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만렙 아들-68화 (68/189)

< 재벌가의 스케일 >

이만 가겠다는 소리에 고모는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조카라고 배웅해주려고 하나 보다, 하고 덤덤하게 걸어가는데.

고모는 내 어깨를 살짝 털어내며 방긋 웃었다.

“아까 보니까 네 엄마 것만 잔뜩 샀더라?”

눈썰미도 좋으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 옷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면 안 돼. 제대로 골라서 사야지.”

어깨를 털어내던 고모가 내 손을 잡았다.

“가자. 조카가 여기까지 먼 길 돌아 찾아왔는데, 우리 귀염둥이 내일 입을 옷은 고모가 사줘야지.”

어라?

사양할 새도 없이 고모는 사장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복도에서는 김 전무와 유종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전무, 백화점 임원들 전부 불러올려요. 잠시 후에 대책 회의 시작할 거예요.”

“또···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태성백화점 임원 회의는 아까 사장실에서 열렸다가 방금 해산했었다.

“태성백화점의 VIP 고객을 확보한다는 문제, 아직 해결 안 됐잖아요?”

“저기, 사장님. 그게 자꾸 불러서 닦달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을 갖고 궁리를 해야 마땅한 대책이라도 준비해서······!”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시간을 안 줬나요? 암만 쥐어짜도 안 나오던 대책, 방금 나온 것 같으니까 토 달지 말고 부르기나 해요. 얼른!”

“예, 알겠습니다!”

김 전무는 허겁지겁 튀어 나갔다.

고모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고모의 명함을 유종태에게 내밀었다.

황금빛이 번쩍거리는 명함이었다.

“유 팀장은 이거 받아요.”

아니, 그 명함을 왜 내가 아니라 유종태에게 주십니까?

“엄마 옷장을 채워주는 건 우리 조카가 했으니, 조카 방을 채우는 건 이 고모가 책임져야죠. 유 팀장은 이걸로 우리 조카 방을 채워줘요. 외상으로 달아두란 말, 알아듣죠?”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유종태는 사양치 않고 고모의 명함을 냉큼 받아 챙겼다.

통 큰 선물이었다.

“이건 우리 귀염둥이가 보인 호의에 대한 고모의 응답. 호의를 매정하게 거절하면 섭섭하다며? 이 정도면 상냥하고 부드러운 거 맞지?”

유종태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유종태의 입가에는 뿌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네. 우리 고모가 최고예요!”

“어머, 눈웃음 좀 봐. 그건 딱 나 닮았다, 얘. 누가 내 조카 아니랄까 봐 그런 걸 닮나 몰라, 흥.”

고모는 날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잘 봐 둬. 백화점 쇼핑법, 이참에 고모가 가르쳐 줄 테니까.”

그렇게 고모는 나를 데리고 태성백화점으로 내려갔다.

솔직히 좀 궁금하긴 했다.

‘재벌가 자제들은 백화점 쇼핑하는 법도 배우고 그러나 보지?’

우리 아버지와 고모가 하고 다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세련되고 화려한 차림에 멋들어지게 꾸민 모습에서 귀티와 부티가 확 난다.

‘흠, 그럼 태성백화점을 운영하는 고모의 안목을 견식해 볼까?’

과연 매의 눈이라는 스승님의 안목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건인가!

전당포를 운영하고, 목 좋은 부동산을 쓸어 담으려면 보통 눈썰미 가지고는 안 된다.

또한 백화점 역시 안목이 필요하긴 마찬가지.

화려한 차림새와 들고 다니는 물건마다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것을 볼 때, 고모 역시 안목이 제법 높을 것 같아서 기대된다.

* * *

그런데 이게 웬걸?

“방금 그거 딱 어울려. 사!”

아동복 매장의 직원이 옷걸이에 걸린 옷을 내게 대자마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지금 그것도 예뻐. 사!”

어떻게 된 게 옷걸이째 옷을 가져다 댈 때마다 “좋아! 사!” 소리밖에 안 한다.

단 한 번도 ‘안 어울려.’, ‘별로야.’, ‘다른 거.’, ‘마음에 안 들어.’ 같은 말이 안 나오는 건지.

외려 이게 더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저기, 고모? 너무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것 같은데요.”

“아니거든? 나 지금 매의 눈으로 고르고 있거든? 아, 그것도 괜찮네! 사!”

아니에요, 고모.

아무래도 지금 이건 정상적인 쇼핑이 아닌 것 같은데요.

