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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렙 아들-73화 (73/189)

< 탐색전 >

안마를 받던 둘째 큰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인경이가 제일 시원했다. 너부터 골라 봐.”

“나이스!”

둘째 큰아버지 어깨를 담당했던 사촌 누나가 기뻐하며 상자를 뒤적거렸다.

딸의 돌림자는 경, 아들의 돌림자는 혁.

가운데 자를 떼어 보면 ‘인의예지신’이다.

그러니까 딸만 둘인 큰아버지네는 인경과 의경, 아들만 셋인 둘째 큰아버지네는 예혁, 지혁, 신혁이다.

‘아버지 항렬도 가운데 글자로 대기만성을 쓰더니. 이름 참 쉽게 짓는다.’

그래서 대준, 기준, 만영, 성준이었다.

“다 골랐어요.”

인경이 누나는 남진 콘서트 티켓과 태성극장 영화표 한 다발, 최신 팝송 앨범 레코드판 몇 장, 알랜 들롱 브로마이드를 골라왔다.

“룰은 알지? 그럼 질문한다.”

“네.”

“작년에 외가에서 받은 것은?”

“금조 아파트 한 채랑 현무 아파트 두 채요.”

“그럼 작년 생일 선물로는 뭐 받았는데?”

“말 한 마리랑 태성자동차 주식 0.1%랑 피카소 그림 한 점이요.”

“요즘 부모님이 뭘 제일 속상해하셔?”

“의경이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 거? 또 있나? 음, 엄마가 흰머리랑 주름이 늘었다고 짜증 내는 거? 그건 잘 모르겠어요.”

“좋아. 고른 거 다 가져가도 돼.”

“헤헤, 고맙습니다. 작은아빠.”

둘째 큰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무르던 나머지 사촌들의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

“이번엔 지혁이 차례다.”

“오오! 아빠, 뭐든 물어봐요. 난 다 대답할 수 있거든요!”

“그때 같은 반이라던 금조그룹 딸 말이야. 널 걔랑 약혼시킬까 하는데. 어때?”

“우웩! 싫어요!”

“이유는?”

“걘 진짜 못생겼고 뚱뚱하단 말이에요!”

“다른 흠이 있어서 싫은 건 아니고? 이를테면 남자친구가 있다든가, 고약한 버릇이 있다거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기가 차는군.’

둘째 큰아버지는 애들이 좋아할 법한 물건을 미끼로 은밀한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하지만 애들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겠군. 지금은 외국 제품을 구하기도 어렵고, 외국 문화에 열광하던 때니까.’

외가나 부모에게 받은 선물을 밝힌다고 누가 빼앗아 갈 것도 아니다.

반면 저 나이대 애들은 시중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구해오는 게 곧 능력이었다.

저걸 들고 학교에 가면 난리법석이 날 것이다.

‘둘째 큰아버지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일 테고.’

둘째 큰아버지는 무역과 유통을 담당하느라 외국에 자주 나갔다 오신다.

상대적으로 그에겐 저런 물건들은 구하는 건 무척 쉬운 일일 터였다.

물건 몇 개와 맞바꿔 조카들의 재산 변동 상황을 간단하게 파악하는 것.

그가 계열사 임원 회의에 참석하는 대신 지하 놀이방으로 온 목적이겠지.

“우리 막내 조카님은 이름이 뭐더라.”

“차정혁이에요.”

둘째 큰아버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조카님은 어째서 상자 안을 한번 뒤적거려보지도 않을까?”

둘째 큰아버지는 내 앞에 의자를 놓고 앉으며 물었다.

“여기엔 원하는 게 없는 모양이지?”

“지금 저한테 질문하신 거예요?”

나는 읽고 있던 아동월간잡지 ‘만화왕국’ 최신 호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둘째 큰아버지 사전에 공짜는 없다면서요. 그러니 저 역시 둘째 큰아버지의 룰을 따라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좋지.”

“원하는 바를 묻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는다. 그게 룰이라죠? 그래서 이건 첫 번째 빚이에요.”

나는 손가락을 하나 꼽았다.

“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구나. 그래서 대답은?”

“저는 조용히 지내길 원해요.”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지 말아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일부러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말로 골라서 대답했는데, 제대로 알아들었군.

“굳이 빚으로 달아두려는 이유가 뭐지? 여기에 네가 원하는 물건이 없다면 무엇으로 돌려받으려고?”

