
“그러라고 내가 월급 주는 거 아니에요? 다들 잘리고 싶다 이거에요?”
“······.”
“내가 하나하나 실적 따져가면서 읊어줘요? 아니면 다섯 시간 동안 내내 대책 회의만 할까요?”
누구도 선뜻 총대를 메려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임원들은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즉각 해고 처리하겠어요.”
강경한 협박이었다.
고모는 손가락으로 임원을 지목했다.
“김 전무, 우광백화점으로 VIP 고객들이 빠지게 된 이유는요?”
“우광백화점에서 대대적인 VIP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구체적인 우광의 VIP 마케팅 전략이 뭐예요?”
“우리 태성은 10% 세일을 진행하는 데 반해 우광은 기본이 20%, 최대 35% 세일을 한다는군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 태성백화점 회원권을 가져오면 우광백화점 회원권을 1년 더 연장해주는 데다 특별 할인권까지 추가로 얹어 준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 태성백화점의 VIP 고객만 쏙 빼내가겠다는 뜻이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뒀어요?”
“어쩌겠습니까. 고객의 선택인데요. 우리가 그것까지 강제할 수는 없잖습니까.”
고모는 뒷목을 잡았다.
“그래서 이렇게 눈 뜨고 당하고만 있자고요? 그럼 우리 태성의 대책은요?”
“우리도 우광백화점 할인권과 맞바꾸죠. 아예 우리는 40% 세일을 하는 겁니다.”
쾅!
고모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출혈 경쟁을 시작하면 우광은 몰라도 태성은 적자 도산하고 말 거예요. 안 그래도 지금 태성의 백화점 점유율은 꼴찌! 매년 적자가 불어나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품이 왜 명품인데요! 비싸고 품질 좋으면 다 명품인가? 할인을 안 하니까! 서민들은 쉽게 들고 다닐 수 없는, 부의 상징이라서 상류층 고객들이 사는 거예요!
고모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우광이 언제까지 저렇게 출혈경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 못 가요! 급 떨어지니까!”
임원들은 또 침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광이 미친년처럼 머리에 꽃 달고 날뛰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죠. 이유가 뭐예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고모는 다시 지목해야 했다.
“송 이사, 갑자기 우광이 저렇게 눈 뒤집힌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요.”
“저, 그게, 그······.”
“우광백화점 김여진, 걔가 얄밉게 태성의 VIP 고객을 야금야금 뺏어가긴 했어도 지금같이 이렇게 미친년 널 뛰듯 날뛰진 않았잖아요.”
“그, 그러니까······.”
“몰라서 대답을 못 하는 거예요? 알면서도 입을 못 여는 거예요?”
“끄응.”
“좋아요. 입 열기가 싫다면 해고 통보받으셔야죠. 그럼 최 이사가 대답을······.”
“태성과의 혼사가 파투 나서 이를 갈고 있는 모양입니다!”
송 이사가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우광백화점 김 사장은 조카인 성준 도련님의 약혼녀를 예뻐하기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아끼던 조카가 파혼당하고 말았으니, 태성에 대놓고 보복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
“이참에 VIP 고객을 쏙 빼내서 독점하겠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우광골프장 회원권과 함께 끼워서 할인판매를 겸한다더군요.”
“성준이 혼사가 엎어진 걸 왜 내 백화점에 와서 화풀이하는데!”
고모는 신경질적으로 버럭 외쳤다.
“내가 진짜 이 거지 같은 년을······! 가만히 두나 봐!”
고모는 아아악, 하며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질렀다.
고모는 한참이나 씩씩대다가 임원들을 노려보았다.
“김 전무, 우광백화점으로 빠져나간 VIP 고객을 다시 끌고 올 대책은요?”
“우광백화점보다 낮은 가격으로 승부하는 건······.”
“말했잖아요! 그건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마이너스라고. 태성이 우광보다 급 떨어진다고 대놓고 광고를 하시죠?”
“끄응.”
“박 상무, 대책은요?”
“우리는 태성골프장 회원권은 물론 태성리조트 이용권까지 묶어서 할인 판매하는 겁니다.”
“지금 나더러 정 여사님께 사정하라는 뜻인가요?”
정 여사는 태성의 회장 사모님, 즉 아버지의 모친이자 내 할머니 되시는 분이다.
“최 이사의 대책은요!”
“은밀하게 소문을 흘려서 여론전으로 붙어보시는 것은······.”
