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성화학, 뜨거운 관심 >
태성의 차남이자, 태성유통의 사장 차기준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왜 그런 반응이지? 내 제안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그건······.”
태성화학 심 사장은 피식 웃었다.
“정말로 그런 제안을 건넬 거라고는······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흐음, 유능함을 어필하려던 것이라면 성공했습니다.”
차기준은 몹시 흥미롭다는 듯 실눈을 휘며 웃었다.
“인정하겠습니다. 확실히 심 사장님이라면 태성물산 해외 지사로는 성에 안 찰 것 같군요. 더 좋은 조건을 준비해 오도록 하죠.”
차기준은 등을 돌렸다.
그 뒤를 황급하게 임원들이 뒤따랐다.
차기준은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양 비서, 최근 심 사장과 접촉한 사람들부터 파악해 보십시오.”
“예.”
“누가 어떤 제안을 했는지. 얼마나 좋은 제안이기에 태성물산 해외 지부를 거절했는지. 그것부터 확인하는 게 급선무일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언제나 미소가 매달려 있을 법한 차기준은 입꼬리를 더욱 위로 끌어 올렸다.
“재밌군.”
차기준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할아버지의 집 주차장을 가득 채운 고급 세단을 보았을 때도.
아버지에게 인사해 오는 계열사 임원들을 봤을 때도.
새해 인사를 핑계로 두둑한 선물을 들고 눈도장을 찍으러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가족끼리 식사 한 끼 하는 자리라는 것이······.’
설마가 사람 잡았다.
“잘 먹겠습니다, 회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해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 댁 식당엔 6인용 잔칫상이 얼추 40개 이상 붙어 있었다.
태성그룹 38개 계열사 사장단과 임직원이 둘러앉아 떡국을 받았다.
16인용 대리석 식탁의 상석에는 할아버지가, 그 옆에 할머니를 비롯해 태성의 직계 가족이 차례대로 앉았다.
‘이게 무슨 가족끼리 조촐하게 새해 식사 한 끼 하자는 거냐고!’
할아버지는 수저를 든 채 크게 웃었다.
“태성 가족이 함께하는 새해 첫 식사야. 많이들 들게!”
이게 바로 재벌가의 가족 식사 스케일인가!
“우리 정혁이도 많이 먹어라. 떡국 한 그릇 먹어야 한 살 더 먹는 거다.”
할아버지가 내 떡국 그릇을 밀어주며 식사를 재촉했지만, 나는 차마 수저를 들 수 없었다.
“할아버지.”
“응?”
“저 그냥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난 지금 할아버지의 무릎 위.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석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다들 우리 정혁이 얼굴 똑똑히 보았지? 앞으로 우리 정혁이 얼굴 잊어버리지 마라. 하하하!”
이렇게 눈도장을 찍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
그때 얌전하게 물을 마시던 태성가 둘째 며느리가 새침하게 물었다.
“아버님, 그럼 태성화학 임원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허허 웃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태성의 둘째 며느리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이대로 우광에 함께 넘기실 작정은 아니실 테니까요. 그럼 기존의 다른 계열사에 밀어 넣으실 건가요?”
“임원들만 문제겠어요? 태성화학 직원이 2천 명이에요. 거기에 딸린 식구까지 하면······. 이번 구조조정으로 족히 8천 명은 곤란을 겪겠네요.”
첫째 며느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껄껄 웃으며 떡국을 먹던 계열사 임원들은 조용해졌다.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태성화학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지. 우리 부모님의 오점이자, 공격할 구실이니까.’
내 목표는 하나였다.
-태성화학의 문제로 낙인찍히기 전에 다른 방면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
계열사 임원들 중에 몇 명이 눈치껏 슬쩍 말을 보탰다.
“태성자동차를 사면 우광 주유소에서 주유 할인을 끼워주고, 우광 주유소를 이용하면 태성자동차 정비 할인해주던 연계 상품을 판매 중단하자더군요.”
“우광에서 납품 못 하겠답니다. 유통 거래처 바꾸겠단 연락 받고 오는 길입니다.”
“우리 태성갤러리를 찾아주던 우광 라인의 사모님도 발길 싹 끊었습니다.”
“태성패션은 우광백화점에서 입점 계약 종료를 통보받았습니다.”
나는 누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초면부터 우리 부모님을 물고 늘어지는 잡것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태성가의 두 며느리가 동시에 방긋 웃으면서 어머니를 돌아봤다.