“그 질문은 두 번째 빚으로 달아둬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대신 확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빚으로 달아두려면 값은 제대로 치러줘야지.”

“물론이에요.”

인생은 원래 기브 앤 테이크.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 하고, 빚을 달아두려면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법.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꼽았다.

“둘째 큰아버지께 원하는 물건은 없지만, 원하는 대답은 있으니까요.”

“원하는 대답이라······.”

“질문은 질문으로 갚자는 거죠.”

“내가 질문을 한 대가로 너 역시 내게 질문을 하겠다는 뜻이로구나?”

“세 번째 빚으로 달아둘까요?”

“아니, 그건 빼자. 이왕 빚을 져야 한다면 그런 시시한 질문으로 기회를 낭비할 수는 없지.”

둘째 큰아버지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즉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걷어붙였던 소매를 도로 내렸다.

“세 번째 질문이다. 넌 외가에서 뭘 받기로 했지?”

“몰라요.”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꼽았다.

“몰라? 아까 약속했을 텐데. 빚을 달아두려면 성의 있는 대답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아직 외가를 가본 적도 없는데, 받긴 뭘 받아요?”

둘째 큰아버지가 고개를 슬쩍 갸웃했다.

“이럴 땐 보통 ‘받은 것이 없다’고 하지 않나?”

“그건 네 번째 빚으로 달까요?”

“하······?”

내가 손가락을 마저 하나 더 접자, 둘째 큰아버지가 날 도둑놈 보듯 바라봤다.

“추가 질문라기엔 너무 하찮지 않나? 확실하게 대답한다고 약속했던 건 너였다.”

“이유 없이 덧붙인 질문이 아니잖아요.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 은근슬쩍 물어보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도 굳이 네 번째 빚으로 달아둔 건데요.”

나는 새끼손가락만 반듯하게 펴져 있는 손을 흔들었다.

“앞으로 질문은 신중하게 골라주세요. 난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있거든요. 둘째 큰아버지 역시 성의 가득한 대답으로 응해주길 바라니까요.”

그러자 둘째 큰아버지가 늘 입꼬리에 매달고 있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좋아. ‘받은 적 없다.’는 말 대신 굳이 ‘모른다.’라고 대답한 이유는?”

“진짜 몰라서 그래요. 외가에서 내 몫으로 뭔가를 챙겨줬다면 거짓말한 게 되니까요. 만약에 외가에서 내 몫으로 챙겨둔 게 있다면 굳이 안 받을 생각도 없거든요.”

둘째 큰아버지의 실눈이 더욱 가느다랗게 휘었다.

하지만 그 실눈 사이로 언뜻 스치는 날카로운 눈빛은 쉬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것을 마지막 질문으로 하자.”

“좋아요. 대신 마지막이랬으니까 둘째 큰아버지가 빚을 다 청산할 때까지 추가 질문은 받지 않겠어요. 어때요?”

“그러자. 아까 심 사장을 따로 만나러 갔다던데. 왜 그랬지? 용건이 뭘까.”

내가 김 비서와 함께 태성화학 심 사장을 만났던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럼 왜 심 사장에게 묻는 대신 내게 묻는 것이고?

“나와 엄마는 태성화학과 맞바꾸어 여기 이 자리에 오게 됐다면서요. 아까 태성화학 사장님이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인사했어요.”

“좀 더 성의 있는 대답이어야지.”

“태성화학에 대해 얘기했어요.”

“······태성화학? 심 사장은 네게 뭐라고 했지?”

나는 다섯 손가락이 전부 접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추가 질문은 안 받기로 했었죠? 이번엔 제 차례예요.”

“흠, 이거 기대되는군. 우리 조카님은 내게 뭐가 궁금하실까.”

“아까 심 사장님에게 태성식품 계열사 사장을 제안했잖아요. 그런데 이미 태성식품엔 사장님이 따로 계신단 말이죠.”

태성식품은 태성유통의 핵심 계열사다.

그런 곳에 심복을 꽂아두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도 둘째 큰아버지는 태성화학 심 사장을 끌어오겠다는 뜻을 밝혔다.

‘범인이라면 택하지 않을 결정이지.’

태성물산의 해외 지사 책임자라면 또 모를까.

있는 자리의 자기 사람을 몰아내는 건 없는 자리를 새로 만들어 채우는 것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그래서 난 물어봐야 했다.

“노리는 게 심 사장님이에요, 우리 아빠예요?”