“우광백화점을 깎아내리고 협잡질을 시작하자? 백화점 경영 능력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으니까? 그게 대책이에요?”
임원들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태성백화점 사장실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똑딱똑딱, 벽시계 소리만 무겁게 울려 퍼졌다.
“말이 돼요? 우리 태성이 아무리 업계 꼴찌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쉽게 농락당하다니. 하! 이건 너무 분하잖아요!”
고모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탄식했다.
“정말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해결할 마음이 없는 건 아니고요?”
나한테는 있는데, 그 방법!
상류층 사모님들은 물론이고 동네 아줌마까지 껌뻑 죽었던, 공전의 히트를 친 아줌마 마케팅 방법이 방금 막 떠올랐거든.
* * *
나는 시야 공유를 끊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내가 제일 먼저 공략한 곳은 태성백화점 명품관 가방 판매점이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색깔별로 하나씩.”
내가 명품 가방 판매점을 싹쓸이해서 나가기까지는 고작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명품 가방점 직원들은 일제히 달려나와 배웅했다.
백화점이 떠나가라 “다음에도 또 찾아주십시오!”를 외치면서 말이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이즈는 245. 제일 잘나가는 색깔로.”
명품 구두점 직원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하이힐, 단화, 부츠를 가리지 않고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사들였다.
명품 구두점 직원들도 일제히 달려나와 “최선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를 외쳤다.
다른 명품관 직원들은 그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혹시나 이쪽으로 오지는 않을까?’ 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이즈는 11호. 반지, 귀걸이, 목걸이, 팔찌 세트로.”
명품 보석점 직원들은 내가 코너를 돌자마자 만세부터 부르면서 달려나와 반겼다.
나는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오팔, 가넷, 진주 세트를 사들였다.
“기초부터 색조까지. 화장품 브랜드 중에 제일 잘나가는 것으로.”
“색깔별로, 용도별로, 제품별로 모시겠습니다! 다음 시즌 신제품이 나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명품 화장품점 직원들은 바구니에 제품을 쓸어 담으며 웃었다.
매대 하나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렇게 내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여성복 전문점이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명품 여성복 직원들은 너무 기뻐서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다 팔면 떨어지는 인센티브가 얼마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여성복은 유난히 제품과 종류가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손님, 혹시 옷 주인의 사이즈는 알고 계실까요?”
“36, 23, 38이요.”
이렇게만 말하면 업소 아가씨들 드레스는 준비 끝났었지.
“쓰, 쓰리 사이즈로군요. 혹시 구체적인 사이즈는······.”
그렇군. 같은 사이즈라도 다 같은 사이즈가 아닌데.
“E컵이요.”
“손님, 여성복 사이즈라고 하면 어깨너비, 가슴 단면, 소매 기장······컥!”
여성복 매니저가 젊은 여직원의 명치를 팔꿈치로 찔러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여성복 매니저가 방긋 웃으며 내게 허리를 굽혔다.
“말씀해주신 쓰리 사이즈에 맞춰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혹시 여성용 속옷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호피 무늬, 검정 레이스, 빨간 티팬티 세트, 실크 슈미즈에 망사스타킹과 가터벨트 있어요?”
“······.”
여성복 매니저는 입을 떡 벌렸고, 유종태는 얼굴이 벌게진 채 마른세수를 했다.
“특별히 섹시하고 예쁜 것으로 골라서 챙겨달란 뜻입니다. 괜히 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고요.”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또각또각또각또각또각!
그때 엄청나게 다급하게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고모가 똑단발을 찰랑이며 명품관에 들이닥쳤다.
“우리 백화점 역대 최고 매출 기록을 갈아치우신 VVVIP 고객님, 어디 계셔? 설마 벌써 쇼핑 끝내고 귀가하셨어?”
내 호출에 응답하여 고모가 즉시 달려오신 것이다.
“사장님, 그분은 지금 여기 계십니다!”
여성복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고모의 눈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두 손 모아 꾸벅 배꼽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고모.”
“고모?”
“전 차정혁이라고 해요. 고모의 남동생이 바로 제 아빠예요.”
“······!”
고모는 눈을 크게 떴다.
“혜성같이 백화점에 나타나서 현금으로 명품관을 발칵 뒤집었다는 거물급 뉴 페이스! 대체 뉘집 자식인가 했더니, 우리 집 애였어?”
“가족끼리 어려울 땐 서로 돕고 살아아죠.”
고모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태성백화점 VVVIP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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