“정말 대단한 분이 손아래 동서로 들어왔네요. 무려 300억짜리 혼사를 갈아치우고 오셨으니.”
“태성가의 핏줄을 앞세워 들어왔는걸요. 후처라면 또 모를까. 혼수도 없이 맨입으로 태성가에 입성하다니. 20세기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요.”
탕!
고모가 눈을 부릅뜨면서 물잔을 내려놓았다.
“작작들 좀 잡아요. 조카 듣는 앞에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두 며느리들은 방긋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어머, 고모야말로 제일 분한 사람 아니에요? 듣자 하니 우광에서 보복 조치로 태성백화점 매출이 반토막 났다면서요?”
“누구 때문에 연말 대목에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데다, VIP 고객을 전부 빼앗기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면서요? 그런데도 원흉이 원망스럽지 않으신가 봐요?”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두 며느리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더니. 초면부터 여론을 몰아가며 망신을 주려고 드네?’
이거 괘씸한데?
아버지가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려고 할 때, 고모가 손을 들어 막았다.
“여기가 태성이지 우광이에요? 우광 없으면 장사 망해 죽는대요?”
고모의 뾰족한 목소리는 딕션도 좋게 카랑카랑하게 귀에 꽂혔다.
“백화점 매출 반토막? 그건 내 경영 능력 부족이라고 치죠.”
고모의 싸늘한 눈이 태성가 둘째 며느리에게 꽂혔다.
“태성갤러리? 사모님들 발길 끊긴 게 왜 막내 올케 탓이에요? 지난번에 위작을 진품인 줄 알고 팔다가 개망신을 당했다죠? 안목이 똥눈이라서 장사 말아먹은 걸 왜 남 탓하는데요?”
고모의 눈이 이번엔 태성가 첫째 며느리를 향했다.
“태성패션이요? 월남치마 같은 걸 명품 패션이랍시고 들이미니 팔릴 리가 있나! 디자이너부터 갈아치워요!”
고모의 저격은 첫째 오빠에게도 향했다.
“주유소가 우광밖에 없어? 아니면 호구 장사 하자는 거야? 주유 할인은 쥐꼬리만 한데, 자동차 정비 할인 폭은 크다며? 차라리 우리 쪽에서 주유 할인 필요 없다고 손절해야 하는 결합 상품 아니야?”
고모는 끝내 둘째 오빠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태성물산이 해외에서 물건 떼올 때 우광은 숟가락만 얹었다면서? 불량 납품 많은 우광 물건 팔아치울 생각 대신 우리 태성의 물건이나 제대로 팔지?”
할아버지는 딱 소리가 나도록 수저를 내려놓았다.
“다들 그만해라. 새해 아침부터 이 무슨 추태야!”
할아버지는 두 며느리는 물론이고, 묵묵히 앉아 있는 자식들과 계열사 임원들을 훑어보았다.
“태성화학 포기하기로 결정한 건 나다. 불만이 있으면 내게 똑바로 말해라. 에둘러서 애먼 사람 잡으려 들지 말고.”
할아버지는 불편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
“우광에서 뺨 맞고 막내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차라리 네놈들도 우광을 들이박고 싸우든가, 그것도 아니면 우광에 엿이나 실컷 먹이든가! 왜 새해 벽두부터 못나게 집안싸움이나 하려고 들어!”
둘째 며느리는 조곤조곤 얘기했다.
“아버님 속이 제일 쓰리시겠어요. 7년이나 공들여 키운 태성화학을 넘기는 것은 물론 우광 김 회장님과의 친교도 끊어지게 생겼으니까요.”
“사업은 사업이고, 친교는 친교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할아버지는 품에서 청와대 마크가 찍혀진 초대장 2개를 꺼냈다.
“사냥은 집 안에서 하는 게 아니야.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해야지! 다들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계열사 임원들이 전부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었다.
“우리 태성에 청와대 신년 오찬 초대장이 두 장이나 왔다.”
다들 놀라서 깜짝 놀랐다.
“그건 각하께서 기업 총수들을 불러다 한 해의 경제 계획을 논의하는 중요한 일정이지 않습니까?”
“30대 재벌 기업 총수 중에서도 몇 분 초대받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태성에 두 장이나 초대장이 왔단 말입니까?”
“한 장은 회장님의 것일 테니, 다른 한 장은 대준 도련님의 것이겠군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건 성준이가 각하께 직접 받아 온 거다.”