시계를 매만지던 둘째 큰아버지가 우뚝 동작을 멈췄다.

그러더니 대답은 않고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재밌는 질문이네.”

둘째 큰아버지는 풀었던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매기 시작했다.

단추도 채워서 처음 만났던 차림새 그대로 되돌아갔다.

머지않아 이 자리를 뜨겠다는 뜻이었다.

“심 사장이냐, 성준이냐. 그걸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둘째 큰아버지의 대답이 뜻하는 바를 알아챘다.

심 사장은 아버지를 도와줄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유능한 심 사장을 빼앗아 쓰면 아버지의 파워는 저절로 약해질 것이고, 입지 역시 좁아질 테니까.

“두 번째 질문이에요. 심 사장님을 굳이 해외 지사로 발령 내려던 이유는 뭐예요?”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대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간다고?”

둘째 큰아버지는 대답하는 대신 콧등을 긁적였다.

“이거 빚을 탕감하려다가 외려 빚을 더 지게 생겼군. 내가 심 사장을 해외 지사에 꽂아두려던 건 어떻게 알았지?”

“그건 큰아버지 때문인가요, 우리 아빠 때문인가요?”

눈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순식간에 우리 둘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카님, 아까 이름이 뭐랬었지? 진혁이랬던가?”

그때 지하실로 내려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째 큰아버지를 보좌하는 양 비서와 태성화학 심 사장이었다.

“심 사장님, 서재에 계셔야 할 분이 아이들 놀이방엔 어쩐 일로 내려오셨습니까?”

“어린 도련님이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서 떡국을 드셨잖습니까. 체하지 않고 배기겠나 싶어서 소화제를 챙겨주러 왔지요.”

태성화학 심 사장은 양복 주머니에서 어린이용 소화제를 꺼냈다.

“계열사 임원 회의라고 해봐야 딱히 할 말도 없고 말이죠. 보안상 비밀 엄수라고 하는데도 자꾸만 귀찮은 질문을 퍼붓길래 냅다 도망쳤지 뭡니까.”

태성화학 심 사장은 둘째 큰아버지와 내가 나란히 마주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기준 도련님께서는 이만 올라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오죽하면 양 비서가 도련님을 모시러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흐음, 내게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시고?”

“뭐, 안 그래도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싶긴 했습니다.”

태성화학 심 사장은 슬쩍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더니 90도로 몸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태성식품을 내놓으시면서까지 저를 중히 쓰겠다는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맡은 바 소임이 있어 따를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건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깐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았을 겁니다.”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을 요구하는 것도 무례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에겐 태성의 미래, 대계의 포석, 보안상의 비밀이란 중대한 임무가 있어서.”

태성화학 심 사장은 씩 웃었다.

“그러니 앞으로 더 좋은 제안을 궁리하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단 말씀을 드리려고 온 거죠.”

“딱 떨어지는 대답이군요. 미련도 두지 말라? 하하하.”

둘째 큰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심 사장님의 뜻,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둘째 큰아버지는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정혁아, 오늘 남은 빚은 외상장부에 달아둬라.”

탐색전은 끝났다는 소리였다.

둘째 큰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태성화학 심 사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심 사장님, 그렇게 야박하게 선 딱 긋지 말죠.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혹시 압니까? 나와 함께 태성을 위해 일하게 될지.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둘째 큰아버지는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양 비서는 둘째 큰아버지가 챙겨왔던 종이 상자를 챙겨 들고 뒤따랐다.

둘째 큰아버지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태성화학 심 사장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아까 태성화학 공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셨죠?”

태성화학 심 사장이 놀이방을 찾아온 진짜 용건이었다.

내가 태성화학 공장을 견학시켜 달라고 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태성그룹 보고서에 따르면 태성화학 사고에 대해 결론만 간략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난 안전사고라고 넘겼었는데, 철구 아저씨는 용의자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죽은 우광건설 김광필과 태성화학의 커넥션을 파고들었단 말이지.’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철저하게 확인해두고 싶었다.

이 사고로 23명이 죽고, 166명이 병원으로 호송됐다.

태성이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태성화학 화재 사고였다.

‘만일 지금 이 시점에서 태성화학에 화재가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개판 나는 거다.

과거와 달리 인수 소리가 나왔으니까.

화재로 인해 제일 큰 타격을 받을 사람을 꼽자면 단연 태성화학 심 사장과 할아버지가 으뜸일 터였다.

< 탐색전 > 끝

ⓒ 오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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