재벌집에선 보통 이렇게 쇼핑하는 거, 맞습니까?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오, 도련님, 잘 어울리십니다! 그건 꼭 사야 합니다! 완전 잘 어울립니다!”

고모 옆에서 똑같은 표정으로,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박수를 치고 있는 유종태 때문이었다.

저 인간은 왜 또 저러고 있냐.

“고모, 전 이렇게 많은 옷은 필요 없어요.”

“안 돼. 이거 다 잘 어울려. 예쁘니까 사야 해.”

“저 금방 커요. 이거 다 못 입어요.”

하지만 고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년에 이렇게 잘 어울리라는 보장이 없어. 사.”

“음, 그럼 이건 어때요? 내년에 입을 수 있게 다른 옷들은 조금 더 큰 옷으로 사는······.”

“그런 가난뱅이 같은 사고방식은 버려!”

역시 재벌집의 쇼핑엔 뭔가 다른 원칙이 적용되는 건가?

나름대로 아주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옷, 내년에는 절대 못 입어. 딱 지금 사이즈로 사야 해.”

“왜요? 잘 만들어진 명품 아동복이라서 내년에 입어도 헤져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요?”

“후져 보여! 내년이면 유행 다 지나고 말아!”

아니, 왜 이렇게 단호박이야?

“난 쇼핑할 때 딱 하나만 봐. 어울리느냐, 아니냐. 쇼핑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거든?”

아뇨, 보통은 가격을 봅니다.

선물용인지도 보고, 품질도 보고, 가성비도 따지고, 필요한가도 고려하거든요?

난 원래 그렇게 쇼핑하는데, 내가 이상한 겁니까?

“오케이. 우리 귀염둥이가 됐다니까 옷 쇼핑은 여기까지만 하고. 그럼 그 옷에 맞는 신발과 모자도 골라야겠지?”

“네?”

“원래 옷 고르면 그에 어울리는 잡화는 세트로 사야지. 넌 그런 것도 모르니?”

“······.”

“쇼핑의 기본이 안 됐구나. 따라와. 오늘 고모가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 줄 테니까?”

그렇게 나는 고모에게 끌려가 3시간짜리 쇼핑 지옥에 갇히게 되었다.

‘어떻게 옷 한 벌에 잡화가 다섯 개가 종류별로 딸려 오는 거지? 이게 쇼핑의 기본이라고?’

왠지 내가 알던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랄까.

쇼핑에 10분을 넘겨? 아니, 왜?

“고모, 이렇게 많이 사들이면 물건을 꺼내 쓰는 것도 일이라고요. 적당히 사세요.”

“물건을 꺼내 쓰기 어렵다고? 그럼 가구를 사면 돼. 가자, 가구 사러!”

“······.”

아니, 어떻게 무슨 말을 꺼낼 때마다 쇼핑 목록이 무한 확장하는 것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으음, 가구만 열두 개를 골랐네. 얘, 혹시 집에 이건 다 들어가지? 뭣하면 아파트도 한 채 보러 갈까?”

나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더 이상은 안 돼! 내가 못 견뎌!

지금 백화점 층을 오가며 세 바퀴나 돌고 있다고요!

“현금으로 주세요. 아파트는 내가 알아서 살게요.”

“새 아파트라면 장만해야 할 물건이 훨씬 더 많겠네? 그럼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해볼······”

“고모, 임원 회의!”

“어머!”

고모는 그제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간단하게 백화점 식품점만 돌고 가자. 우리 귀염둥이 쇼핑한다고 힘들었는데, 입에 뭐라도 물려주지 않고 돌려보내면 고모가 너무 섭섭하니까?”

또, 또, 또 쇼핑 목록이 증식했다!

“집에 가서 먹을 것들 좀 챙겨주려면··· 얘, 혹시 집에 있는 냉장고 사이즈는 넉넉하니?”

가전제품 매장까지 돌자고?

나는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우리 엄마가 걱정해요. 저 이만 집에 갈게요.”

“아, 그렇구나. 그럼 다음엔 엄마랑 같이 와. 그땐 엄마 물건도 고모가 골라줄게.”

“······.”

어쩐지 고모가 왜 백화점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았다.

여자들의 기본 쇼핑의 세계는··· 너무나 심오하고 광대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 심연을 잠시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럼 내일 보자? 고모가 사준 옷으로 골라 입고 나와. 알았지?”

고모는 콧노래를 부르며 경쾌하게 또각또각 사라졌다.

남겨진 나와 유종태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

어마어마한 물건들이 종이봉투, 아니, 아예 종이 박스에 담겨서 바쁘게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화점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1톤 트럭 가득 포장된 물건을 쌓고 있는데.