“지, 직접?”
“각하께 말입니까?”
여기저기에서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께서 성준이를 콕 짚어 술자리에 초대하셨다. 거기에 술 석 잔을 얻어 마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초대장까지 받아왔어.”
소리 없는 경악이 퍼져 나갔다.
“성준이는 각하와의 담판에서 지하철 2호선 공사를 확정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확장 공사와 상가 증축까지 따냈다. 그것만 해도 최소 2천억이야!”
할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300억짜리 태성화학? 우광에게 줘 버린다고 태성이 무너지냐? 성준이가 끌어온 투자금만 180억이야!”
송년의 밤 이후 태성건설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행사 때 투자자들을 맞아 직접 투자 약정서를 쓴 사람들이 여기 모여 있기도 했고.
“성준이가 중동에서 따낸 굵직한 공사들은 또 몇이나 되고? 쥬베일 산업항 도시 건설만 1억 달러짜리야!”
아버지를 보는 계열사 임원들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오가는 눈짓이 바빠졌다.
슬쩍 16인용 태성의 직계 가족 식탁을 바라보는 눈길도 분주해졌다.
“태성화학 대신 성준이 몫으로 태성건설을 지원할 계열사를 몇 개 더 붙여줄 생각이다. 목재와 창호, 시멘트, 성준이가 가져가거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나도 깜짝 놀랐다.
그건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시멘트와 창호는 꽤 큰데?’
솔깃한 제안이었다.
반면 며느리들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너무 해요. 성준 도련님만 너무 챙겨주시는 거 아닌가요?”
“너무하기는 뭐가 너무해?”
할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첫째에겐 자동차와 패션을, 둘째에겐 유통과 갤러리를 넘겨줬으면 됐지. 셋째에겐 지금 태성건설밖에 없어. 그것도 윤성이 놈이 말아먹은 탓에 빚더미에 올라서 부도나기 일보 직전인 빈껍데기 회사만 달랑 하나야!”
할아버지가 태성화학 심 사장을 돌아보았다.
“심 사장, 우리 성준이를 도와주게. 시멘트, 자네가 맡아줄 수 있겠지?”
그러자 큰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심 사장님께서 원하신다면 태성자동차로 모시고 싶습니다. 중장비만 다루는 계열사를 따로 분리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태성중기 사장 자리로 모시겠다는 영입 제안이었다.
둘째 큰아버지도 손을 들었다.
“태성물산이 싫다면 태성식품은 어떻습니까?”
태성식품은 태성유통의 핵심 계열사였다.
고모도 손을 들었다.
“태성백화점은 지금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해요. 도와주세요!”
아버지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저는······.”
“예, 좋습니다.”
“······예?”
아버지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데, 태성화학 심 사장이 덥석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본다.
다들 황망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태성화학 심 사장을 번갈아 보았다.
“심 사장님,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자리는······.”
“좋다지 않습니까. 뭐든 시켜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태성화학 심 사장은 손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아직입니다. 지금 제안했던 자리는 잠시 보류했으면 합니다.”
“보류······ 말입니까?”
“예, 제게는 아직 끝내지 못한 소임 두 가지가 남아 있어서 말입니다.”
다들 머릿속에 똑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태성화학’은 아직 우광에 제대로 된 인수 절차를 밟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물었다.
“그래야지. 태성화학을 넘길 때 넘기더라도 피해는 최소화해야지. 자네가 남아서 끝까지 확실하게 마무리하게.”
“태성화학, 우광과 인수 절차를 밟기 전에 도로 되찾아올까 합니다.”
“뭐?”
“그게 성준 도련님의 제안을 보류해야만 하는 제 첫 번째 소임입니다.”
태성화학 심 사장의 다음 말은 새해 식사 자리에 폭탄을 떨어뜨려 놓은 것과 같았다.
“그럼 성준 도련님은 처음부터 태성화학을 잃은 적이 없으니, 앞으로 두고두고 책잡힐 일도 없겠군요.”
좌중이 시끄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그게 가능하겠어?’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는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하는 말이 수군수군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성화학 심 사장은 나를 힐끔 보더니 씩 웃었다.
왠지 될 대로 되라고 배짱 좋게 내지르는 느낌이었다.
‘내 말을 들었을 땐 반신반의하더니. 결심을 굳힌 모양이로군.’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제안을 보류해야 하는 두 번째 소임은 뭡니까?”
< 태성화학, 뜨거운 관심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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