허, 이것 참 기가 막혀서.

아니, 저건 사들인 물건 중에서도 일부분에 불과했다.

백화점 직원들의 짐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도련님, 아무래도 트럭으로는 모자랄 것 같은데요. 이삿짐 차를 불러올까요?”

재벌가의 쇼핑 스케일, 어마무시하구나!

나는 그간의 상식이 무참하게 박살 나는 참담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유 팀장님, 원래 재벌가 쇼핑이 이런 걸까요, 아니면 우리 고모의 쇼핑이 특별한 걸까요?”

“······.”

유종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지금 저 트럭에 실리고 있는 짐들 말입니다. 전부 도련님이 사들인 겁니다만?”

그, 그럴 리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도련님은 그렇게 명품관을 돌았고, 고모님은 하나하나 골라가며 백화점을 돌았다는 게 다르긴 한데요.”

“······.”

“기본적으로 도련님은 고모님을 쏙 빼닮으신 것 같습니다.”

그, 그럴 리가!

* * *

눈떠 보니 새해 첫날이었다.

‘무시무시하군. 백화점 쇼핑의 후유증!’

3시간 동안 백화점 층을 오가며 세 바퀴나 돌았더니.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씻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새해 첫날 연휴가 3일이나 된다고?’

21세기엔 새해 첫날 연휴는 하루뿐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1999년 이후부터구나.

‘보통 대기업 회장들은 신정 설을 쇤다던데 태성은 어떨지 모르겠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떡국이나 한 그릇 먹고 새해 인사하자고 부른 거라던데.’

어쨌거나 어머니한테 명절 상을 차리라는 소리는 없었다.

그거면 됐지.

“정혁아, 일어났니?”

어머니는 내가 어제 백화점에서 사 온 옷을 입고, 진주 세트까지 걸치고, 예쁘게 머리를 올리고 화장도 곱게 했다.

귀부인이 따로 없다.

“엄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혁이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똑똑똑.

“그만 할아버지 댁에 가야 할 시간이다. 아침 식사에 늦겠어.”

아버지도 정장에 코트까지 쫙 빼입으셨다.

워낙에 옷걸이부터가 근사한 양반인데 옷 고르는 취향도 세련돼서 모델이 따로 없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빠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정혁이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내가 두 팔을 벌리자,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덥석 안아 들었다.

묵직하고 세련된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아버지는 새해 첫날인 오늘 비행기 추락사로 돌아가셨었지.’

그보다 조금 먼저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던 어머니는 우리 부자(父子)를 보며 방긋 웃고 계신다.

문득 코끝이 작게 시큰거렸다.

“엄마, 아빠, 우리 세 식구 다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요.”

아, 주책은 딱 질색인데.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얼른 가요. 가족들이랑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지각했다고 눈총받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우리는 아침 일찍 새해 인사 겸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평창동으로 향했다.

* * *

‘아니, 이 스케일은 뭐야?’

종로 평창동에 위치한 할아버지 자택은 으리으리했다.

솔직히 한남동 우리 집도 어디 가서 꿀릴 만한 집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부지 700평에 건물 114평, 수영장 딸린 우리 집이 초라해 보일 만한 위용이었다.

할아버지 저택은 부지 약 2,800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건물이 다섯 채, 최고급 정원수만 8천 그루 넘게 심어진, 그야말로 재벌집이었다.

‘아니, 이 차들은 또 뭔데? 가족끼리 식사한다며? 조촐하게 떡국 한 그릇 먹고 새해 인사 한다며?’

주차 대수 50대짜리 주차장이 고급 세단으로 꽉 찼다.

아버지가 차에서 내리자,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들이 앞다투어 인사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김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요. 잘 돌아오셨습니다.”

“박 사장님도 오셨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태성의 38개 계열사 사장들과 임원들이 저택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반색했다.

‘설마 새해 인사를 온 건가?’

새해가 되면 정재계 인사들의 집 문턱이 닳는다더니.

새해 인사를 핑계로 두둑한 선물을 들고 눈도장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성준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태성건설을 맡게 되셨다지요?”

“심 사장님.”

그들 중에는 태성화학 사장과 임원들도 있었다.

‘태성화학 사장 심원철이다!’

안 그래도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다니!

내가 눈독 들이던 인재였다.

그는 바로 내 투자 회사의 바지 사장으로 영입하고 싶은 1순위 인물이었다.

< 재벌가의 스케일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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